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세 사람의 눈빛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태준은 태훈을, 태훈은 다연을, 다연은 태준을. 서로를 보는 눈빛에 증오와 애절함 그리고 미묘한 흔들림이 가득했다.
“손 놓으라고 했다.”
태훈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연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태준에게 향했던 다연의 시선이 태훈에게로 쏠렸다.
다연의 한 손에는 첫사랑의 손이 또 다른 한 손에는 13년 전 첫사랑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들려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건 단순히 태훈의 손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 눈물로 밤을 새우고, 지난 10여 년간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추억이 그녀를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저쪽에는 현재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다연은 태준에게 가기 위해 태훈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태훈이 손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가지 마.”
태훈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눈빛은 절절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의 눈에는 마치 자신만 보이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다연은 자신을 향한 이 남자의 감정이 단순히 태준에 대한 승부욕만 가지고 생긴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태훈이 별장 오빠라면, 13년 전 자신을 그토록 아꼈던 그 남자라면, 지금 이런 그의 행동은 사촌 동생을 이기기 위함이 아닌 자신을 향한 진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과거고 추억일 뿐이다. 아무리 그가 별장 오빠고 자신의 첫사랑이라 한들 현재의 사랑을 흔들 수는 없었다.
“놔주세요.”
“……!”
다연의 말에 태훈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마치 전혀 예상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람과 실망이 눈동자를 더 촉촉하게 만들었다.
놔달라는 말에도 태훈이 제 손을 놓지 않자, 다연은 힘을 주어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손을 놓쳐 황망해진 그의 손이 허공을 휘청거리며 다시 다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제게서 멀어져 태준에게 가고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도 나는 아닌 건가? 꼭 태준이어야만 하는 건가? 난 절대 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아버지 말씀처럼……?
머릿속에 자괴감을 낳는 의문들이 자꾸만 제게 질문을 해올 때였다.
“다연아……!”
태준에게 갈 줄 알았던 다연이 그를 지나쳐 걷고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그냥 지나친 게 아니라, 태준이 부르는데도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냉랭한 다연과 슬퍼 보이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 묘한 우월감이 태훈의 마음에 들어찼다.
이긴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널 이기면 매번 이런 기분이겠구나. 넌 항상 내게 이런 기분이 들었구나!
묘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태준이 절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뭐 하는 짓이야?”
매번 이기기만 하던 동생이 다급한 모습을 보이자, 흡족해진 태훈은 없던 여유까지 생겼다.
“내가 말했잖아. 나 연다연 씨 포기 안 한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다연이 내 여자라고.”
“글쎄. 오늘 보니 많이 흔들리는 것 같던데?”
흔들렸다는 말에 태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훈은 제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패배의 분노에 차 있거나, 이를 갈고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심으로 그는 자신 있어 하고 있었다.
무려 내 여자에게!
“형은 이번만큼은 절대 나 못 이겨.”
“조심해. 뺏기고 징징 찌지 말고.”
“왜 못 이기는지 알려줄까?”
태준은 태훈에게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형은 가짜니까.”
“……!”
금세 전세가 역전됐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혔던 태준은 금세 이성을 되찾았고, 자신만만하며 호기롭게 굴던 태훈은 바들바들 떨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했어. 왜 형이 워크숍 장소로 이곳을 택했는지.”
뒤늦게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간다는 걸 알게 된 태준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형은 왜 갑자기 김 사장과 미팅을 잡아놓고 나를 따돌렸을까? 형은 왜 갑자기 워크숍 핑계를 대며 경연을 굳이 야외에서 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워크숍 장소를 자신이 정한다고 했을까?
처음엔 수긍이 가던 일들에 점차 의심이 생기니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했다. 그리고 최근에 있던 일들을 조합해 봤을 때,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연다연.
자신 몰래 다연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다연에게 접근하기 위해 김 사장과 미팅을 잡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워크숍 장소를 굳이 자신이 정한다고 한 걸까?
다시금 과거를 되짚어보니 아버지 생신 때 태훈과 큰아버지가 2층으로 올라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집에 확인해보니.
“내 물건에 손댔더라. 치사하게.”
“!”
순간 태훈은 제 밑바닥까지 들킨 것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사진 봤으니 잘 알 거야.”
하지만 태준은 멈추지 않고 태훈을 밀어붙였다.
“왜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지.”
‘우리’라는 단어에 태훈은 전의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첫사랑 버프를 뿌리고 다연에게 접근해도 그녀의 냉랭함은 여전했다.
이 별장이 자신의 것이라고 밝혔을 때도, 13년 전 그 남자가 자신이라고 말했을 때도,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신이 첫사랑이라는 걸 증명할 때도. 다연의 눈에 담긴 의심은 여전했다. 다만, 의심의 크기가 조금 줄었을 뿐이지.
