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예원과 마주 앉은 다연은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뉴스나 잡지에서만 보던 재벌 3세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있으니 후덜덜하기도 했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니 가슴이 벌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온한 눈동자로 예원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보니 더 예뻤다. 세련됐고 귀티 나는 얼굴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걸치고 온 옷과 가방과 신발은 다연의 오피스텔 보증금을 훨씬 웃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침착한 척하는 자신과 달리 예원은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 알죠?”
“그럼요. 우리 회사에 ‘그래봤자 구멍가게 대표 주제에’라고 했던 분이시잖아요.”
한 방 먹기 전에 선방을 치자 예원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여자인가 했더니, 서태준 씨 취향이 꽤 독특하네요.”
“근데 무슨 일로 부르셨죠? 바쁜데.”
“바빠 봐야 일개 직장인 아닌가?”
“일개 직장인이 아니어서 직장인이 얼마나 바쁜지 모르나 보네요. 그쪽 같은 사람들이 싸질러 놓은 일들을 보통 우리 일개 직장인들이 치워야 해서 굉장히 바쁘거든요. 뭘 그렇게 많이 싸질러 놓으시는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다연을 보자, 예원은 또 다른 쪽으로 승부욕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저 태준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이젠 연다연이라는 여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 마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 말을 이렇게 맞받아치다니. 사람 짜증나게.
“서태준 씨 말로는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하던데, 내 예감에는 그 여자가 연다연 씨인 것 같아서요.”
설마 이것도 맞받아치려나 싶어 가만히 다연을 보자,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 맞아요. 만나고 있어요.”
“허! 어이가 없어서.”
“저도 어이가 없네요.”
“뭐?”
“보통 이런 건 남자 쪽 집안 어른이나 약혼녀가 찾아오는 거 아닌가요? 고작 맞선 한번 보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좀 오버인 것 같은데.”
다연의 말에 예원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저 짜증나는 게 하는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근데 연다연 씨는 뭘 믿고 그렇게 설치나요?”
“……?”
“어렸을 때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가 겨우겨우 돈 벌어서 학교 다녔다며?”
“……!”
갑작스럽게 집안을 들먹거리자, 다연이 당황한 눈으로 예원을 쳐다보았다.
“식당에서 그릇 닦고, 남의 집 가정부로 더부살이하고, 이제 그나마 그쪽이 회사 다니면서 버는 돈으로 근근이 먹고살 정도 됐다면서?”
최대한 정성스럽게 덧바른 화장이 완전히 벗겨지고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먹고살 만하니 이번엔 동생이 문제네? 사업을 하니 뭐니 하면서 있는 돈 다 날리고, 그것 때문에 회사에서 대출까지 받았다면서?”
동생의 대출 얘기가 나오자, 화장뿐만 아니라 옷까지 벗겨진 상태로 예원 앞에 선 기분이었다. 창피하고 쪽팔려서 얼굴이 홧홧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다연은 예원을 노려보며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다 들었다.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줄줄이 달린 가족들에, 사고만 치는 동생. 돈도 없어, 직업도 그저 그래, 그렇다고 특출나게 예쁜 것도 아니야. 연다연 씨 무기는 몸뚱이 하나인가?”
예원이 다연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진한 아이라인 뒤로 숨겨진 그녀의 눈빛은 멸시와 경멸 그리고 비웃음을 무기로 삼아, 다연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런 본인이 서태준 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설마 내 뒷조사 한 건가요?”
“왜요? 나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이깟 뒷조사쯤이야.”
뻔뻔한 예원의 태도에 다연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저 마음만 굳게 먹고 나오면 되는 자리인 줄 알았다. 물을 부으면 이쪽에선 커피를 붓고, 배추김치 싸대기를 때리면 이쪽에서는 깍두기로 맞받아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치사하게 가족을 건드리다니. 남의 슬픈 가정사를 들먹이다니.
……이럴 줄 알았다. 얘들은 항상 나보다 가족들을 먼저 공격하니까. 치사하게.
다연은 크게 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것 같아서 저도 준비 좀 해봤어요.”
“준비? 뭘? 설마 내 뒷조사를 했다는 거야?”
“그쪽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하라는 법 없잖아요?”
“허!”
예원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꼬고 다연이 하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돈도 없는 게 전문가 섭외해서 뒷조사 하진 못했을 거고, 뭘 들먹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다연은 말하기에 앞서 준비해온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잘 나가던 아이돌, 배우, 모델 그리고 정재계에 난다 긴다 하는 재벌 3세들의 사진이 테이블 위를 가득 메웠다.
하나씩 펼쳐지는 사진을 본 예원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게 뭐야?”
“모르세요? 기억력이 꽤 나쁜가 보네요.”
“뭐?”
“그쪽이 만났던 남자, 썸 탔던 남자, 스캔들 났던 남자들이잖아요.”
“그, 그걸 어떻게……!”
예원은 사진을 볼 때도 놀랐지만 다연의 말에는 더 놀란 듯했다.
“에이. 놀라긴 아직 이른데. 기다려봐요. 여기 그리고 이 남자.”
“허업!”
봉투에서 사진을 몇 장 더 꺼내자 예원이 기겁을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회삿돈으로 이상한 약에도 손댔다면서요? 그 약을 이 남자들과 함께 광란의 밤을…….”
