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41화 (41/74)

41화

어둠이 내려앉은 검은 창밖으로 작은 불빛들이 태훈의 눈을 어지럽혔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과 높게 솟아오른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아름다웠지만, 태훈의 눈에는 암흑같이 느껴졌다.

태훈은 창가에 기대어 서서 얼음이 담겨 있는 컵에 위스키를 부었다. 술과 만나자 와그작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비밀처럼 숨겨둔 액자 속 사진에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태준과 어린 소녀가 함께 찍혀 있었다.

태준은 자신의 목도리를 소녀의 목에 걸어주었고, 하나의 목도리를 함께 두른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태훈은 단번에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훈이 내린 결론은.

“연다연.”

사진 속 인물은 다연이 확실했다. 웃을 때 살짝 눈웃음치는 것도 그랬고, 둥근 이마도 그렇고, 붉은 입술까지도 모두 다연과 똑같이 생겼다.

소녀가 다연이라는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태준과 다연은 어떻게 아는 사이였던 건지, 왜 둘은 작은아버지의 별장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건지, 또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다정해 보이는 건지…….

태준이 고등학생 때면 적어도 10년 전에 찍은 사진이라는 건데, 그때 태준은 지금과 달리 집과 학원 그리고 독서실밖에 모르던 공붓벌레였다.

잠깐이라도 짬이 생기면 작은어머니는 대기하던 과외선생을 붙였고, 태준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공부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놀러 가는 것도,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렸던 애가 어떻게 다연을 만난 걸까?

그리고 별장에서 만난 사이라면 태준의 집안과 다연의 집안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건데, 어떤 사이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태준이가 연 비서를 좋아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구나.”

적어도 동생의 마음은 10년이 넘은 것 같았다.

그건 사진 속 태준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즘 다연을 보는 서른두 살의 태준의 눈빛과 고등학생 서태준의 눈빛은 똑 닮아 있었으니까.

태훈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뭐든지 저보다 앞서가던 동생 놈이 사랑까지 앞섰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화가 난 태훈은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잠깐. 그럼 그때 한 말도 사실인가……?”

태준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해놓고도 바로 입학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였는지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1년 뒤 한국에 돌아와서 학교를 자퇴했다.

그때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한동안 끙끙 앓았고, 태준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요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태훈이 물은 적이 있었다. 왜 학교를 그만뒀는지, 남들은 가고 싶어서 아등바등 죽을 똥을 쌀 때까지 공부해서라도 가고 싶은 곳을, 넌 왜 그렇게 쿨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만두는 거냐고.

그때 태준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서.”

“그게 이유야? 대학 안 가는 이유가, 한국대 의대를 포기한 이유가 고작 여자 때문이냐고!”

“고작 아니야.”

“고작 아니면 뭔데?”

“고작 아니고 내 전부.”

그땐 태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여자 때문에 한국대 의대를 포기하는 미친 또라이가 어디 있으려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고 말이다.

여자 때문에 굳이 대학을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남자가 한국대 의대 나왔다고 싫어할 여자는 더더욱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남들에게 쉽게 말하고 다녔다. 회식 때 다연에게 그렇게 말한 것도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어쨌든 태준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니까.

“태준이가 고3 때 첫사랑에 빠졌어요. 열병 같은 사랑이었죠. 그 여자 때문에 의대를 포기했는데, 아무도 태준이를 막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깊게 사랑한 만큼 상처도 컸어요. 그때 받은 상처를 치유 받고 싶은지, 저 녀석 지금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네요.”

근데 그게 연다연이었다니. 고작 아니고 전부가, 태준이의 전부가, 서태준의 첫사랑이 연다연이었다니!

“하하하하. 미친놈. 내가 널 얕봤구나, 얕봤어.”

그제야 태준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태준이 한국에 돌아와 자신을 직원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했던 그날.

“연다연 씨 좋은 사람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직원으로만?”

“그게 무슨 말이야?”

“단순히 직원 연다연이 좋은 거야, 아니면…….”

“아니면?”

“너 설마 연다연 씨를 여자로 좋냐고 묻는 건 아니지?”

태준은 제게 유난히 뾰족하게 굴었고, 유달리 경계하며 덤볐다.

왜 갑자기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나 했더니, 갑자기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외국만 전전하던 놈이 한국에 눌러산다고 한 것도, 몇 년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놈이 직원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것도, 모두 연다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녀석은 다연뿐이었다. 다연 때문에 회사 생활을 시작한 거고, 다연 때문에 한국에 정착한 거고, 다연 때문에 다시 활기를 되찾은 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태준의 모두는 연다연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사랑이 깊을수록 상실감은 더 클 테고, 상실감이 클수록 넌 더 크게 무너지겠지.”

***

며칠 후.

점심 식사를 마친 다연은 유미와 함께 카페테리아에서 수다를 떨었다.

빨대로 커피를 쪽쪽 빨아 먹던 유미는 다연의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히 물었다.

