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태준은 어머니의 방문이 영 탐탁지 않았다.
“바빠요.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얘는. 오랜만에 엄마 봤는데, 그게 인사니?”
“약속 때는 안 오시고, 어쩐 일이세요?”
“그날은 내가 못 나가서 미안했다. 예원이랑은 인사했지?”
“인사 대신 당황했죠.”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인사해. 예원아.”
박 여사가 뒤에 서 있는 예원을 향해 손짓하자, 태준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서태준 씨.”
“장예원 씨는 약속이라는 걸 잡을 줄 모르나 봅니다?”
“예?”
“항상 이렇게 불쑥불쑥 아무 때나 나타나는 걸 보면, 약속 잡는 방법을 모르거나 내가 약속도 없이 만나도 될 정도로 쉬운 상대거나.”
날 선 아들의 말에 박 여사가 민망해하며 태준에게 눈치를 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약속도 없이 막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고. 그러니 장예원 씨가 약속도 못 잡는 사람인가 싶어서요.”
태준의 냉담한 반응에 예원은 너무 무안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성격 같아서는 확 들이받고 싶었지만, 옆에 박 여사가 있어 울컥거리는 화를 겨우 눌러 참았다.
“얘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예원이는 엄마 손님이야. 엄마가 데리고 온 거라고.”
“그러니까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지나는 길에 네 얼굴 보려고 들렀어. 엄마가 그러면 안 돼?”
“어머니도 그래요. 왜 번번이 말씀도 없이, 상의도 없이 제 일정을 정하시는 거예요?”
평소 살가운 모자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날 정도로 뾰족한 관계도 아니었다. 박 여사는 무던한 스타일이었고, 태준은 그런 어머니한테 대충 맞춰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저렇게 날카롭게 나오니 박 여사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너……!”
“아줌마.”
박 여사가 한소리 하려던 찰나, 예원이 나섰다.
“저 이만 가볼게요.”
“예원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요.”
예원은 박 여사에게 살갑게 말하고는 태준을 향해 말했다.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줌마랑 점심 먹고 근처 지나는 길에 들른 것뿐이에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예원은 상황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봐요. 정식으로 약속 잡고.”
예원은 태준을 향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한 뒤, 박 여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줌마, 다음에 뵐게요.”
“그래. 예원아. 조심히 들어가고.”
예원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가자, 박 여사가 태준을 노려보며 큰소리쳤다.
“너는 어쩜! 너 보고 싶어서 온 사람한테 그게 뭐니?”
“그러게 왜 말도 없이 데리고 와요?”
냉랭한 아들의 태도에 박 여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해성사하듯 맞선 때의 일을 사과했다.
“에휴. 네가 선은 하도 안 본다고 하니까 내가 일 꾸몄다.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아들 나이가 올해로 서른둘인데, 여태까지 연애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가볍게 만나는 여자도 없는 것 같고, 그 흔한 여자 후배도 여자 사람 친구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남들은 여자친구랑 여행을 가네 마네, 결혼을 하네 마네, 혼수가 어쩌고, 아파트가 저쩌고 하는데, 어쩜 내 아들만 감감무소식인지.
“내 아들이 뭐가 모자라서 여자친구가 없냐고. 얼굴이 딸려, 머리가 딸려, 집안이 딸려? 번듯한 회사 대표에 대한민국 최고가는 병원장 아들인데, 왜 연애를 못 하느냐고.”
“학벌이 딸리잖아요. 나 고졸이에요. 잘 아시면서.”
“서태준! 너 또 그런 식으로 얘기할 거야?”
태준은 농담으로 한 얘기였지만, 박 여사는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전국에서 1등 하던 똑똑한 아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기 어렵다는 대학교 의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아들이었다. 어렸을 땐 영재 소리, 커서는 천재 소리 들었던 아들이 대학을 포기했을 땐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엄마 가슴이 무너져.”
“제가 농담 주제를 잘못 잡았네요.”
“하아. 그때 그 사고만 없었어도…….”
슬퍼하는 박 여사를 보니, 태준은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하고는 싸우고 상처 주는 말로 마음이 더 독해지고 강해지는데, 어머니는 저렇게 눈물부터 흘리시니 마음이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그럼 예원이랑 한 번 만나볼래?”
태준이 꼬리를 내리자, 박 여사가 눈물을 닦으며 희망차게 물었다.
“얘기가 왜 그쪽으로 튀어요?”
“왜? 예원이 별로야? 예쁘잖아. 쟤 성격도 좋다? 집안은 더 좋고.”
“왜 자꾸 집안 얘기를 하세요? 장예원 씨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본인은 내세울 게 없나 보죠?”
태준이 또다시 뾰족하게 나오자, 박 여사가 눈을 흘겼다.
“둘이 결혼하면 넌 YM 푸드 사위가 되는 거고, 그럼 네 사업에 도움 되겠지.”
수많은 맞선 상대 중, 왜 예원을 데리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우리 병원이야 네 사업에 도움을 줄 수가 없잖아. 너 어차피 다시 공부할 거 아니면, 네 분야에서라도 최고가 돼야 하지 않겠어?”
“어머니.”
“그래.”
박 여사가 부드러운 눈길로 태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 훈련 많이 받으셨나 봐요?”
“뭐?”
“어쩜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하시나 몰라.”
“뭐? 이 녀석이!”
박 여사가 아들의 등짝을 내려치자, 태준이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 친구들이 너더러 뭐라 그러는 줄 알아?”
“왜요? 혹시 거기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요?”
“얘!”
“아니면 게이래요?”
