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태훈은 먼발치에서 다연을 지켜보았다. 유미와 함께 버스에 짐을 실은 그녀가 회사로 되돌아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꼼꼼한 그녀의 성격상 짐을 모두 챙겼는지 확인하러 가는 길일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다연을 보며 태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출발해요. 버스에 못 탄 직원은 내가 태우고 갈 테니까.”
태준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다연에게 접근하기 딱 좋은 기회였다.
***
태훈의 차에 올라탄 다연은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든 손을 꼼지락거렸다. 다른 방법이 없어 타기는 했지만,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됐다.
태훈을 스치듯 쳐다보기만 해도 눈에 불을 켜는 질투 많은 남친 때문에 지금 꼭 가시방석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되면 기분 나쁠 것 같아 문자를 보내놓을까 해서 핸드폰을 꺼내든 다연은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만약 태훈의 차를 타고 함께 가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면, 그의 성격에 거래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지금 당장 달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 남자는 어쩜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건지.
태준을 떠올리며 피식거리고 있자, 태훈이 말을 걸어왔다.
“뭐 좋은 일 있어요?”
“아뇨, 그냥. 오랜만에 교외로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경합 준비는 잘했어요?”
“잘했다기보다는 열심히 했어요.”
“떨리겠어요.”
“아무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태훈은 다시 말을 안 걸기라도 하려는 듯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다연은 그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차 문을 열어주고 안전띠를 매주려는 등 적극적으로 구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딱 선을 지켰다.
아까의 대화도 회사 상사와 부하 직원이 나눌 수 있는 그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마음은 편했다.
다연은 창문을 열고 바깥에서 불어오는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초가을이라 그렇게 덥지 않았고,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렀다.
길가에 핀 알록달록한 꽃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두 뼘을 감싸는 것 같아 기분이 더 상쾌해졌다.
옆에 앉은 사람이 태훈이 아닌, 태준이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뻥 뚫린 도로를 한 시간가량 달리자, 오늘의 목적지에 이르렀다.
“다 왔네요.”“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차에서 내린 다연은 자신의 짐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옷가지를 넣어둔 백 팩과 미처 챙기지 못한 조리도구가 든 작은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정원 위에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 몇 채가 놓여 있었고, 마당에는 꽤 커다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에 다연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태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다연에게 다가갔다.
“여, 여긴……?”
“다연 씨랑 꼭 같이 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네? 그게 무슨……?”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다연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올려다보자, 태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기억 안 나요? 여기…….”
***
거래처에서 볼 일을 마친 태준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얼굴 좀 자주 보자고.”
“예.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거래처 사장에게 인사한 뒤 자리를 뜨려고 하자, 김 사장이 그를 붙잡았다.
“벌써 가게? 밥이라도 먹고 가.”
신메뉴 레시피라며 독특한 요리를 잔뜩 먹여놓고 또 무슨 밥을 먹으라는 건지. 배가 부른 것도 부른 거였지만, 다연이 보고 싶었던 태준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회사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서요. 식사는 다음에 하시죠.”
“그래?”
“예.”
“이상하다.”
차 문을 열던 태준은 김 사장의 반응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움직임을 멈췄다.
“뭐가 말입니까?”
“내가 서태훈 대표한테 그랬거든. 아무 때나 시간 비고 한가할 때 한번 들르라고.”
태훈의 말과 달랐다. 형의 말에 따르면 김 사장은 꼭 오늘 태준을 봐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거래까지 끊겠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한가할 때 들르라고 했다고?
“정말 아무 때나 시간 빌 때 오라고 하셨습니까?”
믿기 어렵다는 듯 되묻자, 오히려 김 사장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럼. 자네들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일 때문에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부탁 때문에 사람을 오라 가라 했겠어? 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인간은 아니라고.”
“그러게요. 양심 없는 인간은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태훈이 중간에서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양심도 없이.
“아닙니다. 전 그럼, 이만.”
“그래. 어서 가봐. 오늘 와줘서 고맙고.”
태준은 김 사장에게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제게 거짓말을 한 건지, 태훈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아니. 굳이 태훈의 속내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연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도대체 거짓말까지 해가며 자신을 여기까지 따돌리고, 다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분명 무슨 일을 꾸민 것 같긴 한데,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며 차에 올라탄 태준은 안전띠를 매고 경합이 열릴 장소가 찍혀 있는 문자를 열어보았다.
