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태준의 집무실을 나온 태훈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태훈이 나온 줄도 모른 채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어 새하얀 얼굴이 더 투명하게 보였다. 빛나도록 아름다운 다연의 모습에 태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보고 또 보았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이제 그만 좀 가지?”
태준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태훈이 뒤를 돌아보았고, 다연이 고개를 들었다.
“볼일 끝났으면 이만 가라고.”
“볼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
냉랭한 태준의 말에 태훈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연을 향해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황당한 태준이 소리쳤고, 당황한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전에 부탁했던 자료 좀 줄래요? 연 비서.”
“아! 예. 잠시만요.”
다연이 재빨리 서류를 내밀자, 태훈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천천히 줘도 되는데, 행동이 너무 빠르네.”
미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류 부탁은 형 비서한테 시켜. 왜 남의 비서한테 시키는데?”
태준이 까칠하게 묻자, 태훈이 다연에게 꽂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뚫어지게 그녀만 보며 대답했다.
“핑계 김에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미친 거야? 미친 거지? 형이 내 비서 얼굴을 왜 보는데? 서류 받았으면 빨리 나가지?”
“안 그래도 나갈 거야.”
태훈은 끝까지 다연만 보다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고, 다연은 밖으로 나가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시선 좀 거두지?”
“예? 헙!”
고개를 돌린 다연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태준의 얼굴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태준이 다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몸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태준과 다연의 얼굴이 아주 완벽히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나만 보라고 했지?”
“아니 그래도 눈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 예쁜 눈은 나 볼 때만 쓰라고.”
“말도 안 돼. 내 눈은 일도 해야 하고, 요리도 해야 하고, 태준 씨 얼굴도 봐야 하고, 또…….”
“또?”
태준이 미간을 모으며 묻자, 다연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또 태준 씨 눈도 봐야 하고, 태준 씨 코도 봐야 하고, 태준 씨 입술도 보느라 아주 바쁘거든요?”
“감히 날 놀려?”
다연의 말장난에 태준은 몸 장난으로 대응했다.
그녀를 와락 껴안자, 다연이 ‘꺅!’하고 소리치다가 회사라는 걸 알고 잽싸게 입을 가렸다.
하지만 입을 가렸던 다연의 두 손은 태준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만나자 차가웠던 공기가 이내 뜨겁게 달아올랐다.
***
한편, 태준의 방에서 나온 태훈은 제 손에 들려 있는 연고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인 걸 보아하니 태준이 녀석이 자신에게 주기 위해 새로 산 모양이었다.
“부모도 안 하는 내 걱정을, 왜 네가 하냐.”
태훈은 문득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한심스러웠다.
언제까지 아버지께 쫓겨 동생을 괴롭히고, 동생을 이기려고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건지, 뭘 위해 사는 건지 답답하고 한심했다.
인생의 목표가 서태준일 수는 없는 건데, 왜 내 인생은 내가 아닌 서태준이 목표가 된 걸까.
언제쯤, 이 악몽이 끝날까. 얼마나 더 버텨야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깰 수 있는 걸까.
연고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훈은 뭔가 결심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김 사장님.”
-서 대표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목요일 약속에 무슨 문제라도……?
“그게 취소를…….”
그때였다. 태준의 집무실에서 ‘꺅!’하고 다연의 달뜬 소리가 들려온 건.
순간 태훈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넘실거렸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착각했다. 녀석이 베푼 작은 호의에 나도 착한 놈인 줄 알았다. 난 네 인생의 영원한 악역이고 악당인데 말이다.
태준과 김 사장의 약속을 취소하려던 태훈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약속 다시 확인하려고 전화 드렸어요. 목요일 9시까지 회사로 찾아뵙는다고요.”
전화를 끊은 태훈은 손에 들려 있던 연고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태준아, 다른 건 몰라도 그 여자는 내가 가져야겠다.”
태훈은 들고 있던 연고를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걸음을 옮겼다.
***
워크숍 당일.
산뜻하게 차려입은 다연은 아침 일찍 출근해 곧장 조리실로 향했다.
오늘은 그간 보완한 레시피를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날이었다.
회사에서 진행될 줄 알았던 시식회가 외부에서 진행되는 바람에 최종 후보에 올라간 세 팀은 더욱 바빠졌다.
요리 재료는 물론 주방용품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팀들은 여러 명이 함께 준비했지만, 다연은 혼자였다. 그래서 더 정신없었고, 바빴다.
꼼꼼하게 재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다연은 주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콱 썼다.
“뭐냐? 연다연, 너 왜 나 보자마자 인상 쓰냐?”
“이제 연 대리라고 부르지도 않냐?”
“내 마음이지. 근데 그 많은 걸 혼자 들고 갈 수 있겠어?”
“그렇게 걱정되면 도와주던가.”
“내가 미쳤어? 널 돕게?”
“안 도울 거면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뭐? 이게!”
꽥 소리를 지르던 주은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너 되게 외로워 보인다?”
“넌 외로워서 회사 다니니?”
“왜 오늘은 대표님들이랑 같이 안 있고 혼자야? 아. 직원들 앞에서는 모른 척, 아닌 척하기로 한 거야?”
하아. 귀찮아서 상대를 안 해줬더니 끝까지 가네, 이게?
“너 안 바쁘니?”
“보시다시피 우린 팀이라서 다른 팀원들이 같이 하고 있잖아.”
“그게 팀플레이의 폐해지.”“뭐?”
“나 하나는 빠져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이기주의. 팀원들은 무슨 죄니?”
