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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47화 (47/74)

47화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경합이 시작되었다.

다연은 그동안 준비해온 레시피 대로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준비한 요리의 이름은 <나의 작은 밥상>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는 현대인들에게 엄마가 해주는 건강하고 맛있는 밥 한 끼를 차려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입맛이 사르르 돌 정도로 윤기가 나는 하얀 쌀밥에, 갖은양념과 채소를 넣어 달달 볶은 소불고기, 우거지를 잔뜩 넣은 된장국, 그리고 고기를 싸 먹을 호박잎과 밑반찬이 전부인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운 밥 한 상이었다.

1번 팀과 2번 팀의 요리를 맛본 태준과 태훈 그리고 임원진들이 다연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다연은 바로 손님에게 나가는 것처럼 그릇 하나하나를 나무 트레이 위에 오밀조밀 예쁘게 세팅해 놓았다.

“음. 밥이 참 맛있게 잘됐네요.”

“국도 짜도 짜지 않고 딱 알맞게 간이 잘 됐어요.”

“불고기는 야들야들한 게 입에서 살살 녹는군요.”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네요. 호박잎이 신의 한 수인 것 같은데.”

저마다 한 마디씩 음식에 대해 평가했다. 다행히 다들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바짝 얼었던 다연은 얕게 숨을 뱉으며 긴장을 풀었다.

만족스러운 평가단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 빈 그릇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말 맛있네요. 국 좀 더 주시겠어요?”

태준이었다. 경합 전에 한 번 맛보여 달라고 조르던 그였는데, 까다로운 그의 기준에도 합격한 모양이었다.

다연이 살짝 웃으며 그의 그릇으로 손을 뻗으려고 하려는 찰나.

“저도요.”

태훈도 그녀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두 남자가 나란히 서서 그녀에게 그릇을 내밀자, 임원진들은 물론 온 직원들의 시선이 다연에게 꽂혔다. 누군가는 수군댔고, 주은은 들고 있던 행주를 던지며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다연은 이 공간에 세 명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흔들리는 자신.

두 남자가 내민 그릇을 찬찬히 보던 다연은 그릇 하나를 들고 국이 있는 냄비를 향했다. 순간 태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고, 태준은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훈에게 먼저 국을 떠다 준 다연은 태준에게도 국을 떠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국그릇을 집어 들려는 찰나 태준이 말했다.

“밥도 더 주세요.”

“네. 그릇 주세요.”

“김치도요.”

“예.”

“호박잎도 더 주시고요.”

“예. 그러죠.”

“불고기도 조금 더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만든 모든 음식을 다시 달라고 말하는 내내, 다연은 단 한 번도 태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음식이 아닌 그녀의 눈길이었는데 말이다.

***

“오늘 경합의 우승자는 바로……!”

시식회가 끝났고, 최종 우승자 발표만 남아있었다.

다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사회자를 주시했고, 멀찍이 선 태준은 그녀를 주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던 그녀가 왠지 멀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걸까? 과거의 나에게? 아니면 별장 오빠로 알고 있는 형에게?

저의 부름에도 모른 척 돌아서는 다연의 모습이, 태훈의 그릇을 먼저 들고 가던 그녀의 뒷모습이, 제게 눈길 한번 안 주던 차가운 제 여자의 모습이, 자꾸만 태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의 작은 밥상>의 연다연 대리! 축하합니다!”

이 기쁜 순간을 함께 꿈꿨는데. 그녀의 우승을 축하하고, 그녀의 노력에 손뼉을 치고, 그녀의 노고에 안아주려고 했는데.

다연은 제 옆에서 자꾸만 멀어져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우승자에게는 소정의 보너스와 여행권 그리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포상 휴가가 주어집니다. 자, 그럼 우승자의 소감을 들어보실까요?”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기자, 다연의 우승 소감이 들려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겐 꿈같은 순간입니다. 에 입사한 이후로 이 순간을 꿈꿨고 또 먼 길을 달려 힘겹게 이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멀고 힘든 길을 홀로 달릴 때마다 제게 힘이 되어 주신 그분께…….”

잠시 말을 멈춘 다연은 정확하게 태준을 바라보았고, 찰나였지만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기쁨만 가득해야 할 다연의 눈동자가 왜 저렇게 슬퍼 보이는 건지, 태준은 덜컥 겁이 났다.

자꾸만 상상하기 싫은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생각하기도 싫은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연이 우승 소감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어졌고, 곧이어 뒤풀이가 시작됐다.

풍성하게 차려진 요리와 술이 어우러지니, 줄타기하듯 긴장감이 맴돌던 경합장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거꾸로 해도 연다연. 축하한다. 내가 뭐라 그랬어? 될 거라고 했지?”

