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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39화 (39/74)

39화

형제들의 싸움이 어느새 부자들의 싸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서태훈! 지금 뭐라고 했어?”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자식이…….”

서 교수는 꽉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차마 제수씨 앞이라 집에서처럼 손을 올릴 수는 없었다. 미련하게 자신의 바닥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따라와.”

서 교수는 어금니를 꽉 물고 태훈을 향해 말했다. 서늘한 공기가 부자 사이를 에워쌌고, 그 모습에 김 여사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큰집 식구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서 원장은 태준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여자가 있다고?”

“네.”

“어느 집안 딸이냐?”

어떤 사람이냐가 아닌, 어느 집안의 딸이냐…….

아버지의 첫 질문에 태준은 씁쓸해졌다.

결혼은 남녀 간 사랑의 결실이 아닌 집안 대 집안의 결합이고,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연과 더 큰 미래를 꿈꾸는 태준에게는 마음 아픈 질문이었다. 앞으로가 더 걱정되기도 했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예요.”

“……!”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어요.”

“뭐? 평범한 집안? 기가 막히는구나. 아비도 없는 집안이 평범한 집안이냐?”

“아버지! 말씀을 왜 그렇게……!”

“됐고. 뭐 하는 여자야?”

“제 회사 직원이에요.”

순간 흥분한 서 원장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잡채를 한 움큼 쥐어 태준에게 던졌다.

“여보!”

“너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YM 푸드 장 회장이 너 사위 삼고 싶어 안달이고, 그 집 딸은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난리야. 그런데 아비도 없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그딴 여자랑 만난다고?”

아들이 의대를 포기하고 요리를 한다고 했을 때, 서 원장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애지중지 금지옥엽으로 키워놨더니 겨우 요리를 한다니.

서 원장의 희망이자 미래였던 아들은 어느새 그의 절망이 되고 좌절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태준의 사업 수단은 꽤 좋았다.

처음 몇 테이블도 되지 않은 작은 가게를 열었을 땐, 남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녔다. 그런데 회사가 크고 전국적으로 체인점을 내기 시작하더니, YM 푸드 같은 대기업에서 사위 삼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야 고개 좀 들고 사나 싶었는데 복을 걷어차?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싶어?”

“바닥이 아니라 결혼하고 싶어요.”

“이 미친 놈!”

서 원장은 식탁 위에 있던 음식들을 마구 집어 아들에게 던졌다.

YM 푸드에서 만들었다는 떡갈비와 큰어머니가 완도에서 사 왔다는 미역이 태준의 몸 여기저기에 맞아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여보! 그만 해요!”

박 여사가 제 남편을 끌어안고 말리자, 그제야 서 원장이 음식 던지는 걸 멈췄다.

바닥에는 어머니가 하루 종일 만든 요리와 다연이 만든 케이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맞은 곳은 아프지 않았지만, 마음이 미친 듯이 아팠다.

“아비도 없는 볼 것도 없는 집에 장가를 가겠다고? 또 날 실망하게 해? 가업을 잇지는 못할망정 사업을 시작했으면 더 높은 곳을 향해 가야지, 왜 바닥을 보며 걷느냐고!”

서 원장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태준은 싸워야만 했다.

언젠가 다연과 결혼하는 날이 왔을 때, 그녀에게는 자신과 같은 대접을 받게 할 수 없었다.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다연에게 물을 붓고, 돈 봉투를 내미는 일 따위는 아버지께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태준은 다연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먼저 다치고 상처받고 미움 받기를 택했다. 그럼 언젠가 아버지도 포기하는 날이 오겠지.

“아버지는 제 여자가 어느 집안 딸인지만 중요하시죠? 어떤 여자인지, 좋은 사람인지, 만난 지는 얼마나 됐는지, 왜 사랑하게 됐는지, 그런 건 하나도 안중에 없으시죠?”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아버지께서 예뻐해 주시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알려드리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우리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지, 알려드리고 싶었다.

“흥! 사랑 따위가 밥 먹여주냐? YM 푸드의 사위가 되면 예원 양이 널 대한민국 꼭대기에 올려줄 거야! 그런데 사랑? 지금 사랑놀이 따위 할 정신이 있어?”

하지만 서 원장에게 행복은 곧 돈이고 권력이고 명예였다.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서는 보잘것없는 다연보다 가진 것 많은 예원이 아들에게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고.

“가업을 못 이을 거면 괜찮은 집안과 결혼해서 어떻게든 더 높이 올라갈 생각을 해야지! 언제까지 이따위로 살 거야!”

서 원장이 식탁에 있는 케이크까지 태준을 향해 던졌다.

달콤한 생크림이 태준의 얼굴에 범벅이 되었고, 새콤한 딸기가 그의 셔츠를 빨갛게 물들였다.

이러려고 다연이 만든 케이크가 아닌데. 이걸 보면 다연이가 가슴 아파할 텐데.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태준이 소리쳤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게요!”

“…….”

“제가 사랑하는 여자랑!”

“미친 놈! 모자란 놈!”

“제가 세상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때, 저한테 손 내밀지 마세요. 안 잡아 드릴 테니까.”

