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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48화 (48/74)

48화

“저는 대표님을 좋아해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다연의 행동을 봐서는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좋아한다니. 태훈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첫사랑이라는 게, 그 별장 오빠라는 버프가 이렇게 크게 작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하게 더러웠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질 말에 비하면 그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저는 작은 대표님을 좋아해요.”“아…….”

태훈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보이자, 다연은 ‘작은’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백 받은 여자의 얼굴이 저렇게 참담할 수가 없는데, 저 참담한 얼굴로 고백을 받아줄 리가 없지.

입 안이 썼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태훈은 이런 기분이 낯설었다. 태준에게 질 때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땐 항상 분했고 원망스러웠고,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가 됐든 다연이 원하는 대로, 그녀의 뜻대로 되길 바랄 뿐.

“죄송하지만, 대표님 마음 거절합니다.”

한 치의 여지도 없는 깔끔한 거절.

“아시겠지만, 전 서태준 대표님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깔끔한 거절에 이은 확인사살까지.

태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차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저와 작은 대표님.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꽤 견고한 사이입니다.”

“…….”

“저희가 꽤, 아주 오래된 사이이거든요.”

“……!”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다연은 제가 가짜라는 것은 물론 진짜가 누군지를 다 알고 있었다.

담담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자, 태훈은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태준을 이기기 위해서 이보다 더 심한 짓을 했었지만,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몹시도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바로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예전처럼 대표님과 직원으로 웃으면서 인사하길 바랄게요.”

다연이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기…….”

태훈이 그녀를 불렀다.

***

한편. 경합장에서 나온 태준은 별장을 샅샅이 뒤지며 다연을 찾고 있었다.

마당은 물론 수영장과 주방 그리고 취미 방까지 다연이 가볼 만한 곳을 모두 다 가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태준의 머릿속에 한 장소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생각하기도 싫은 곳이라 일부러 가지 않았는데, 남은 곳은 거기 밖에 없었다.

태준은 발길을 돌려 동산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다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 두 손으로 제 심장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듯 답답했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도 이런데, 내가 이런데! 하물며 그녀는 어떨까.

다연이 걱정됐던 태준은 있는 힘껏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마침 별장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멀리 서 있는 다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는지 그녀는 무사해 보였다.

마음을 놓은 태준은 거친 숨을 고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준은 어서 다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의 가슴에 그녀를 품고 오늘 우승한 거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오늘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놓지 말아야지. 이대로 그냥 서울로 올라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야지. 어서 그녀의 향기를 맡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연에게 점점 다가가는 그때, 태준이 멈칫했다.

멀리서는 못 봤는데, 다연의 앞에 태훈이 서 있던 것이었다.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다연을 바라보는 태훈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형의 눈빛에서 저렇게 흔들리는 건지!

태준은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왜 자꾸 다연이한테 접근하는 거냐고, 계속 이딴 식으로 굴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려는 그때, 다연이 몸을 돌리는 게 보였고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본 다연은 방향을 바꿔 걷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태준은 아까부터 자신을 피하는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연이 저러는 게 태훈 때문인 것만 같았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다연이 저렇게 나오니 불쑥불쑥 이상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태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다연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다연이 오른쪽으로 피했다. 태준은 몸을 옆으로 옮겨 다시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이번엔 다연이 왼쪽으로 피했다. 다시 그녀의 앞길을 막자, 그제야 다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 마주치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졌어?”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요?”

“우리가 볼일 있어야 눈 마주치는 사이인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요?”

“……!”

차가운 다연의 말에 태준은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태훈이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무슨 얘기를 했기에 형 표정이 저렇게 무너져 내려?”

“하!”

“왜? 어이없어? 기막혀?”

“네. 어이없고 기막히네요. 이 순간에도 그런 얘기밖에 못 해요?”

“어. 이런 얘기밖에 못 해.”

“왜요?”

“그게 바로 우리 사이이니까.”

“……!”

태준은 차갑게 식은 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눈빛에 지분 있고, 네 사생활에 온갖 간섭하고, 다른 남자랑 있으면 질투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그게 바로 나야.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 사이고.”

태준의 말에 다연은 울컥했다.