“근데 너, 작은 대표님이랑 뭐 있어?”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다연은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 있긴 뭐가 있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 요즘 좀 수상해.”

“뭐, 뭐가 수상한데?”

“꼭 나 우리 오빠 처음 만났을 때 같아.”

“언니가 그때 어땠는데?”

“별것도 아닌 거에 히죽거리고, 옷은 샬랄라에, 얼굴에는 봄바람이 불고, 하늘에서 떨어진 별 두 개가 눈에 박혔는지 두 눈은 반짝반짝거리고.”

유미의 말에 다연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 예뻐졌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하는 거야?”

“아니. 너 예뻐진 게 아니라, 수상하다고.”

“그러니까 뭐가?”

“맥주 한 잔 하자고 하면 쪼르륵 달려오던 애가 까기 바쁘고, 주말에는 영화 보자고 매달리던 애가 주말에 전화 한 번을 안 하네? 수상하지 않아?”

사랑과 재채기는 못 숨긴다더니. 저렇게 사소한 거에 눈치 챌 줄이야.

하지만 다연은 최대한 아닌 척, 모르쇠로 일관했다.

“근데 ‘너 연애하냐?’도 아니고, 왜 작은 대표님을 들먹거려? 작은 대표님이 나랑 엮이는 거 알면 기겁하시겠네.”

다연이 잡아떼며 묻자, 유미가 피식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래도?”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카페테리아의 구석 자리였고, 거기엔 태준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다연의 얼굴이 뚫릴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 저 남자가! 회사에 소문낼 일 있나, 왜 저렇게 쳐다봐?

다연은 일단 웃음으로 무마하며 공적인 관계라는 걸 어필했다.

“아하하. 작은 대표님이 언제부터 저기에 계셨지? 나 찾고 계셨나? 아참참! 오전에 서류 정리해서 달라고 하셨는데, 그거 때문에 저렇게 날 째려보고 계신가보다.”

“째려보긴.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 보고 계시는데.”

“사랑스럽다니. 무슨 말을…….”

당황한 다연은 태준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 발짓 눈짓 턱짓을 해댔지만, 태준은 보란 듯이 턱을 괴고는 그녀를 더 달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저 남자가……!

이대로 더 있다가는 다른 직원들까지 볼 것 같아 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뭐 하는 거냐고, 어서 가라고,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

“근데 다연아.”

유미가 그녀를 불렀다.

“난 네가 하루 종일 작은 대표님이랑 붙어 있어서 둘이 눈이 맞았나보다, 정이 들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거든?”

붙어 있기 전부터 눈이 맞기는 했는데…….

“근데 큰 대표님은 왜 저래?”

“무슨 소리야? 큰 대표님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유미를 보자, 그녀의 손가락이 위를 향했다.

“저기. 아까부터 저기서 너만 보고 있던데?”

유미의 말대로였다.

태훈은 건너편 난간에서 다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연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눈을 피하거나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발이 땅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랫동안 그곳에 서서 다연을 보고 또 보았다.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어? 뭐, 뭐가?”

“뭔가 야시꼴롱하면서도 멜랑꼴리하네.”

“그게 무슨 말이야?”

“널 보는 눈빛에 ‘난 남자다’라고 쓰여 있으면서도, 왜 저렇게 슬퍼? 곧 울 사람처럼.”

“뭐래.”

말은 툴툴거렸지만, 다연이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전에 호텔을 다녀온 후로 자신을 보는 태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가끔은 태준인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닮은 얼굴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야?”

“뭐가?”

“네 마음 말이야. 작은 대표님이야, 큰 대표님이야?”

“무슨 헛소리야.”

정말 헛소리 같았다.

이제 태준과의 관계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앞으로 꽃길만 걸으면 되는데, 태훈이 저렇게 나오니 당혹스러웠다.

제3의 남자가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도 난감한데, 큰 대표님이라니. 사촌 형이라니!

“부럽다, 연다연. 내가 이런 샷 엄청나게 상상하고 꿈꾸고 바랐거든?”

“이런 샷이라니?”

“삼각관계. 남자 둘이 나 두고 싸우는 아름다운 이 구도! 게다가 얼굴이면 얼굴, 돈이면 돈, 사회적 지위면 지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부럽다, 부러워.”

부럽긴. 자칫 잘못하다가는 근친이구만!

“근데 조심해야겠다?”

“뭘?”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다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준과 다연, 다연과 태훈, 태훈과 태준을 지켜보는 눈이 사방에 뻗어 있었고, 그들은 세 사람을 보면서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소문 안 나게 조심해. 특히 강주은. 아주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네.”

무심한 듯 말하는 유미의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저 남자들부터 처리해야겠다.

“나 들어갈게.”

“커피 다 안 마시고?”

“내가 여기 있으면 저 두 명의 대표님들이 계속 저러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래. 들어가라.”

다연이 일어서자, 그녀의 말처럼 태준과 태훈이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다연은 마치 자신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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