“뭐, 뭐? 이 자식이!”

서 원장이 남아 있는 케이크를 던지기 위해 손을 뻗자, 태준이 빠르게 케이크를 품에 안아버렸다.

“아버지는 이거 드실 자격 없으세요. 이건 제가 먹을 거예요.”

태준은 남은 케이크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호통과 어머니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가 더 미웠다.

***

한편.

2층으로 올라간 서 교수는 태훈을 향해 따귀부터 올렸다.

짝 소리와 함께 태훈의 뺨이 붉게 물들었지만, 서 교수는 다시 손을 올려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뭐? 여자가 있어? 결혼을 하고 싶어? 미친 거야? 돌았어?”

질문을 하나 던질 때마다 서 교수의 손은 아들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붉게 물든 뺨에는 어느새 시퍼런 멍이 올라왔다.

“제 나이가 서른셋이에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데 그게 왜 미친 소리죠?”

“여자 만나는 것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해? 만나!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아! 하지만 결혼은 안 돼! 결혼은 네 뜻대로 안 된다고!”

“아버지! 제발!”

“이 새끼가! 얻다 대고 소리를 쳐!”

다시금 서 교수가 손을 올렸지만, 이번엔 태훈이 그의 손을 막아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던 서 교수가 놀란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단 한 번의 반항도 없던 놈이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았고, 폭언을 쏟아 부으면 붓는 대로 묵묵히 들었던 놈이었다.

그런데 반항이라니! 열이 뻗친 서 교수가 더 큰소리를 질렀다.

“버릇없이! 놔! 이거 안 놔?”

서 교수가 태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을 흔들어댔지만, 아들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태훈은 죽일 듯한 눈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아버지의 상황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생을 이기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서 원장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끝내 동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서 교수는 태훈을 닦달했다. 자신이 못 이룬 것을 네가 해내라고. 난 동생을 이기지 못했지만 넌 태준을 이기라고 폭언을 던졌고, 지고 돌아오는 날에는 폭행을 일삼았다.

그런데 감히 제 뜻을 거스르는 짓을 해? 버릇없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태준이 그 자식만 이기면 되잖아요!”

“너 따위가 태준이를 이길 수 있어?”

애초에 믿음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아들에 대한 불신과 의심, 그런데도 이기고 오라는 명령만 있을 뿐.

처음엔 이기려고 기를 쓰고 애썼다. 지면 울고불고 떼를 쓰고, 이기려고 공부하고, 이기려고 미친 듯이 뛰었다.

패배가 이어지니 어느 순간 포기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무기력해졌다.

‘난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을 해도 서태준 그 자식을 이길 수가 없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태훈은 태준의 밑으로 들어가 동생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포기하니 편했다. 술과 여자에 빠져 아버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회사 일도 손에 익었고, 이 정도로만 살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연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놈이 지금 눈에 콩깍지가 씌어 저러지, 정신 차리고 YM 푸드 사위가 되면, 넌? 바로 낙동강 오리 알 되는 거라고! 알아?”

“그래서 이겨보겠다잖아요!”

태훈이 눈에 불을 켜고 덤비자, 서 교수가 주춤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요! 비열한 짓을 하고 비겁한 놈이 되어도 꼭 이겨서 돌아올 테니까, 이제 저 좀 그만 닦달하세요! 아버지만 보면 숨을 쉴 수가 없어요.”

“!”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요!”

33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 가장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살려달라고. 아버지 때문에 죽을 것 같으니, 제발 좀 날 내버려 두라고. 아버지도 제발 포기하시라고.

그 말을 20년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이렇게 개운한 줄 알았으면 진즉에 할 것을.

“아버지 원하는 대로 이번엔 반드시 태준이 이길 테니까. 다시는! 작은아버지한테 못 이긴 설움, 저한테 풀어달라고 하지 마세요!”

“!”

“아버지 설움은 아버지가 직접 푸세요.”

필터를 거르지 않은 아들의 말에 서 교수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자신만만하게 군 적 없었던 태훈이었다. 반항 한 번 못하던 놈이 180도 변한 눈빛으로 이렇게 세게 나오니 약간의 믿음이 생겼던 것이었다.

“이번엔 아버지 뜻이 아니니까요.”

“뭐?”

“저도 태준이를 이겨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

“진심으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최선을 다해.”

서 교수는 아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승부욕보다 더 좋은 전략은 없으니까.

“그래. 이번에는 꼭 이겨봐라. 최선을 다해.”

서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고, 태훈은 아버지가 나간 방문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가 태준을 이긴다고 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걸 갖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태준을 무너뜨릴 수는 있겠지.

태훈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태준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도, 나도 참 거지같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에서 나가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진이 왜 저래……?”

태훈은 책상에 놓여있는 액자를 손에 들었다. 반듯한 액자 속에 삐딱하게 놓인 사진이 뭔가 어색해 보였다.

태훈이 액자를 열어보자, 액자에는 2장의 사진이 겹쳐져 있었다.

앞에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태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방금 본 사진이라 별다른 감흥 없이 뒷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뒷장의 사진을 본 순간 태훈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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