그의 말이 다 맞는데, 그의 말이 눈물 날 정도로 좋은데, 내 남자의 질투가, 내 남자의 소유욕이 날 황홀하게 하는데,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냐고.”

“…….”

“너와 나 사이에 왜 비밀이 있어? 그리고 그 비밀이 왜 하필 형이야?”

태준이 소리치자, 다연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는 태준 씨는 나한테 비밀 없어요?”

“없어.”

“정말 없어요?”

“없다니까!”

단호한 태준의 대답에 차갑게 식었던 다연의 검은 눈동자에 원망이 가득 들어찼다.

원망과 미움, 분노와 격분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연을 보자, 태준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연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태준을 노려보던 다연은 냉랭한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갔고, 태준은 답답한 심정으로 그녀를 쫓았다.

“얘기 좀 해.”

“나한테 비밀 없다면서요?”

“그래. 없어.”

“그럼 나도 할 말 없어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말 좀 해봐. 말을 해야 내가 알지!”

태준이 소리치자, 다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저 멀리 삐죽 솟아 있는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저기서 첫 키스 했어요.”

“……!”

고백과 같은 말에 태준은 놀랐고, 다연은 담담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 어렸을 때 여기서 살았어요. 우리 엄마가 이 별장 관리인이었거든요.”

처음엔 쪽팔렸다. 식당 쪽방에서 벗어나 이사한 곳이 고작 별장 쪽방이라는 게.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는 너무도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장 안주인은 좋은 분이었고, 별장 주인의 아들은 더 좋았다. 그래서 이 집에 정이 갔고, 여기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내가 별장 오빠에 대해 말한 적 있죠? 그 오빠가 이 별장 주인 아들이었어요. 그리고 내 첫사랑이었고요.”

다연의 고백에 태준은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13년 전 추억이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었고, 날이 풀리면 나란히 길을 걸었어요.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오빠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식빵 피자를 만들어주었고요.”

서툴렀던 태준의 요리 실력은 점점 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다연에게 맛있는 걸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난 그 오빠가 좋았어요.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요리를 날 위해서 해주는 것도 좋았고, 맛있게 먹고 있는 날 보고 있는 그 눈빛도 좋았어요.”

마치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처럼, 별장 오빠는 요리를 해줄 뿐 정작 자신은 먹지 않았다.

“안 먹어도,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댔어요. 난 그런 오빠가 좋았어요. 그래서 결혼하자고 청혼도 했고요.”

다연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났다. 쪼끄마한 게 뭘 안다고 덥석 청혼했을까. 얼마나 좋았기에, 얼마나 같이 있고 싶었기에.

미소를 머금던 다연은 표정을 바꾸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큰 대표님이 별장 주인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

“내가 그토록 좋아했고, 그렇게 기다렸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혹시 흔들린 거니?

태준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아까 큰 대표님이 무슨 말 했냐고 물었죠? 저한테 고백하더라고요. 저 좋아한다고.”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다니. 그래도 설마 했다. 그래도 형이 그렇게까지 밑바닥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거짓말에 이어 결국 고백까지 했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대답했어요.”

“뭐라고 대답했는데?”

“이젠 태준 씨 차례예요.”

형의 고백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궁금해 미치겠는데, 갑자기 다연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게다가 내 차례라니?

“난 다 말했어요. 이곳에 얽힌 내 첫사랑, 그리고 큰 대표님과 있었던 일. 그러니까 이제 태준 씨가 말할 차례라고요.”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왜 자꾸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건지, 뭘 자꾸 말하라고 하는 건지 태준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던 다연은 씁쓸한 얼굴로 피식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끝까지 비겁하네요.”

“……!”

다연은 거기까지만 말한 채 걸음을 옮겼고, 태준은 답답한 마음에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다연이 걸음을 멈췄다. 왜 갑자기 걸음을 멈춘 건지 궁금했던 태준은 유심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다연이 떨고 있었다. 뭔가에 질리기라도 한 듯, 오한 들린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놀란 태준은 다연의 양쪽 팔을 붙잡고 물었다.

“왜 그래? 왜 갑자기 떠는 거야?”

그때 다연이 어딘가를 가리켰고, 그곳을 본 순간 태준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곳이었다.

다연이 죽을 뻔했던 그곳. 그리고 두 사람이 13년이나 헤어지게 됐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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