“그만!”
예원은 다연의 입을 막고는 몸을 낮추고 주위를 살폈다.
“너! 이거 어떻게 알았어? 설마 나한테 사람 붙였어?”
“사람 붙이는 건 불법 아닌가? 난 합법적으로…….”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어떻게 알았냐고!”
예원이 부들부들 떨며 묻자, 다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사에 다 나와 있던데?”
“뭐? 기사 다 내렸는데, 어떻게 알았지?”
“기사는 돈 들여서 내렸을지 몰라도 기사를 캡처해둔 SNS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허!”
이쪽은 돈까지 들여서 한 방 먹이려고 했는데, 오히려 당했다. 또 당했어.
예상치 못한 강펀치에 예원이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자, 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설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장예원 씨 아닌가요?”
“뭐?”
“그렇잖아요. 아버지 빽 믿고, YM 푸드 빽 믿고, 설치고 다니는 거 장예원 씨인 것 같아서.”
기가 찼다. 그깟 스캔들 몇 개 들고 와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아무리 그래봤자 그딴 사진들 아버지가 막아주면 그만이었다.
예원은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물었다.
“넌 그렇게 믿고 설칠 빽이라도 있어?”
“!”
“내 뒤엔 YM 푸드가 있고, YM 푸드를 이끌어가는 든든한 아버지가 계셔. 근데 넌? 너한테는 뭐가 있어?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갈 아버지도 없지?”
예원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다연의 가슴을 마구 후벼팠지만, 다연은 지지 않고 더 세게 밀어붙였다.
“유치하긴.”
“뭐?”
“장예원 씨는 아직 본인 힘으로 돈 못 벌죠? 1년 전에 패밀리 레스토랑 맡았다가 실적 부진으로 시원하게 레스토랑 말아먹고,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백수 만들고, YM 주가 뚝 떨어뜨리고. 그 후로 내내 직함만 달고 놀고 계신 거로 아는데.”
신랄한 비판에 예원은 마스카라를 잔뜩 바른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도 제게 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없다고 위로해주셨고, 직원들은 그래도 잘했다고 응원해주었다.
그런데 저런 쓴소리를 고작 저딴 애한테 들어야 한다니!
화가 났고 쪽팔렸고 분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아버지 빼고, YM 푸드 빼면, 장예원 씨한테 남는 게 뭐죠?”
“그걸 왜 빼? 그게 내 가장 큰 매력인데, 그걸 왜 빼냐고!”
예원은 결국 소리를 질렀고, 다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장예원 씨한테는 그게 제일 큰 매력이죠.”
“……?”
“근데 난 아니거든요. 난 재벌 딸도 아니고 결혼식 때 손잡아줄 아버지도 안 계시지만, 내가 제일 매력적이거든요. 그리고 그걸 서태준 씨가 너무도 잘 알고 있고요.”
“허!”
예원은 자신만만한 다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자기한테 대드는 가난뱅이는 이 여자가 처음이었으니까.
***
집에서 나온 태준은 곧장 다연의 집으로 향했다.
미친 듯이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이 꼴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 생신이라고, 아버지 드시라고 정성껏 만든 케이크를 제 몸에 범벅하고 있는 꼴을 차마 그녀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를 반대하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게 뻔했으니까.
태준은 힘이 쭉 빠진 손으로 다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와는 달리 다연의 목소리는 꽤 밝았다. 마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전사처럼 말이다.
“뭐 좋은 일 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좀 통쾌한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
-음.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태준 몰래 예원이 자신을 불러냈다는 걸 말하면, 그가 불쾌해 할 것 같아 다연은 말을 돌려버렸다.
-아버지 생신은 잘 다녀왔어요? 축하해드렸고요?
“응.”
-케이크는 맛있게 드셨어요?
“응. 정말 맛있더라. 딸기도 상큼하고.”
-태준 씨 말고, 아버님 입맛에 맞으셨어요?
“왜 내 입맛은 신경 안 써줘?”
-치. 오늘 주인공은 아버님이시잖아요. 맛있게 드셨어요?
“응. 정말 맛있다고, 고맙다고, 다음에 또 해달라고 전해 달라셔.”
-내 얘길 했어요?
“여자친구 생겼다고 말씀드렸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달뜬 숨소리에 태준이 할 수 있는 건 거짓말뿐이었다.
-아, 그랬구나. 어디예요? 집?
“응. 오늘은 본가에서 자려고.”
태준은 오피스텔을 향해 걸어가는 다연을 바라보며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들뜬 그녀의 기분을 망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저렇게 기뻐하는데, 네가 만든 케이크 맛도 못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음 생신 때는 직접 뵙고 축하 인사드려야겠어요.
“그래. 다음엔 꼭 같이 가자.”
-피곤할 텐데, 어서 자요.
“응. 너도 잘 자고.”
전화를 끊은 태준은 다연의 오피스텔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그의 코를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옷에 묻어있는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태준은 생크림을 손가락에 묻혀 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네. 내 애인, 밥만 맛있게 하는 줄 알았더니 케이크도 맛있게 만드네.”
케이크는 너무도 맛있는데, 케이크를 던지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입안은 미친 듯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