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두 남자를 피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다연은 13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막 문이 닫히려는 찰나, 왼쪽에서는 발이, 오른쪽에서는 손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막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애써 피했던 남자 둘이 떡하니 다연의 앞에 서 있었다.
태준과 태훈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다연을 사이에 두고 섰다.
카페테리아에서 어색해 죽을 것 같아서 피해 왔더니, 장소만 바뀌었다. 장소만!
다연은 양쪽에 선 두 남자를 애써 외면하며 앞만 쳐다보았다. 다연이 남자들을 외면하자, 두 남자가 서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형은 낄 데 안 낄 데도 모르는 거야? 왜 여길 타, 눈치도 없이?”
“왜? 여긴 내가 끼면 안 되는 자리인가? 혹시 너 여기서 맞선 봐?”
맞선이라는 말에 태준은 물론 다연의 얼굴까지 구겨졌다. 어쨌든 두 사람은 맞선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었으니까.
“왜 죽을상이야? 내가 못 낄 자리는 네 맞선 자리밖에 없는 것 같아서 한 말인데?”
“형은 지금 상황파악이 안 돼?”
“지금이 무슨 상황인데?”
“그걸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줘야 해?”
“말을 해야 알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래?”
태준은 기다렸다는 듯 다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헉! 뭐 하는 거예요?”
다연이 놀란 눈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태훈을 향해 말했다.
“우리 사귀어.”
“……!”
직설적인 태준의 말에 태훈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회사에서 대놓고 이래도 되냐?”
“이제 곧 다 알게 될 사이라서.”
“……!”
“그래도 명색이 사촌인데, 동생 연애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두 남자가 눈에 불을 켜고 다투기 시작하자, 옆에 서 있던 다연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만 좀 해요!”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연 비서, 얘한테 하는 말이죠?”
양쪽에서 윙윙대자, 다연이 큰소리로 외쳤다.
“두 분 다 그만하라고요!”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다연은 두 남자를 남겨두고 휙 내려버렸다.
“어떻게 끝이 없어, 끝이. 애들도 아니고 만났다 하면 싸우고 으르렁대고.”
종알거리며 자리에 앉은 다연은 안으로 들어오는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사촌 형제라면서 왜 저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구는 건지. 얼굴은 똑 닮았으면서.
다연은 투덜거리다가 곧 일에 집중했고, 그녀를 이어 태준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여긴 왜 따라 들어와?”
“할 말 있어.”
“무슨 할 말?”
“회사 일.”
“해.”
“여기서? 그럼 난 좋고.”
태준과 투덕거리던 태훈은 다연의 책상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레시피 경합은 말이야…….”
태훈을 다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다연은 당황했으며, 태준은 태훈의 팔뚝을 붙잡고 자신의 집무실에 집어넣었다.
“닥치고 따라와.”
집무실에 들어온 태훈은 구겨진 옷을 털어내며 창 밖에 있는 다연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형한테 너무 버릇없이 구는 거 아니야?”
“원래 한 여자 사이에 두면 아래위도 없는 거야.”
“너 너무 막 나간다?”
“됐고. 할 말이 뭐야?”
“그 구두 어디서 샀냐? 넥타이는?”
“뭐 이렇게 질문에 성의가 없어?”
태준이 질문을 던졌지만, 태훈은 대답도 하지 않고 창밖만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그걸 뒤늦게 깨달은 태준은 리모컨으로 블라인드를 내려버렸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원래 수컷이라는 동물은 예쁜 데에 눈이 쏠리는 법이거든.”
“그 예쁜 여자가 동생 여자라는 건 잊었어? 조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알려줬을 텐데.”
잊었을 리가. 다만 잊고 싶을 뿐이지. 아니라고 제발 아니었으면 하고 부정하고 싶을 뿐인지.
“진짜 할 말이 뭔데?”
“작은아버지 뭐라셔?”
“회사 일이 그거야? 그거 물으려고 온 거냐고.”
“작은아버지 성격에 연 비서를 받아줄 리는 없을 테고.”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 뭐 그런 거야? 내가 그걸 말 해줄 것 같아?”
“안 하겠지.”
집 얘기가 나오자 태준과 태훈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형제의 아픔은 비슷했고, 마음에 박힌 상처의 결은 비등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고, 성적이 나쁘면 맞았고, 그래서 밤새도록 공부를 해야 했으며, 성인이 된 지금도 그들의 아버지는 아들이 제 로봇인 줄 알고 있다.
서로의 상처는 비슷한데, 왜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서로를 미워하고 이겨야 하기에 칼을 든 건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언제나 이래왔으니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건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때 말했잖아. 모르는 사람처럼 데면데면 굴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 안 했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
“우리 형제야. 피를 나눈 형제가 어떻게 데면데면 남처럼 지낼 수 있어?”
다시 날카로운 두 남자의 눈빛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싸울 수밖에.
