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3년 만인가?”
오랜만에 첫사랑을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는.
“나 알아보겠어?”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첫사랑이 이렇게 다른 모습인가…… 하는 놀라움이 더 컸다.
내 기억 속 별장 오빠는 다정했고 따뜻했으며 때로는 엉뚱했고 또 지독하게 나밖에 몰랐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모르겠다. 그저 너무도 낯설기만 할 뿐.
“많이 놀랐지?”
“예? 아…… 네.”
놀랐다. 놀랄 수밖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첫사랑이 별안간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랄 지경인데, 그 남자가 4년간 다닌 회사의 대표라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정말 대표님이 별장 오빠예요?”
다연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묻자, 태훈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13년 전 다연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초등학생이었고, 별장 오빠는 막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이었다.
너무 오래전의 기억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 그런지 다연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행동과 장면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지만, 별장 오빠의 정확한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녀의 기억 속 첫사랑을 도려내기라도 한 듯, 아주 명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순정 만화 속 남자 주인공 같다는 둥 얼굴이 반짝인다는 둥 피부가 하얗다는 둥 하는 것들은 모두 다연의 희뿌연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잔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다연은 첫사랑 오빠의 이름도 모른 채 ‘별장 오빠’라는 호칭으로만 그를 불렀다. 그러니 태훈이 별장 오빠라는 사실을 모를 수밖에.
그런데 태훈은 언제 안 걸까? 언제부터 내가 이 별장에서 살았던 소녀라는 걸 알았던 걸까?
날 만난 처음부터? 그럼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 보며 4년을 같은 회사에 다녔는데, 왜 그동안 모른 척했던 걸까?
“나도 처음엔 못 알아봤어. 그땐 많이 어렸었잖아.”
하긴 갓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던 다연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그땐 매서운 겨울바람에 양쪽 볼이 빨갛게 부르터 있었고, 긴 생머리를 양쪽 갈래로 땋아 내렸으며, 촌스러운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전체적으로 촌스러웠던 그때와 지금의 다연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큰 대표님은 언제부터 날 알아본 걸까? 언제 알아본 걸 지금 아는 체하는 걸까? 오늘? 어제? 그제? 아니면 한 달 전? 1년 전?
“그럼 언제 절 알아보신 거예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태훈은 눈동자를 떼르륵 굴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 언제 알아보신 거예요?”
다연이 재촉하던 그때.
“연다연! 너 어떻게 된 거야?”
버스에서 내려 짐을 챙기던 유미가 다연을 알아보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유미의 등장으로 대답 들을 기회를 놓친 다연은 아쉬웠고, 머리 굴릴 시간을 번 태훈은 다행스러웠다.
“어? 대표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박 대리.”
태훈이 옆에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한 유미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큰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조리실 둘러보고 나가니까 버스가 출발하고 없더라고.”
유미에게 태훈의 차를 타고 온 이유를 설명한 다연은 그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경합 준비 잘하고 이따 봐요.”
다연과 유미는 태훈에게 인사하고 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소로 인사하던 태훈은 다연이 멀어지자, 냉랭한 표정으로 얼굴을 고쳤다.
***
“큰 대표님이야?”
둘만 있게 되자 유미가 물었다.
“뭐가?”
“네 마음이.”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작은 대표님 출장 간 사이 우연히 버스를 놓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큰 대표님 차를 타고 단둘이 여기까지 왔다? 이게 우연이겠어?”
유미의 말을 들어보니 다연도 뭔가가 이상했다.
무엇보다 갑자기 잡힌 태준의 일정이 가장 이상했다.
태준은 한국에 들어온 후 내부에서 레시피 개발을 하거나 임원진들과 회의를 했고, 외부 일정은 모두 태훈이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왜 하필 회사 행사가 잡힌 오늘 외부 일정이 잡힌 걸까? 그리고 버스. 분명히 출발시각까지 여유가 있었는데, 갑자기 버스가 출발한 것도 이상했다.
‘일부러 그런 건가? 태준 씨 없는 사이에 별장 오빠라는 걸 밝히려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태준이 있었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정말 큰 대표님이…… 별장 오빠인가?’
다연은 몸을 돌려 태훈을 보았다. 멀찍이 서 있는 그는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봐. 너 보는 눈빛이 야시꼴롱 멜랑꼴리하다니까? 그리고 넌…….”
옆에 있던 유미가 태훈을 돌아보며 한 마디 하더니, 다연의 눈빛을 보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음. 넌…… 아무 감정이 없구나?”
“가자.”
“큰 대표님이 아니었네. 그래서 눈빛이 저렇게 멜랑꼴리한 건가?”
“빨리 가자니까.”
유미의 말이 다 맞았다.
별장 오빠를 다시 만나면 미친 듯이 가슴이 떨리거나, 그를 마구 때려주거나, 펑펑 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를 다시 만났는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첫사랑 별장 오빠’라는 버프를 가졌음에도 태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별장에 딸린 외부 주방에 짐을 옮겨놓은 다연은 재료 손질에 들어갔다.
경합은 태준이 오면 바로 시작하기로 했고, 그가 오기 전까지 최종 후보들은 재료 준비를 하기로 했다.
다른 팀들은 여러 명이 합심해서 서로 도왔지만, 다연은 오롯이 혼자였다. 유미도 다연과 같은 팀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도울 수는 없었다.
혼자 조리대 앞에 서니 머릿속에 잡념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태훈이었다.
그는 정말 별장 오빠가 맞을까? 그걸 최근에 알게 됐고 그래서 나한테 접근한 걸까?
