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며칠 후.
저녁에 가족 모임이 잡혀 있는 태준은 조금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백화점에 들러 선물도 사야 했고 또 괜히 늦었다가 아버지께 잔소리 폭탄을 맞을 수도 있었기에 빨리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던 일을 정리하던 태준은 전면 유리 너머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일러둔 터였는데, 다연은 퇴근 준비는커녕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레시피 보완이 안 끝난 건가?”
다연은 최종 후보에 올라간 레시피 보완 때문에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계속 데이트도 못 했던 거고.
태준이 도와주겠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라고 했지만, 다연은 그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했다.
경합 날짜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된 건가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이왕 최종 후보까지 올랐으니 다연의 레시피가 선정되길 열렬히 응원하고 있기도 했고.
“살짝 보기라도 할까?”
막힌 부분이 있으면 힌트라도 줄 생각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간 태준은 은근히 다연에게 다가갔다.
뭘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싶어 모니터를 본 순간 태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요리에 관한 내용이 가득한 줄 알았던 모니터에는 음식이 아닌, 남자 연예인과 정재계에서 꽤 유명한 남자들 사진이 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이런 끔찍한 취미를 가진 줄 몰랐네?”
“아, 깜짝이야!”
뒤늦게 태준이 곁에 와있는 걸 발견한 다연이 깜짝 놀라며 모니터를 가렸다.
“모니터만 가린다고 다가 아닌 것 같은데?”
태준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 사진을 향해 턱짓하자, 다연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서랍에 쓸어 담았다.
그 모습을 본 태준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늘어졌다.
“일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남자들 사진 보고 있었어?”
“아, 그게…….”
“뭐야? 그런 남자들 좋아했어?”
태준은 다연이 미처 숨기지 못한 사진 한 장을 휙 낚아채며 비비 꼬는 말투로 물었다.
“눈은 네모나고, 코는 동그랗고, 얼굴은 세모나고. 이런 남자가 네 취향이었어?”
“아뇨. 내 취향은 한결같이 한 남자뿐인데?”
“말이라도 못 하면.”
다연의 귀여운 대답에 태준은 금세 얼굴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레시피 보완 때문에 끙끙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나 연다연이에요. 그건 진즉에 끝냈죠.”
“자신 있나 보지?”
“자신 있다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이제 내 손을 떠난 것 같아서요.”
처음 레시피를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다연은 열과 성을 다했다. 이제 마지막 시험대에 올라갈 일만 남아 있었고, 그건 다연의 영역 밖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태준은 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 사진들은 진짜 뭐야? 뭐 하려고 이 많은 남자 사진을 뽑아둔 거야?”
태준이 세모 눈을 하고 묻자, 다연이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꽤 용맹하게 대답했다.
“내 남자를 사수하고, 조각조각 부서질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연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려버렸다.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고 했죠?”
“어. 잔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아.”
“잔소리? 무슨 잔소리요?”
“결혼하라고.”
결혼이라는 말에 다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연은 아직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결혼을 독촉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직 결혼을 고민할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에 맞선을 본 것도 그렇고.
서른두 살이면…… 결혼 적령기인가?
“집에서 결혼, 서두르시나 봐요?”
다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으레 하는 말이야, 으레.”
“정말요?”
“응. 명절 때 학생들한테 반에서 몇 등 하니, 고3한테 대학교 어디 갈 거니, 취준생한테 취직은 어디에 할 거니, 뭐 그런 말처럼 으레 하는 말이셔.”
“진짜죠?”
“우리 어머니는 아들이 결혼도 못 하고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을까 봐 걱정이신가 봐.”
농담으로 던진 말에 다연이 기를 쓰고 덤볐다.
“왜요? 태준 씨가 얼마나 근사한 남자인지, 어머님은 모르세요?”
“알긴 아시는 것 같은데, 의심이 사그라지지를 않네?”
“이상하다. 그런 걸 의심할 수 없는 남자인데. 잘생겼지, 다정하지, 돈 잘 벌지, 강아지처럼 귀엽다가도 늑대처럼 야성미 넘치지. 태준 씨 매력은 밤새도록 말할 수 있는데, 어머님이 그걸 모르신다고요?”
다연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제 남자의 매력에 대해 나열하자, 태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야?”
“그럼요! 이건 새 발의 피죠.”
“그럼 네가 나 책임지면 되겠네.”
“네?”
훅 들어온 태준의 말에 다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요즘 통 안 그러더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전투적인 건지. 심장 떨리게.
“뭐야. 설마 나 책임 안 지려고 했던 거야?”
“그, 그게…….”
“이거 봐. 표정 보니까 그랬네. 처음부터 내 몸만 노리고 접근했던 거지?”