하지만 태준은 다연과 자신을 스스럼없이 ‘우리’라고 불렀다. ‘우리’라는 단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그건 세월이 빚고,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결실 같은 거였으니까.
“알아들었으면 제발 데면데면, 어색하게 대해줘. 나도 다연이도.”
협박하는 눈빛으로 부탁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태훈이 태준의 발길을 잡았다.
“근데 말이야.”
어느새 태훈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형은 참 오뚝이 같은 사람이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번에도 그러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방금 생각을 좀 해봤는데.”
“생각하지 마. 그게 다연이 일이라면 더더욱.”
“다연 씨는 모르더라.”
“!”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사실을.”
얼렁뚱땅 넘어가기엔 형은 똑똑했고, 자신은 치밀하지 못했다.
다연을 찾는 지난 13년간 태준은 치밀할 수 없었다. 눈을 떠보니 미국이었고, 다연을 찾으러 별장에 와보니 그녀는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치밀하지 못할 수밖에. 자신의 비밀을 형에게 들킬 수밖에.
“넌 내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왜 다연 씨한테 사실대로 얘기하지 못하는 걸까?”
가능하다면 끝까지 모른 척, 아닌 척, 시치미를 뗄 거다. 비겁해도 좋다. 거짓말쟁이라도 욕해도 상관없다.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거니까.
“네가 네 입으로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없어. 그런 이유.”
“그럼 까. 가서 말하라고! 형은 가짜고 내가 진짜라고!”
“…….”
“못 하겠지. 말했을 거면 진즉에 다연 씨를 따라갔겠지.”
태훈의 말이 맞다. 그의 말처럼 다연을 따라가 사진 속의 남자는 형이 아니라 나라고, 네 첫사랑은, 네 별장 오빠는 나라고, 말했을 거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이었고, 매일 밤 꿈꾸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꿈은 항상 악몽으로 끝났다.
현실을 악몽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태준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제 그쪽에 집중해 보려고.”
“……?”
“네가 첫사랑이라고 밝히면 더 좋아할 텐데, 굳이 네 존재를 숨기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까지 하면서 네가 지키려는 비밀이 과연 뭘까?”
“……!”
다시 여유를 되찾은 태훈은 얼굴에 미소까지 띠며 태준을 도발했다.
“그때까진 내가 네 비밀 지켜줄게. 내가 다연 씨 첫사랑 하면서.”
태훈은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는 완벽한 태준의 패배였다.
자신이 별장 오빠라는 걸 밝히려니 다연이 다치는 게 두려웠고, 밝히지 않으려니 서태훈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태준은 먼발치에 있는 별장을 바라보았다.
10여 년 전.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딱 한 번 와보고 그 후로는 발길을 끊었던 곳이다.
이곳은 여전했다. 푸르른 잔디도, 파아란 하늘도, 시원하게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도, 시끄럽게 재잘대는 새소리도.
다연을 만나게 해준 이곳은 태준에게 너무도 소중한 곳이었다.
공부하느라 삭막했던 태준의 가슴 속에 다연은 산들바람이었고, 밝은 햇살이었으며, 푸르른 나무였다.
어둠 속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피자를 찾는 소녀가 황당했고, 피자 만들어주겠다는 소리에 말간 미소를 짓는 그녀가 당황스러웠으며, 피자를 만들어준 오빠가 좋다며 입맞춤을 하는 다연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제 어깨에도 닿지 않는 쥐방울만 한 게 옆에 들러붙어 재잘대는 소리가 어찌나 정답게 들리는지.
제 심장을 통째로 그녀에게 주고 싶은 심정인데, 결혼해 달라며 호기롭게 프러포즈하는 다연의 모습에 태준은 두 손 두 발 모두 들어버렸다.
오늘부터 난…… 네 거다.
그러니까 찜쪄 먹든 삶아 먹든 튀겨 먹든 네 마음대로…… 나를 요리해줘.
13년 전 태준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연다연 거라고.
연다연만이 날 요리할 수 있다고.
추억이 담긴 별장을 둘러보던 태준은 별장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별장이 끝나는 길에는 좁은 찻길이 하나 있었고 찻길 너머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저기는 아침저녁으로 다연과 함께 산책하러 다녔던 곳이었다.
추억에 이끌려 동산으로 발길을 옮기려던 그때,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빵빵-
그리고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함께 거대한 차량이 좁은 길가로 밀고 들어왔다.
피할 곳도, 피할 정신도 없는 상태였다. 태준은 그대로 두 눈을 감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하아. 하아. 하아.”
산발적인 호흡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고 정상적으로 뛰던 맥박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거대한 트럭도, 풀숲으로 밀쳐진 다연의 몸도.
그저 자신의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만 남아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