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비에 젖은 다연은 집으로 돌아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틀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차갑게 식은 몸을 녹였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놀라서 그런 건지 온몸이 덜덜 떨렸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물이 욕조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치아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와 두 손으로 살을 감싸 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연의 머릿속에는 맞선녀의 말이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YM 푸드 대표세요.”
집안도 훌륭하고.
“사실 제가 태준 씨 보고 싶다고 저희 엄마한테 졸랐어요. 예상보다 더 마음에 드네요.”
목소리가 아주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더라.
“태준 씨, 결혼은 언제쯤 할 예정이세요?”
얼굴도 되게 예쁠 것 같던데. 뒷모습은 예뻤어.
“난 올가을에는 하고 싶은데.”
난 가을보다는 봄이 더 좋은데…….
떨치려고 노력해도 맞선녀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다연을 괴롭혔다.
다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찰랑찰랑 차오른 욕조 속 물에 얼굴을 담갔다. 숨을 참고 물속에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점점 숨이 가빠올수록 맞선녀에 대한 생각이 덜 나는 것 같았다.
“파아!”
결국, 숨을 못 참을 지경에 이르자 다연은 욕조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몸을 괴롭히니 잠시 생각을 멈출 수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샤워를 마친 다연은 밖으로 나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멀뚱멀뚱하게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니 또다시 호텔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머릿속을 탈탈 털어 먼지 한 톨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물론 불가능했지만.
핸드폰이 울렸다. 태준이었다. 다연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시 전화가 왔는지 빛 하나 없는 검은 방 안이 밝게 빛났다. 태준에게 걸려오는 핸드폰이 꼴도 보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핸드폰이 울렸지만, 다연은 받지 않았다.
한편, 다연의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던 태준은 차에 올라탔다.
한참 전에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지만, 그는 집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늦은 밤 남자의 방문이 부담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게 서태준 자신일지라도.
한동안 다연의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던 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해는 내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태준은 눈 뜨자마자 다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일이었다면 회사에서 어떻게든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신호음이 계속 이어지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하아.”
어제도 그의 전화를 피했던 다연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도 그의 전화를 피할 가능성이 있었다.
태준은 곧장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를 열었다. 전에도 자신과 다툰 후 다연의 얼굴이 많이 상했던 게 떠올랐다. 하루 종일 밥도 못 먹은 것 같았고.
주말 내내 밥도 못 먹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던 태준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요리 재료를 꺼냈다.
입맛이 없을 테니 속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죽이 좋을 것 같았다. 태준은 전에 다연이 성게 죽을 맛있게 먹었던 것을 떠올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쌀을 불리고 채소를 썰었다. 맑은 육수를 내고 재료를 넣어 정성껏 끓였다.
요리하는 내내 다연의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도 다연은 예원이 한 말을 다 들었을 거다. 그리고 하필 그녀는 다연이 들으면 마음 아플 말들만, 오해 사기 딱 좋은 말들만 꺼내놓았고.
아파할 다연을 생각하니 태준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어머니께 교제하는 여자가 있다고 못 박아둘 생각이었고, 예원에게는 이미 제 생각을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그리고 태훈은…….
“하아.”
태훈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게 같아 자주 다투곤 했던 형제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다. 물론 태준이 한국에 거의 없어서 부딪힐 일이 없었던 게 큰 일조를 했지만, 어쨌든 태훈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형이 다연이한테……? 아니겠지?”
태준이 갖은 건 뭐든 다 뺏어야지만 직성이 풀렸던 태훈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렸을 때의 일이었고 또 물건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훈이 다연과 제 사이를 방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헙!”
뜨거움을 느낀 태준은 빠르게 손을 치웠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느라 손이 빨갛게 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지만, 상처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다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다연은 받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도 싫었고, 그와 마주 보기도 싫었다.
그런데 집까지 찾아오다니.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다연은 그냥 모른 척 해 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밖에서 들리던 태준의 기척은 사라졌다.
