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 그 여자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고.”
태준은 죽일 듯한 눈으로 태훈을 쏘아보았다.
태준은 잘 알고 있었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 진심 없는 제 사촌 형의 연애사를.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니는 추잡스러운 여자관계를.
그렇기에 태준은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다연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고? 진심이라고는 제 마음에도 없는 주제에 다른 사람한테 진심이라고? 그게 사촌 동생의 여자인데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느 부분이 말이 안 되는데?”
“나 지금까지 형이 여자한테 진심으로 흔들리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
“그러니까. 그 어려운 걸 연다연 씨가 해낸다.”
“장난치지 마!”
언제나 자신의 것을 탐내고 뺏으려 했던 태훈이었다.
먹을 거며, 장난감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태준이 가진 건 다 뺏어야 직성이 풀렸던 태훈이었다.
태준은 그게 다 태훈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뭐 저렇게 욕심이 많아 남의 것을 탐하고 질투하나,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형의 질투가 유치하게 자신의 것을 빼앗는 행동으로 발현됐다고 치부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했다. 아니, 아주 아주 심했다.
옷도, 신발도, 게임기도, 하물며 회사도 아닌, 동생의 여자를 탐하다니! 그것도 태준이 제 목숨보다 아끼는 여자를!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형 여자 많잖아? 왜 하필 연다연인데? 왜 하필!”
“남녀 사이에 ‘왜’가 어딨어?”
“뭐?”
“예쁘지, 똑똑하지, 능력 있지. 어떨 때는 참해 또 어떨 때는 섹시해.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한테 나처럼 건강한 남자가 마음 흔들리는 게 뭐?”
피식. 태준의 비웃음 소리에 이번에는 태훈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왜 웃어? 어느 부분이 웃기는데?”
“솔직히 말해.”
“뭘?”
“형, 다연이한테 진심 아니잖아. 진짜로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뭔데?”
“착각하지 마. 형은 다연이 안 좋아해.”
태훈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왜 내가 아닌 사촌 동생에게 몰빵했느냐고 신을 향해 원망한 적도 있었다. 모두를 못 준다면 조금만이라도 나눠 줄 수 없느냐고 기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신은 불공평했다. 모든 걸 다 태준에게 주었다. 똑똑한 머리도, 사람들의 호감도, 완벽한 부모도, 공부든 사업이든 모두 성공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까지도.
그래서 하나는 꼭 뺏고 싶었다.
동생이 가장 원하는 것. 목숨을 버릴 만큼 아끼는 것.
그래서 다연을 지켜봤다. 어떻게 하면 태준에게서 그녀를 빼앗을까, 어떻게 하면 다연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까, 도둑놈 같은 마음으로 다연을 지켜보고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 되어버렸다.
사촌 동생과는 상관없이 오롯이 그녀를 갖고 싶어졌고,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웃으면 태훈도 좋았고, 그녀가 태준을 바라보면 태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다연이 정말 제 마음을 두드린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진심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감히 동생 놈이 제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다니!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태훈이 살벌한 눈빛을 던지며 묻자, 태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은 다연이가 아니라, 내 여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뭐? 이 새끼가!”
태훈이 거칠게 태준의 멱살을 낚아챘다.
“다시 말해봐, 이 새끼야.”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형이 다연이를 쳐다보기라도 했을 것 같아?”
“……!”
동생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4년 동안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다연은 태훈에게 연초면 새해 인사를 나눴고, 크리스마스 때면 즐겁게 지내라고 카드도 보내왔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감흥도 없었다. 그때 다연은 메뉴개발팀 팀원에 불과했었으니까.
태준이 있었기에 다연이 보였고, 태준이 관심을 보였기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또 태준의 여자가 되었기에 제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의도는 불순했고 과정은 지저분했지만, 다연을 향한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내 여자한테 관심 꺼.”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제 마음이 진심이라 한들 그래봤자 자신은 동생의 여자나 탐내는 개새끼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더불어 나한테도 무관심했으면 좋겠고. 남들처럼 데면데면한 사촌 형제로 명절 때나 얼굴 보는 사이로 지내면 안 될까, 우리? 부탁이다.”
태훈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1년에 한두 번 만나 데면데면 어색하게 안부나 묻는 사이였으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뭣들 하는 게냐?”
오싹한 목소리에 태훈은 동생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였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큰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핏줄들이 사이좋게 못 지낼망정 뭣들하고 있는 게야?”
“죄송합니다.”
사촌 동생을 뛰어넘기를. 아니, 동생을 넘어뜨려 밟아주기를 열성적으로 바라시는 아버지가 있기에, 태훈은 태준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
거대한 저택의 다이닝 룸에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생일 파티가 열렸다.
태훈과 태준처럼 형인 서 교수와 동생인 서 원장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형제는 각종 모임에서 자주 부딪히는 편이었다.
같은 직종에서 일하니 밖에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집에서 모이는 건 여자들의 역할이 컸다.
“태훈아, 많이 먹어. 작은 엄마가 너 좋아하는 잡채 많이 했어.”
“감사합니다.”
