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다시 말해봐.”
서늘한 그의 음성이 다연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고, 그녀는 더 차갑게 말했다.
“왜요? 내 말이 틀렸어요? 나한테 어머니 만난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랑 맞선 본 건 사실이잖아요!”
울분에 찬 다연의 말에 반반했던 태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말투와 눈빛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다연과 데이트가 잡혔던 날이었다. 태준은 예약하기 힘들다는 레스토랑을 어렵게 예약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이기에 태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혹시나 일 처리가 늦어지면 데이트 시간도 줄어들까 봐 서둘러 일을 정리했다.
온종일 커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끝냈는데, 갑자기 회의가 잡혔다고 했다. 풍선처럼 두둥실 떠 올랐던 기분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려 '펑' 하고 터진 듯 축 가라앉아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연이 일부러 회의를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데이트 때문에 회의를 미루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준은 실망한 마음을 감춘 채, 데이트를 다음으로 미뤘다. 그런데 회의 때문에 데이트를 취소했던 다연이 호텔에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태훈과 함께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속에서 열이 들끓고 미쳐버릴 것 같은데, 자신은 그녀를 속이고 맞선 보러 간 거짓말쟁이에,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 선이나 보는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다연에게 그런 남자가 되어 있다니. 태준은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날 믿어 볼 생각은 없었어?”
“내가 왜요?”
“뭐?”
“어머니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한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웬 여자랑 맞선을 보고 있어요. 내 앞에서 결혼이니 결합이니 그딴 얘길 떠드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내가 왜 태준 씨 믿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냐고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경멸하듯 노려보는 눈빛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태준의 심장 깊숙이 찌르는 것 같았다.
못 믿을 만했다.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날 믿어 볼 생각은 못 했어? 왜 날 믿어 보려고 안 했냐고!”
“눈앞에 진실이 있으니까요!”
폐부를 찌르는 다연의 말에 태준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허!”
“그런 장면을 봤으니 화났겠지. 열 받았겠지. 근데!”
그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울렸다.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놀랐고, 당황스러웠고, 억울했다.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날 믿어 볼 생각 좀 하지 그랬어!”
“……!”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말 내내 핸드폰을 붙들고 전화했고, 그녀의 집 앞에 찾아왔고, 혹시라도 굶고 있을까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런 장면을 보게 해서 미안하다고, 네 예쁜 얼굴에 비참한 표정 짓게 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어머니께 미리 만나는 여자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아 미안했다고,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사과하려고 했다.
자신이 미안했던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서태준이라는 남자를 거짓말이나 하고 다른 여자나 만나 맞선이나 보는 개새끼로 보고 있었다니!
그날 태준은 형과 함께 있는 다연을 보고 화가 났지만, 그건 다연이 아닌 태훈을 향한 감정이었다.
그는 다연을 믿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호텔까지 태훈과 같이 와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게 무슨 사정이고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미친 듯이 속이 들끓고 질투가 났음에도, 태준은 그녀를 믿었다.
그에게 다연은 그런 존재였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할 존재.
그런데 다연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태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어머니 만나러 간다던 사람이 왜 그런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중간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닌지, 한 번 헤아려볼 생각은 없었냐고!”
“……!”
그제야 다연의 머릿속에 감정이 걷혔고, 상황을 판단할 만한 이성이 되돌아왔다.
그날 다연은 앞뒤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본 사실만 믿었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내게 했던 말과는 달리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으니 눈이 돌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서태준이라는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고 맞선이나 보는 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네가 날 좋아한다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는 게 순서였어.”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 실망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날 믿을 생각이 없었나?”
“……!
다연은 떨리는 눈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연다연.”
자신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음성은 냉랭하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적어도 좋아하는 여자한테 거짓말하고 다른 여자나 만나러 다니는 그런 쓰레기는 아니야.”
다연은 차마 돌아서는 그를 막지 못했다.
만나자마자 잠자리부터 시작했다는 이유로 그를 바람둥이로 오해했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남자로 치부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에 대한 불신과 선입견으로 시작한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나밖에 모르는 남자를 말이다.