“갔나?”
아까는 얼굴도 보기 싫었는데,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갔을 그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다연은 현관문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태준은 이미 가고 없었다.
“갔네…….”
다연은 은근히 실망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보기 싫다고 모른척할 때는 언제고 가니까 아쉬워하다니.
매몰차지 못한 제 성격을 탓하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현관 앞에 놓인 구두가 보였다.
“이제부터 이 집은 내 구두가 지켜.”
“내 신발 외에 다른 남자 신발은 안 돼.”
자신을 걱정하며 구두를 두고 갔던 그가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 그땐 참 좋았는데. 아니, 어제 회의 전까지는 계속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됐을까.
양 볼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을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자 알림음이 들려왔다. 태준이었다.
-나한테 화난 거 알아. 그래도 몸은 챙겨. 집 앞에 도시락 두고 왔어.
문자를 확인한 다연은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의 문자대로 집 앞에는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도시락이 보였다.
도시락을 갖고 안으로 들어온 다연은 식탁 앞에 앉았다. 도시락을 여니 전에 태준이 만들어 주었던 성게 죽과 그녀가 좋아하는 식빵 피자가 들어 있었다.
정성껏 만든 그의 요리를 보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난 피하기만 하는데. 아직 태준 씨 용서 못하겠는데 왜 이렇게 잘 해줘…….”
다연은 오늘도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준이 만든 죽과 피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게 죽과 피자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음식을 보니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주말 내내 밥 한술 못 먹은 제게 성게 죽을 끓여주었던 자상한 그가,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식빵 피자를 만들어 준 고마운 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음식은 맛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음식과 함께했던 사람과의 추억과 같이 간직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제 앞으로 다연은 성게 죽과 식빵 피자를 보면 태준이 떠오를 거였다.
그와 처음 함께 먹었던 묵은지 닭볶음탕을 봐도, 청양고추가 듬뿍 들어간 양평 해장국을 봐도, 시원한 얼음 맥주를 봐도, 그리고 K 호텔의 달달한 다쿠아즈를 봐도. 그가 떠오를 것이다.
그게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간에 말이다.
다연은 보온 도시락에 담겨있는 성게 죽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참기름의 고소한 맛과 함께 뭐든 품어줄 것 같은 바다향이 입 안 가득 느껴졌다.
“맛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자상한 당신이, 날 아껴주는 당신이, 다른 여자가 아닌 나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어.
나 욕심쟁이지? 근데 내 마음이 그래. 당신이 나만 사랑했으면 좋겠어.
다연은 태준이 애써 만들어온 죽과 피자를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먹었다.
***
월요일 아침.
태준은 일요일에도 도시락을 싸서 다연의 집 앞에 두고 갔고, 다연은 그가 만들어 준 요리를 말끔하게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인지 전처럼 힘이 없거나 핼쑥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눈이 조금 부었을 뿐.
일찍 출근한 다연은 대표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은 다연이 먼저 출근해 대표실을 정리하고 하루 일정표를 뽑아놓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태준이 먼저 와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다연은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먼저 가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 솔직하게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선을 보았다는 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언급했다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자의이든, 타의이든 말이다.
우두커니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예. 대표님.”
-들어와요.
태준의 호출에 다연은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얘기 좀 해.”
이번엔 태준의 얼굴이 야위어 있었다.
다연은 파리해진 그의 얼굴을 보자 속상해졌다. 자기한테 그 맛있는 요리를 해다 바치면서 정작 자신은 며칠 사이에 살이 쏙 빠졌는지. 지금이라도 그를 끌고 가 뭐든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다연의 마음과 달리 입에서는 날 선 말이 튀어 나갔다.
“무슨 얘기요? 나한테 거짓말하고 선보러 간 얘기요?”
“뭐? 거짓말?”
순간 태준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고, 둘 사이는 냉랭하게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