다연이 톡 쏘아붙이자, 부르르 떨던 주은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뇌까렸다.
“좌 태훈 우 태준, 양쪽으로 대표님 끼고 다니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유미가 조심하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나 보다. 안 그래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연이 망하기만을 바라던 주은이 약점 하나 잡았으니 아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눈에 선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던 다연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알면 가서 일 봐. 진짜 눈에 안 뵈는 게 뭔지 보기 싫으면.”
확 겁을 주자 주은이 잔뜩 졸아서는 몸을 낮췄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키라니까.”
다연은 멀뚱히 서 있는 주은을 밀쳐내고 계속 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허!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한 번을!”
잔뜩 골이 난 주은은 눈이 찢어지도록 다연을 노려보고 씩씩거렸다.
같은 해에 입사해서 같은 대리 직함을 얻기까지, 주은은 꽤 많은 노력을 해왔다. 박 팀장은 물론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했다.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며 궂은일은 혼자서 도맡았다.
하지만 칭찬은 다연의 몫이었고, 탄탄대로는 다연의 길이었다.
그래서 질투했고, 그래서 미워했다. 그런데 이제 대표님들까지? 그 꼴은 도저히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갈기갈기 찢어놔야지.
이를 바득 갈던 주은은 가지런하게 정리된 다연의 재료와 주방 도구를 발로 확 밀쳐버렸다. 그러자 냄비와 프라이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강 대리!”
“미안. 내 다리가 좀 길어서 걸렸나 보네.”
주은은 제가 저질러 놓은 걸 정리하지도 않고 휙 돌아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태 힘겹게 정리하던 다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주은을 붙잡고 싸울 시간이 없었다. 곧 버스가 떠날 시간이었으니까.
“저런 조카 놈 십팔 색 크레파스 같은 년이 다 있나!”
그때 찰진 발음과 함께 유미가 등장했다. 그녀는 멀어져가는 주은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욕을 중얼거렸다.
“저년 저년. 아주 그냥 싸가지가 바갈쓰야. 다리도 짧은 게.”
“하루 이틀이야?”
“참지 말고 확 들이받지 그랬어?”
“똥이 무서워서 피해? 중요한 일 앞두고 괜히 신경 쓰기 싫어.”
“그래. 잘했어. 도와줄까?”
“고마워, 언니.”
다행히 유미가 도와준 덕분에 주은이 친 사고는 금세 처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조리실과 버스를 왔다 갔다 한 덕에 재료를 넣은 아이스박스와 주방 도구를 모두 버스에 실을 수 있었다.
“언니 먼저 타.”
“넌?”“빠진 거 있나 한 번 확인하고 올게.”
“알았어. 빨리 와. 나 들어가서 눈 좀 붙이고 있을게.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 죽겠다.”
“응.”
조리실로 돌아가 빠진 물건이 없나 확인하고 있을 때, 태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준비는 잘했어?
“그럼요.”
-혼자 짐 옮기기 힘들지 않았어? 옆에 있었으면 내가 도와줬을 텐데.
“유미 언니가 도와줘서 금방 끝냈어요. 그보다 볼일은 다 끝냈어요?”
태준은 거래처 김 사장을 만나기 위해 김포에 들렀다가 양평으로 곧장 오기로 했다.
-아니. 이제 도착했어.
“그렇구나. 일 잘 봐요.”
-응. 경합 전에는 갈 테니까 떨지 말고 잘 준비하고.
“빨리 올 생각하지 말고 조심히 와요.”
전화를 끊은 다연은 다시 한 번 조리실을 훑어본 뒤, 빠뜨린 물건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옆에 태준이 없어서 기운이 조금 빠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합 날이었고, 사사건건 시비 거는 주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내 레시피 선정되기만 해봐라. 강주은 앞에서 보너스 봉투 들고 춤을 추고 말 테니까.”
행복한 순간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온 다연은 제 눈을 의심했다.
“뭐야?”
없다. 조금 전까지 회사 앞에 서 있던 버스가 없어졌다.
“뭐야. 왜 없어, 왜?”
다연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긴 신호음만 들릴 뿐, 유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늘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다더니 벌써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어떡해. 양평까지 무슨 수로 가냐고.”
다른 때 같았으면 빠지고 말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안 된다. 손꼽아 기다렸던 경합이 있는 날이었으니까.
다연은 택시라도 잡아타고 갈 생각으로 손을 뻗어 차를 잡았다.
“택시! 양평이요!”
하지만 도착지가 멀어서 그런지 택시는 잘 잡히지 않았다.
“아, 늦으면 안 되는데.”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빵빵하고 클랙슨이 울렸다. 몸을 돌리자 낯설지 않은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어……?”
“연 비서!”
클랙슨을 울린 사람은 다름 아닌 태훈이었다.
“왜 출발 안 하고 그러고 있어요?”
“아…… 짐 챙기고 와 보니까 버스가 없어요.”
“뭐야? 버스 놓친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다연이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태훈이 말했다.
“타요.”
“네?”
“버스 놓쳤다면서요? 타요.”
“아…….”
버스를 놓친 건 놓친 거고, 태훈과 단둘이 차 타고 가는 걸 알면 태준이 싫어할 거였다.
안 그래도 태훈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타도 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뭐해요? 빨리 타요. 늦었는데.”
하지만 지금 다른 방법은 없었다. 택시도 안 잡히는데, 이렇게 있다가는 경합을 놓치게 될 게 뻔했으니까.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다연이 차에 올라타자, 태훈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