룰은 항상 같았다. 한 명이 가진 걸 기를 쓰고 빼앗으면 승자는 웃었고 패자는 울었다. 그리고 패자는 다시는 그 물건을 탐내지 않았다.
“오랜만에 싸우겠네? 형이랑.”
“이번엔 죽을힘을 다할 건데?”
“언제는 뭐 안 그랬나?”
“자신만만하다?”
“다연이랑 내가 미풍에 흔들릴 사이가 아니라서.”
옆에서 봐도 그렇긴 했다. 아니, 다연은 처음부터 태준밖에 없었다. 태준이 등장한 이후 줄곧 동생만 바라봤으니까.
그래서 더 흔들고 싶었다. 그래서 더 갖고 싶었다.
동생이 10년 넘게 사랑한 여자를, 그런 동생만 바라보는 여자를, 갖고 싶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이제 일하자.”
“얼마든지.”
시간만 끌어봤자 말싸움만 길어질 거로 생각한 태훈은 비합리적인 싸움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경합은 야외에서 진행하는 게 어때?”
“야외?”
이번 주에는 시식회를 열고 최종 레시피를 선정해야 했다. 다연을 포함한 최종 후보 세 팀은 어서 그날이 오길 기다렸고, 날짜와 장소는 두 명의 대표가 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원래 이맘때쯤 워크숍 가곤 했거든.”
어쨌든 태준이 외국을 돌아다니는 동안 회사 운영은 태훈이 맡았다. 매년 시식회를 열었듯 매년 날 좋을 때면 직원들과 워크숍 겸 MT를 가곤 했다.
그런 소소한 일까지 몰랐던 태준은 한발 물러서 태훈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나쁘지 않겠네. 그럼 장소는…….”
“장소는 내가 섭외할게.”
“세 팀은 충분히 요리할 공간이 있어야 해.”
“당연하지.”
“날짜는 이번 주 목요일 어때? 괜히 직원들 주말 뺏지 말고.”
“욕먹을 일 있어? 워크숍을 주말에 가게? 1박 2일이지?”
“원래 회의와 워크숍은 짧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시식회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태훈이 또 다른 일 얘기를 꺼냈다.
“아, 참! 목요일에 김 사장이 너 보자시더라.”
“김 사장님이? 나 한국 들어온 거 아셨어?”
“응.”
꼬장꼬장한 거래처 대표인 김 사장은 태준이 한국에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만든 새로운 레시피가 있는데, 그걸 꼭 태준이 먹어봤으면 좋겠다나 뭐라나.
웬만한 곳이면 그냥 모른 척하고 안 가면 그만이었지만, 거긴 그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태준과 아주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곳이기도 했고, 가장 믿을 만한 재료를 공급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안 오면 거래 끊을 기세던데?”
“하아.”
“아침 일찍 갔다가 워크숍 장소로 바로 와.”
“알았어.”
“근데 너희 비서는 왜 차도 안 주냐?”
“앓는 소리 좀 했더니 그새 내가 쉬워 보여?”
태준이 눈에 불을 켜고 덤비자, 태준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식회는 그렇게 정리하고. 난 간다.”
“잠깐.”
태훈이 나가려고 하자,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큰아버지한테 맞았어?”
“……!”
“큰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셔. 서른 넘은 아들한테 손찌검하시긴.”
태훈은 손으로, 태준은 각종 반찬으로.
아버지께 맞은 건 두 형제가 똑같았지만, 그래도 태준의 얼굴에는 상처 따위 남지 않았다. 그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아버지 서 원장은 아들이 아프라고 때린 것이 아니었다. 기분 나쁘라고, 마음에 상처가 되라고, 몸이 아닌 마음에 상처를 주기 위해 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달랐다. 큰아버지는 태훈의 마음에도 몸에도 상처를 주기 위해 때리는 것이었다.
몸에 남은 상처를 보고 두고두고 분노하라고. 두고두고 빡치고 열 받아서 네 사촌 동생을 이기라고. 몸에 명령을 새기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데면데면하게 굴고 싶다면서 무슨 상관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받아.”
태준이 무언가를 휙 던졌고, 태훈은 본능적으로 그걸 받았다.
태훈의 손에 안착한 건 다름 아닌 연고였다. 새끼손가락만 한 연고를 봤을 뿐인데, 왜 마음이 이렇게 노곤노곤 해지는 건지.
“너, 내 걱정…….”
“없어 보여.”
“뭐?”
“회사 대표가 그게 뭐냐? 직원들이 다 형 얼굴 보고 수군거리더라.”
“그랬냐……?”
태훈은 입안이 터져 팅팅 부은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싸가지 없는 말투이긴 해도 제 얼굴을 챙겨주는 유일한 놈이었다.
“나이 들수록 재생 능력 떨어지는 거 알지? 꼬박꼬박 발라.”
“미친 놈.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말은 그렇게 해도 좋았다.
누군가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게…… 동생 놈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