다연은 발이 땅이 박힌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못하고, 태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시간은 어색하게 흘렀다.
다연은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렸고 주저했으며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태준은 그런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담하게 굴었다.
하루 꼬박 8시간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었다.
다연은 유리 너머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말 한 번 걸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한참 동안 태준을 보고 있을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퇴근하십니까?”
“무슨 상관이지?”
태준의 서늘한 눈빛이 다연의 얼굴에 닿았다.
자신을 보는 눈빛은 언제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는데. 그 이후 그의 눈빛이 너무도 낯설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바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다연은 저녁 식사를 제안하려고 했지만, 태준은 냉랭하게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가버렸다.
“휴우. 언제쯤 나아지려나.”
불편하고 어색하고 껄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한 건 사실이었으니 납작 엎드릴 수밖에.
그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이었다.
“아, 큰 대표님.”
“바빠요?”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작년 하반기 결산 자료 필요하다고 해서.”
“김 비서님 통해서 주시지 왜 직접 가져오셨어요.”
“할 말도 있고.”
“할 말이요?”
서류를 받던 다연은 무슨 말인가 싶어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호텔에서, 물어봐도 돼요? 왜 그냥 갔는지.”
“아…….”
그러고 보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후, 태훈과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와 특별히 마주칠 일도 없었을 뿐더러, 태준을 신경 쓰느라 태훈의 존재 자체를 잊기도 했다.
“그날은 죄송했어요.”
“그런 얘기 듣자고 물은 건 아닌데.”
차마 태준과의 사이를 말할 수 없었던 다연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자, 태훈이 한발 물러섰다.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말아요.”
“그날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죠?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날 잡을까요?”
태훈이 농담 반 진담 반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했지만, 다연은 말을 돌려버렸다.
“자료는 작은 대표님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둘러 한 거절에 태훈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퇴근 준비 안 해요?”
“이제 해야죠.”
“그래요. 그럼.”
다행히 태훈은 별다른 말 없이 나갔다.
그날도 그렇고 태훈의 눈빛이나 분위기가 꽤 이상함을 느꼈던 다연은 그가 좀 불편했다. 아니, 좀 많이.
뭐랄까. 예전에는 회사 대표와 직원으로 서로 공적으로 대했다면, 요즘에는 태훈이 자꾸만 선을 넘으려는 게 느껴졌다. 전에 차 문을 열어주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오늘 슬쩍 둘러 거절했는데, 다행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회사 상사이다 보니 그의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었다.
“하아. 계속 저러시면 불편한데…….”
한숨을 푹 내쉬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문자 알림음이 들려왔다.
-조리실로 내려와.
태준의 문자였다.
“조리실은 왜……?”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왜 조리실로 부르는 걸까? 오늘 할 일은 다 마무리했는데.
‘혹시 나랑 화해하려고?’
전에도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조리실에서 죽을 끓여주던 그가 떠올랐다.
다연은 서둘러 사무실을 정리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리실로 향했다. 모두 퇴근을 한 모양인지 건물 곳곳은 불이 꺼져 있었고,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검은 복도 끝, 조리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대표님.”
조리실 문을 열며 태준을 불렀지만, 대답 대신 그녀의 구두 소리만 들려왔다.
“어디 있는 거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
“대, 대표님?”
태준이었다. 그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다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잠시 나간 사이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조리실 구석에 있는 재료실로 끌고 갔다.
재료실로 들어간 태준은 문을 잠가버렸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궁금해졌어.”
태준은 다연을 벽과 자신의 두 팔 사이에 가두고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 뭐가요?”
그의 시선은 낙인이라도 찍는 것처럼 미친 듯이 뜨거워, 다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그날, 왜 형이랑 호텔에 갔는지.”
“그, 그건…….”
다연은 곤란했다. 밥을 사주겠다는 약속 때문이라고 말하면 왜 그런 약속을 했냐고 물을 거고, 그럼 대출 얘기까지 꺼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까지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했으니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다연은 대충 넘길만한 이유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그냥 서태훈 대표님이…….”
그 순간.
다연의 입술이 태준에게 먹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