“고마워, 언니.”

“알지? 한턱 쏴!”

“당연하지. 서울 가면 내가 엄청 맛있는 거 쏠게.”

“맛있는 거 필요 없고 비싼 거. 무조건 비싼 거.”

유미에게 축하를 받은 다연은 시끄러워진 분위기를 틈타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런 그녀를 태준과 태훈이 뒤따랐다.

그 광경을 주시하던 주은은 코웃음을 쳤다.

“아까도 서로 먼저 달라고 눈에 불을 켜고 싸우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사랑싸움이야?”

꽤 괜찮은 남자가 다연을 좋아한다고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인데, 하물며 의 대표가 다연에게 쩔쩔매고 있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그게 어찌나 고깝고 꼴 보기 싫은지. 주은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술을 벌컥 들이켰다.

***

밖으로 나온 다연은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원하던 우승을 했는데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만약 오늘 태훈이 제게 별장 오빠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태준과 축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내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줬던 사람. 그리고 내가 닮고 싶었던 내 롤모델. 그런 그와 함께하지 못하니 마음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가 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연은 아까 자신을 바라보던 태준의 눈빛을 떠올렸다. 태훈의 그릇을 먼저 잡자 황망해진 그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고, 자신은 도망치듯 그의 눈빛을 피해버렸다.

결코, 태훈에게 흔들리는 건 아니다. 다만,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태준을 피하게 했다.

자꾸만 엉뚱한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그 상상이 사실인 것만 같고, 그리고 만약 정말 그 상상이 사실이라면 태준에게 너무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 싫어서. 이렇게 좋은 날 원망하는 눈으로 그를 보고 싶지 않아서.

다연의 발길이 어느새 별장 끄트머리에 닿았다. 저 멀리 야트막한 동산과 1차선 도로가 보였다.

그곳을 살짝 아주 살짝만 봤을 뿐인데,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손이 벌벌 떨려왔다.

“하. 하아.”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몸을 돌리자, 뒤따라오던 태훈과 마주쳤다.

“대, 대표님.”

“왜 그렇게 놀라?”

“아, 계신 걸 몰랐어요. 언제부터 계셨어요?”

태훈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갑자기 나타났어도 저곳의 공포에 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까부터?”

“아……. 식사는 왜 안 하시고.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데.”

태준이 오기 전까지, 태훈은 여직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회식 때만 되면 그의 옆에 앉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묘한 신경전을 벌일 정도였으니까.

“우승 축하해주려고.”

“감사합니다.”

“사실은 너 보고 싶어서 따라왔어.”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눌 정도로 친밀감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또 아무리 별장 오빠라고 해도 이 남자는 태준의 사촌 형이다. 그리고 그는 태준과 자신의 사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이렇게 제게 성큼 다가와 버리니 다연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다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태훈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꿨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 잠시 둘러보고 있었어요.”

혼자 있고 싶었던 다연은 짧게 대답했지만, 같이 있고 싶었던 태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화거리를 계속 끄집어냈다.

“별이 많네. 여기 예쁘지?”

“예? 아, 네.”

“이 별장에서 여기가 아마 제일 예쁠 거야.”

“……!”

예쁘다는 말에 다연이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제일 예쁘다, 여기가 제일…….

그의 말이 너무 거슬렸다. 이 별장에서 여기가 제일 예쁘다니. 여기가!

다연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동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니, 살면서 가장 예쁜 추억을 간직한 장소인 것처럼 다연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혹시 저기 기억나요?”

그녀의 질문에 태훈은 흠칫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 저기서 자주 놀았잖아.”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말 자신이 상상했던 게 사실인 건지.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다연아. 사실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태훈의 얼굴 위로 달빛이 내려와 앉아 그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 어떤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수려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태준과 꼭 닮은 얼굴이기도 했다.

친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두 남자는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저 안경만 벗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 너 좋아해.”

그의 고백에 다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좋아한다……. 좋아한다……라.

다연은 불현듯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별장 오빠일까, 서태훈일까?

“지금 꼭 대답하지 않아도 돼. 난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한 말이니까.”

태훈은 다연을 배려하며 말했다.

“이만 들어갈까? 정말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데. 너 오늘 주인공이잖아.”

태훈이 몸을 돌려 회식 장소로 가려고 하자, 다연이 그를 잡았다.

“대답할게요, 지금.”

“어……?”

“고백에 대한, 대답하겠다고요.”

“…….”

결심이 선 다연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고, 긴장한 태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대표님을 좋아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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