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올겨울 크리스마스 때 눈을 볼 수 없을 거라며 아쉽다고 떠들어댔는데, 밤사이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시골 마을의 지붕 위에는 새하얀 눈이 쌓여있었고, 태준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길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눈길을 걸어 집 뒷동산에 오른 태준은 빨갛게 언 손으로 바닥에 쌓인 눈을 툴툴 털어냈다. 그러자 주먹만 한 솔방울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트리에 이 솔방울을 올려볼 생각이었다.
그럼 그 꼬맹이가 좋아하겠지.
“쪼그마한 게 앙큼하기는.”
태준은 제 입술을 매만지며 며칠 전 제 입술을 훔친 소녀를 떠올렸다. 날이 꽤 추워서 그런지, 아니면 그 아이를 생각해서 그런지 그의 양쪽 볼이 산딸기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아이는 예쁘고, 귀엽고, 앙큼하고, 안 보고 있으면 또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그런 아이였다.
별장 관리 아주머니의 딸이라고 했지? 그럼 별장 올 때마다 볼 수 있겠네? 이제 별장에 자주 와야겠다. 방학 때마다 오고 또 주말마다 오면…….
그 소녀를 떠올리자 태준의 얼굴 위에 히죽히죽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태준은 그 소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내년 생일만 지나면 성인이 되는 그와는 달리, 다연은 성인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둘 다 어른이 되면…… 어른의 연애를 할 수 있을 텐데.
태준은 자신의 변화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공부밖에 모르던 자신이, 학교에서 수많은 여학생의 고백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이, 그 작은 아이 때문에 흔들리다니.
태준은 피식 웃으며 솔방울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담았다.
다연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 건너편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다연이 보였다.
뭘 저렇게 집중하며 꼬물거리고 있는지. 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다연을 불렀다.
“연다연!”
태준의 부름에 다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 별장 오빠!”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태준을 알아본 다연은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는 신나게 흔들었다. 마치 주인을 알아본 하얀 털 뭉치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귀엽고 예뻤다.
당장에라도 주머니에 쏙 넣고 싶은 마음에 태준은 다연을 향해 달려갔고, 다연도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러웠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닿기 위해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커다란 트럭이 하얀 눈길을 가로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온 것은.
태준을 향해 뛰어오는 다연은 미처 차를 발견하지 못했고, 속도를 내며 달려오던 트럭은 눈길에 휘청거렸다.
“연다연! 멈춰!”
다급해진 태준이 다연을 향해 외쳤지만, 그녀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연아! 위험해!”
트럭은 다연을 향해 질주했고, 태준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다연이 차에 치이기 직전, 태준은 가까스로 그녀를 밀어냈다.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턱- 하고 뭉툭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그는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다연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 부러지고 찢어진 것 같은데,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다연의 상태가 걱정됐을 뿐.
“다연아…… 어디 있어, 연다연. 장난치지 말고 나와.”
아무리 소리쳐도, 있는 힘껏 그녀를 불러도 다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연아…… 다연아…… 연다연!”
“태준 씨! 일어나봐요, 태준 씨!”
“헉! 허…… 하아.”
침대에서 일어난 태준은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고 멍한 정신으로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따뜻한 손길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악몽 꿨어요?”
“다연아!”
어둠 속에서 다연을 발견한 태준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하아. 연다연.”
“왜 이래요? 무서운 꿈꿨어요? 물 좀 떠다 줄까요?”
다연이 일어나려고 하자, 태준은 그녀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손끝으로 그녀가 만져지고, 코끝으로 그녀의 체향이 스치자, 놀란 태준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무슨 악몽을 꿨길래 이렇게 놀라요?”
13년 전. 그 사건 이후, 매일 밤 꾸던 꿈.
그래서 수면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나마 수면제를 먹으면 잠에 취해, 매일 밤 그녀를 잃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연을 만난 후부터는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잘 수 있었고, 그 악몽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시 악몽을 꾼 걸까?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식은땀까지 흘려요?”
다연이 걱정스럽게 묻자, 태준이 품에서 그녀를 떼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다연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널 잃는 꿈을 꿨어.”
“와. 나랑 헤어지는 꿈 꾼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운 꿈.
악몽의 끝은 항상 똑같았다.
태준은 끝끝내 새하얀 눈길 위에 피범벅이 되어 있는 다연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아무리 사람을 불러보아도, 도움을 요청해 보아도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차에 치이면서 어딜 다친 건지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태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연을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울고 있으면 어김없이 커다란 트럭이 다시 나타나 그를 향해 질주했다. 그러면 태준은 다연을 더 꼭 끌어안았다.
트럭은 태준과 다연을 만신창이로 만든 후에야 유유히 사라졌다.
오늘은 다행히 다연이 자신을 깨우는 바람에 악몽의 끝을 보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마음이 안 좋은 건 여전했다.
“꿈은 꿈일 뿐이에요.”
다연이 태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녀의 손길에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이리 와요. 안아줄게요.”
태준은 다연의 품에 안겼다. 폭신한 감촉에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나 태준 씨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말고 자요. 꿈은 꿈일 뿐이니까.”
그래. 꿈은 꿈일 뿐이다.
넌 내 옆에 있고, 난 널 절대 보내지 않을 거니까.
꿈에서처럼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어차피 그건 꿈일 뿐이니까.
“사랑해, 다연아.”
“나도요, 태준 씨.”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태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연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
다음 날.
태준과 함께 출근한 다연은 바쁘게 일을 소화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경합 때문에 지하 조리실과 13층 대표실을 오가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1층 경호팀에서 연락이 왔다.
-방금 사모님 올라가셨습니다.
“사모님이요?”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낯설어 단번에 누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 서태준 대표님 어머님이요.
“아!”
그제야 보안팀에서 말하는 ‘사모님’이 누군지 깨달은 다연은 온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예.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부터 매만졌다.
물론 지금은 서태준 대표의 비서로 박 여사를 보는 거였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거였다.
그래서 떨리고 긴장됐다. 아주 예쁘게는 아니어도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옷을 가다듬고 태준에게 어머니가 오셨다고 전하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연은 문을 열고 박 여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친절하고 교양 넘치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다연이 박 여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녀 뒤로 또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키가 컸고 날씬했고 또 굉장한 미인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태준이, 안에 있나요?”
“아, 안에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다연은 박 여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태준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일에 집중하고 있던 태준은 손님이 왔다는 말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어머님이세요.”
“어머니?”
“그리고…….”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에 대해 설명하려던 다연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를 설명할 방법도 모를 뿐더러, 손님을 계속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연은 집무실에서 나가 박 여사를 향해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고마워요.”
박 여사는 다연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고, 젊은 여자는 다연을 무시한 채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박 여사 뒤를 따랐다.
“어머니.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내가 꼭 연락하고 와야 하니? 아, 맞다. 인사해.”
박 여사가 태준에게 젊은 여자를 소개하려고 하자, 태준이 다연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만요. 연 비서, 차 좀 준비해줄래요? 어머니 뭐 드시겠어요?”
“난 커피.”
“저도요.”
“예. 알겠습니다.”
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나와 탕비실로 향했다.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 박 여사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태준 씨 누굴 닮아 그렇게 잘 생겼나 했더니, 어머님을 닮았구나?”
반듯한 몸가짐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거기에 예쁜 미소가 딱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근데 그 여자는 누구지?”
박 여사와 함께 온 것을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굉장한 미인이던데…… 아!”
그 순간.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하게 뿌린 여자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맴돌며, 그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그래, 그 여자…….”
뒷모습만 보는 바람에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했다.
“맞아. 그때 호텔에서 태준 씨랑 맞선 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