“…….”
“맞구나? 역시 우리 어머니 거짓말은 못 하신다니까.”
태준이 피식 웃자, 박 여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서른 넘도록 여자친구 한 명 없지, 썸타는 여자도 없다지. 그럼 백이면 백 그렇다던데.”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게 보이는지.
“아버지는 어머니 이런 부분 보고 반하셨나 봐요.”
“말 돌릴래?”
“걱정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저 사귀는 여자 있어요.”
예상치 못한 태준의 말에 박 여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들 녀석이 결혼도 못 한 채 총각 귀신으로 죽나 싶었는데, 사귀는 여자가 있다니. 이렇게 기쁜 소식은 태준의 의대 합격 이후로 처음 듣는 거였다.
“여자친구가 있었어? 언제부터.”
“얼마 전에 생겼어요.”
“어떤 여자야? 엄마 소개 안 해줄 거야?”
“소개해 드려야죠.”
“언제? 아버지께도 말씀드릴까?”
“일단 제 여자한테 먼저 허락받고요.”
“아, 그렇지. 그게 순서지. 프러포즈는 했어?”
“아뇨. 아직.”
수줍게 웃는 태준을 보자, 박 여사는 아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감격이고 감동이고 기쁨이었다.
“어느 집안 딸인지 안 물어보세요?”
“엄마는 그런 거 상관없어.”
남편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예원이를 소개해주긴 했지만, 돈이나 명예보다 사랑이 우선인 박 여사에게는 태준이 어느 집안 여자를 만나든 상관없었다.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만 아니면 돼.”
“제 편, 들어주셔야 해요.”
“그럼. 엄만 언제나 네 편이야.”
“약속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 꼭 들어주신다고.”
태준이 어머니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하자, 박 여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난 네 편이야.”
“감사해요.”
“대신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나 모임에서 왕따라고.”
“누가 우리 어머니를 따돌려요?”
“다들 손자 손녀 사진 들고 와서 자랑하는데, 엄만 자랑할 핏덩이가 없잖아. 그러니 왕따 당하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던진 말이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들의 얼굴에 파이팅이 넘치는 걸 보아하니.
“곧 왕따에서 벗어나게 해드릴게요.”
아들의 말에 박 여사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아버지 생신인 거 안 잊었지?”
“아……. 예.”
“아버지 만년필 하나 사야겠더라.”
“예. 알겠어요.”
아버지의 잔소리가 벌써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 편을 들어주시는 어머니를 봐서라도 만년필 사러 백화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
한편. 태준의 집무실에서 나온 예원은 문을 닫자마자 얼굴색을 확 바꿔버렸다.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사람 무안하게 속을 너무 긁는다.
“그래봤자 구멍가게 대표 주제에.”
혼자 중얼거리던 예원은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고, 그녀 앞에는 트레이를 들고 있는 다연이 서 있었다.
“들었어요?”
“네?”
“방금 내가 한 말, 들었냐고요.”
“아, ‘그래봤자 구멍가게 대표 주제에.’라고 한 말이요?”
들은 말을 그대로 읊어주자, 예원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회사 대표나 비서나. 뭐 이딴 회사가 다 있어?”
“작년 소비자가 뽑은 브랜드 1위 기업입니다만.”
“허! 뭐야, 이 여자!”
예원은 다연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예원은 다연의 책상 위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혹시……?”
“……?”
“그쪽이 연다연이에요?”
***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박 여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금요일 저녁 잊지 말고.”
“네. 길 막히기 전에 들어가세요.”
“그래. 다연 씨, 다음에 봐요.”
박 여사가 상냥하게 손을 흔들자, 다연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네. 살펴 가십시오!”
“가셨어. 고개 들어.”
“어? 아, 네.”
고개를 들자, 태준이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아셨지?”
“우리 어머니 같이 일하는 직원들 이름 다 외우셔.”
“태준 씨가 알려줬어요?”
“응. 내가 제일 아끼는 직원이라고 소개하면서.”
“치.”
다연이 가볍게 눈을 흘기자, 태준이 다연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그 여자가 회사로 찾아올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이제 태준 씨 진심을 아니까.”
그 전엔 불안해서 의심했고, 또 몰라서 불안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믿음직했고, 또 그의 사랑을 알기에 든든했다.
“아무리 회사로 쳐들어와도 안 무서워요.”
다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태준을 더 꼬옥 끌어안았다.
***
밖으로 나온 예원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YM 푸드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한 회사였지만, 내실이 튼실한 곳이었다. 내는 족족 대박을 터트리는 태준의 레시피도 그렇고, 전국적으로 뻗어있는 의 프랜차이즈도 그렇고.
예원의 아버지는 이미 태준을 사윗감으로 점찍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저 남자 내가 가졌으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저렇게 날을 세우고 거부하다니.
“서태준. 네가 감히 날 거부해?”
예쁜 꽃일수록 가시가 많다더니, 태준이 딱 그런 꼴이었다. 게다가 주인까지 있고.
“좋아한다던 여자가 고작 비서였어? 허! 기가 막혀.”
직업이며 외모며 집안까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여자한테 밀렸다고 생각하니, 예원의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가 생겼다.
예원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일단 물러나지만, 다음엔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줄 작정이었다.
다연에게는 아무 감정 없었다. 다만, 번번이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태준을 괴롭혀주고 싶을 뿐.
“여보세요, 김 실장님? 사람 한 명 조사 좀 해주세요.”
그러려면 태준이 좋아한다는 그 여자부터 무릎 꿇려야 한다. 바로 내 눈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