많이 좋아했던 남자였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심장이 뛰었고,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고, 첫 입맞춤이었고, 첫사랑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이 옥죄듯 아팠고, 태훈이 별장 오빠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큰 대표님이 별장 오빠일까? 근데 왜 이렇게 믿기지 않는 걸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날카로운 음성이 다연의 귀에 날아와 꽂혔다.
“좋아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는데, 웬 한숨?”
하아. 강주은 쟤는 왜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거는 건지.
“안 그래도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보태지 말고 갈 길 가지?”
“왜 속이 시끄러우실까? 아, 두 남자 중 누굴 선택할까 고민이라서?”
비아냥대는 주은의 말에 다연은 칼질을 멈추고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나 칼 든 거 안 보여?”
“왜? 한 대 치시게?”
“칼로 왜 치니? 확 썰어버리지!”
다연이 칼날보다 더 무서운 눈빛을 번뜩이며 말하자, 놀란 주은이 입을 다물었다.
“강주은.”
“왜, 왜!”
“너 나 좋아하니?”
“뭐? 아침에 뭐 잘 못 먹었니? 왜 미친 소리야?”
“그럼 나한테 관심 좀 꺼. 너한테 신경 쓸 정신 없으니까.”
“왜? 어제는 작은 대표님 신경 쓰고, 오늘은 큰 대표님 신경 써야 해서?”
주은이 실실 웃으며 빈정대자, 다연이 칼을 던져 나무 도마에 꽂아버렸다.
“헉!”
그러자 놀란 주은이 겁을 집어삼키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강주은.”
“왜…… 왜, 왜?”
“까불지 마라. 그러다 이 오징어 꼴 나는 수가 있다.”
매서운 협박을 남긴 다연은 앞치마를 휙 벗어던지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흥. 웃기고 있네. 지가 무슨 수로……. 헙!”
다연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리던 주은은 도마 위에 난도질 되어 있는 오징어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년 성깔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그 잘난 두 대표님이 쟤한테 안달복달 못하는 건지.
“아으! 짜증 나!”
***
주방 밖으로 나온 다연은 정원을 거닐었다.
폭신하고 푸르른 잔디 위를 걸으니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별장 주인이 없는 날에는 동생과 함께 이 잔디 위를 신나게 뛰어놀았다. 여름에는 저기 저 계곡까지 내려가 잠자리를 잡았고, 겨울에는 저 위에 있는 동산에 올라가 눈썰매를 타곤 했다.
그리고 별장 오빠가 왔을 때는 무작정 함께 걸었다. 잔디 위를 나란히 걷기도 했고, 계곡까지 함께 내려가기도 했고, 아무도 밟지 않은 동산 위의 새하얀 눈길을 걷기도 했다.
걷기만 했는데도 즐거웠다.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재미있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며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었고, 별장 오빠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제게 매주고는 했다.
따뜻한 눈빛과 따뜻한 손길과 따뜻한 마음이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껴졌다.
“다연아.”
그때를 생각하며 희미하고 웃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태훈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떠올리며 웃었는데, 눈앞에 그가 있으니 웃음이 멈춰졌다.
“뭐해?”
“아……. 그냥 둘러보고 있어요.”
“예전엔 우리 존댓말 안 썼던 것 같은데.”
“아직 어색해서……요.”
“그래. 차차 나아지겠지.”
어느새 태훈은 다연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와 비슷한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마치 13년 전 그때처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과 같이 걷고 있는 건 그때와 마찬가지인데, 마음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를 일이었다.
다연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태훈을 살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이목구비는 별장 오빠와 비슷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는 달랐다. 안경을 쓴 것도.
물론 이런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느낌이었지.
‘달라도 너무 달라. 완전히 딴 사람처럼…….’
한편, 다연의 시선을 느낀 태훈은 그녀의 생각을 꿰뚫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 별장의 주인이라고 말 한 이후부터 다연은 일관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의심.
다연은 자신이 ‘별장 오빠’가 아닐 거라는 의심을 아까부터 일관성 있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훈은 여기서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여기 기억나?”
태훈이 걸음을 멈추고 묻자, 힐끔거리며 그를 보고 있던 다연은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
기억난다.
삼각대 위에 올려둔 작은 카메라로 둘이 찍힌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별장 오빠는 이곳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눈을 감았다고 다시, 표정이 이상하다고 다시, 딴 데 보고 있었다고 다시.
몇 번의 실패 끝에 결국은 너무 예쁜 인생 사진을 건진 것까지, 다 기억난다.
“나 그 사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그의 말에 다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고, 태훈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갑 속에서 사진을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맞다. 그때 찍은 그 사진. 하얀 눈길 위에서 빨간 목도리를 같이 두르고 찍었던 그 사진이 확실했다.
사진을 보자 의심과 의혹으로 가득 찼던 다연의 눈동자에 믿음이 번졌다.
“이 사진을 여태 갖고 있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난 잃어버렸는데…….”
잦은 이사로 사진을 잃어버리고 울고불고 난리 쳤던 게 떠올랐다. 퉁퉁 부은 눈으로 엄마한테 대들다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던 것도.
“여기가 바로 여기잖…… 악!”
“조심!”
사진을 보고 흥분한 다연이 걸음을 옮기다 그만 돌부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순간 태훈이 그녀를 잡아주었고,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괜찮아?”
“예.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있을 때, 광폭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손 놓지?”
언제 왔는지, 태준이 죽일 듯한 눈으로 태훈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