작은 집인 박 여사가 태훈을 챙기면.
“태준아, 이거 큰 엄마가 완도에서 사 온 미역이야. 맛이 어때?”
“좋은 물건 가져오셨네요. 맛있어요, 큰어머니.”
큰 집인 김 여사가 태준을 챙기곤 했다.
형제 사이는 안 좋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형님과 동서 사이는 꽤 좋은 편이었다. 남편 흉보다가 친해진 건 둘만의 비밀이지만.
“아, 맞다. 태준이 선봤다면서?”
김 여사의 질문에 태준과 박 여사의 손이 멈칫했다.
“어땠어? 어느 집 귀한 딸이랑 만났던 거야?”
아무런 의도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서 교수와 달리 김 여사는 시동생이나 조카에게 불만이나 질투 따위가 없었다.
“YM 푸드 장 회장 여식과 선을 봤다고 합니다, 형수님.”
태준과 박 여사를 대신해 나선 건 다름 아닌 서 원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식품 업계와 만나게 됐으니, 이제 태준의 앞길도 활짝 열릴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머! 잘됐네. YM 푸드면 우리나라 최고 아니에요?”
서 교수의 안색이 변한 것도 모른 채, 김 여사가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떡갈비도 YM 푸드 건데. 정말 맛있어. 감칠맛 나서 계속 먹고 싶거든.”
“아, 그렇습니까? 형수님? 허허허.”
“요리하는 태준이한테는 정말 좋은 상대네요. 그렇죠, 서방님?”
“그건 결혼을 해봐야 알겠지만, 같은 분야끼리 만나면 더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는 있겠죠. 태준이도 YM 푸드의 도움을 받고, YM 푸드도 태준이의 도움을 받고, 말이죠.”
서 원장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 제 형에게 들으라는 듯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행히도 저쪽에서 태준이를 아주 좋게 본 모양입니다. 장 회장님도 그렇고 당사자도 그렇고.”
“어머, 잘 됐으면 좋겠네요. 이러다가 우리 국수 먹는 거 아니에요?”
“허허허. 곧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형수님.”
서 원장과 김 여사가 한껏 업 되어 있는 반면, 서 교수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형인 태훈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생이 먼저 결혼 운운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상대가 YM 푸드라고 하니 더욱 배가 아팠다.
제 아들은 평생 조카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공부도 운동도 사업까지도. 그런데 결혼까지 진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보. 태준이가 YM 푸드 장 회장님 딸이랑 결혼하면 참 좋겠죠?”
더 좋은 혼처를 갖고 와도 모자란 마당에 김 여사가 눈치도 없이 묻자, 서 교수가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당신은 왜 그런 말을 해요. 좋은 일에 초치는 것도 아니고.”
“상견례를 한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몇 번 만난 것 가지고 떠드는 것도 예의 아니야. 사람 일이 앞으로 일 어떻게 될 줄 알고.”
서 교수의 말에 서 원장은 탁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님은 태준이가 잘 되는 게 싫으십니까?”
“누가 싫다고 그러더냐? 넌 말을 이상하게 해서 날 이상한 사람 만드는구나?”
남편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김 여사와 박 여사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각자 남편을 말리기 시작했다.
“좋은 날 왜 이렇게 언성을 높여요?”
“그래요. 당신도 그만 해요. 아주버님께서 당신 생일 축하해주려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하지만 부인들의 노력에도 한 번 틀어진 형제의 다툼은 그칠 줄 몰랐다.
“형님은 항상 그런 식이셨어요! 어떻게든 태준이 깔아 내리려고 하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태준이 수능 전국 1등 했을 때도 그러셨잖아요. 대학 가봐야 아는 거라고.”
“그래서 태준이가 대학 못 간 게 내 탓이라는 거냐?”
“말이 씨가 된다고 형님이 잘하신 건 없으시죠.”
“뭐?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결국, 서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시작했다.
“너! 어디 위아래도 없이 형한테 막말이야, 막말이!”
“애초에 형님이 내 아들한테 막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서 원장과 서 교수가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고, 김 여사와 박 여사가 남편들을 붙잡고 떼어놓기 바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태준과 태훈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서태준! 너 어서 아버지 안 말릴래?”
“서태훈! 너도 와서 아버지 좀 말려봐!”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태준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물었다.
“제가 정말 말리기 원하세요?”
“그럼!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어서 와서 안 말려?”
서 교수와 서 원장의 말싸움이 몸싸움이 될 것으로 보이자 박 여사의 언성이 커졌다.
그러자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저 만나는 여자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서로 죽일 듯 노려보던 서 원장과 서 교수가 싸움을 멈추고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YM 푸드 장 회장 딸이랑 만난다는 말이냐?”
“아뇨. YM 푸드와 상관없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요.”
태준의 말에 서 원장의 표정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고, 서 교수의 얼굴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너 이 자식!”
“거봐라.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했지?”
서 교수가 껄껄거리며 웃고 있을 때, 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태훈이었다.
“전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습니다.”
태훈의 고백에 서 교수는 물론 태준의 얼굴까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