잉?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아무리 옷으로 감춰도 뚫고 나오는 섹시함에, 내 몸만 탐한 거냐고.”
뭐래?
“어쩐지 처음 보자마자 날 유혹해서 호텔로 데려간다 했어.”
이 남자가?
“책임진다면서 내 몸을 막 탐하고 이제 와서 책임을 못 지시겠다?”
“그런 말을 지금 왜 해요?”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다연이 태준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에 취해 처음 만난 남자를 유혹해 호텔에 데려간 것도 모자라, 책임진다며 안아달라고 했다니.
“나는 취해서 그랬다고 치고. 태준 씨는 뭘 믿고 날 따라왔어요?”
양쪽 볼은 물론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다연이 묻자, 태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 본 순간 너한테 반했으니까?”
“내가 첫눈에 반할 정도로 미인은 아닌데…….”
다연이 민망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의 열을 식히자, 태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원래 맛있는 거 주는 사람한테 잘 반하거든. 묵은지 닭볶음탕 맛있더라.”
“이씨. 정말 이럴 거예요?”
다연이 두 손을 들어 태준을 때리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약속대로 나 책임져.”
“……싫다면요?”
“매달릴 거야.”
“…….”
“나 책임지라고 질척거릴 거야.”
“…….”
“70년대 영화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네 앞에서 슬프게 울 거고.”
“…….”
“그러니까 그런 꼴 보기 싫으면, 나 책임져.”
또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키스를 할 때도, 서로의 단추를 풀 때도, 그의 입술이 내 소중한 곳에 닿을 때도, 그가 내 안으로 들어올 때도,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다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아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정식 프러포즈는 아니죠?”
“원하는 거 있어?”
“그건 태준 씨가 고민해야죠.”
“흐음. 어렵네. 힌트 하나만 줘.”
“적어도 이렇게 맨입으로는 안 돼요. 꽃이라도 한 송이 안겨줘야지.”
“흠. 더 어려워졌어. 창의력 없이 꽃 한 송이 주면서 프러포즈할 수 없게 됐잖아?”
“가요, 어서. 늦겠어요.”
다연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태준이 그녀를 안은 팔에 더 꽉 힘을 주며 투정 부렸다.
“가기 싫다. 계속 이렇게 안고만 싶어.”
“아버지 생신인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러면 되겠어요?”
“하아. 그러게. 불효자가 될 순 없지. 갈게.”
“잠깐만요.”
다연은 탕비실 냉장고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어 태준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선물은 아직 서로 부담스러울 것 같고, 케이크 하나 만들었어요.”
“이걸, 직접?”
태준이 케이크 박스를 보며 놀라자, 다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 메뉴개발팀원한테 케이크 하나 만드는 거 어렵지 않아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 걸 준비했다니 은근 감동이었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선물 사 가는 거 잊지 말고요.”
“응. 전화할게.”
태준을 배웅한 다연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퇴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다연은 전투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생각보다 연락이 빨리 왔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준비는 철저히 해뒀으니까.
“여보세요, 연다연입니다.”
장예원,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
평창동 본가에 도착한 태준은 조수석에 올려둔 케이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아버지 생신이니까. 그래, 생신이니까 오늘은 참자.”
그렇게 주문을 걸며 차에서 내리는데, 맞은편에서 자동차 라이트가 태준을 비췄다. 강렬한 빛에 눈이 부신 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맞은편 차 주인이 누군지 살폈다.
“지금 오냐?”
차 주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태준은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식구들끼리 간단하게 식사하는 자리라고만 들었는데, 큰집 식구까지 부른 줄은 몰랐다.
“형도 오는 줄 몰랐는데?”
“왜? 안 반갑냐?”
“우리가 서로 반가울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사이가 어떤데? 아, 아래위도 모르고 손찌검하는 사이인가?”
태훈이 태준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도발했다.
“형도 이제 나이 들었나 봐? 그때 맞은 게 여태 낫질 않는 거 보면?”
“그러게.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이제 한 여자한테 정착하고 싶은 걸 보면.”
태훈이 한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태준은 얼굴을 구겼다.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잖아?”
“다연이 건드리지 마.”
“이미 늦었어.”
“뭐?”
태훈은 이제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태준에게서 뺏으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또 내가 왜 이러는지를.
“그 여자가 먼저 날 건드렸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연다연 씨가 먼저 날 건드렸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태준은 사촌 형이 무슨 소리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알아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겠거니 했다.
태준이 아꼈던 장난감 자동차를 빼앗듯, 형은 여전히 제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연다연 씨가 날 먼저 건드렸다고.”
“…….”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
태훈은 손을 들어 제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마음을 건드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