“도착지가 어디라고 했지? 경기고 양평군 양평읍……. 잠깐. 여긴……?”
문자를 보며 오늘 가야 할 곳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던 태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뒤늦게 태훈의 꿍꿍이를 눈치챈 태준은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다연은 절대 그곳에 가면 안 된다. 자신이 그렇게 숨겨온 걸 이렇게 밝힐 수는 없었다.
“젠장, 서태훈!”
태준은 액셀러레이터 위에 올린 발에 힘을 주었다.
***
13년 전. 그러니까 다연이 아직 초등학생일 때 그녀의 가족들은 이 별장에 들어왔다.
엄마의 양손에는 집안 살림 보따리가 들려있었고, 다연은 다훈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새로운 집은 식당 구석에 딸린 쪽방보다 좋았다. 무엇보다 집 안에 화장실이 있었고, 세 식구가 나란히 누워도 한 뼘이나 남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별장 주인이 자주 오지 않아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고, 엄마가 좋으니 다연도 좋았다.
술 따르라는 손님들에게 시달리던 엄마는 남편 잃은 과부에서 마음씨 좋은 별장 주인을 만나 온전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따뜻함이었다.
처음엔 창피하다며 싫어했던 다연도 슬슬 별장에 적응되어 갔다. 다연은 매일 아침 동생 손을 잡고 학교에 갔고, 하교하고 돌아와서는 엄마의 일을 돕곤 했다.
텅 빈 별장 안의 먼지를 털었고, 드넓은 마당을 쓸었으며, 아무도 쓰지 않는 고급 이불을 빨고 널었다.
다연은 궁금했다. 쓰는 사람도 없는데 뭘 이렇게 쓸고 닦고 하는 건지. 하지만 엄마는 언제 주인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항상 청결하게 유지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말처럼 주인 식구들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별장에 들이닥쳤다.
무뚝뚝해 보이는 중년 남성과 세련되고 아름답게 생긴 중년 여성이 차에서 내렸을 때, 다연은 좀 시큰둥했다. 그녀의 예상에서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생긴 분들이었다. 고급스럽고 부티 나는 별장과 딱 어울리는 주인들이었다.
대충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차 뒷문이 열렸고 다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오빠는 처음 보았다.
목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위를 올려다봐야지만 얼굴을 볼 수 있는 큰 키, 약간 마른 몸에 넓은 어깨,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에 빛나는 머릿결까지.
마치 순정 만화 속 주인공이 만화책을 찢고 나온 것만 같았다.
외모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 남자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살면서 처음 맡는 냄새였다.
그건 화장품도 향수도 아닌, 피자 냄새였다.
별장 오빠는 얄밉게도 커다란 피자를 자기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었고, 자신과 다훈에게는 단 한 조각도 나눠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존재 자체도 몰랐겠지만.
그날 밤 다연은 혹시나 피자가 남았을까 살금살금 주방으로 들어갔고,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온 별장 오빠와 마주쳤다.
버려진 피자 박스를 뒤지는 소녀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소년은 그때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박스가 텅 비어 있던 걸 확인한 다연은 울먹거렸다. 난데없는 침입자의 등장에 놀랄 법도 했지만, 별장 오빠는 다연을 달래주며 물었다.
“피자가 먹고 싶었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울지 마. 오빠가 만들어줄게.”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고, 그의 미소는 커피처럼 매혹적이었으며, 그의 제안은 블랙홀처럼 다연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첫사랑은 그때, 그렇게 시작되었다.
***
태훈을 올려다보는 다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태훈이 어떻게 여길 아는 걸까? 아니, 여긴 그냥 안다고 섭외되는 장소가 아니다. 여긴 펜션이나 리조트가 아닌 개인 사유지였다. 그러니 별장 주인과 아는 사이가 아닌 이상 섭외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태훈이 했던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왜 이곳에 나와 같이 와보고 싶었다는 걸까? 도대체 왜?
태훈을 올려다보는 다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가 할 말이 자꾸만 예상돼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닐 거다. 아닐 거야.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태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여기, 우리 별장이에요.”
“하…….”
순간 다연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다시 둘러보아도 이곳은 자신이 1년간 살았고, 자신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던 그곳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곳이 태훈의 별장이라니. 그 말은 즉…….
“정말 오랜만이지? 다연아.”
‘다연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태훈의 목소리에 다연의 심장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