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31화 (31/74)

31화 [공금,갠소]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태준은 K 호텔로 향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딱 한 번 부모님과 식사하며 인사한 게 전부였던 태준은 안 그래도 그날의 만남이 마음에 걸려 있던 참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의대에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크게 다툰 후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최고 병원의 원장인 아버지는 태준이 의대를 포기하고 진로를 바꾼 것에 항상 불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믿었던 아들이 수술대 앞이 아닌 조리대 앞에서 칼을 들고 있으니, 서 원장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랜만의 가족 모임을 망친 게 미안해서 안 그래도 어머니와는 따로 만나려던 참이었다.

다연의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던 태준은 그녀와의 데이트는 다음으로 미루고 어머니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부터 K 호텔의 베이커리를 즐겨 찾았던 박 여사였다. 그래서 태준은 금요일 저녁 호텔에서 만나자는 어머니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웬 여자가 다가와 싱긋 웃으며 ‘서태준 씨 맞죠?’라고 물었을 때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아들. 엄마가 늦을 것 같은데, 마침 엄마 친구 딸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보냈거든. 둘이 대화 좀 나누면서 조금만 기다려줄래? 한 20분 정도 늦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처음 보는 여자와 마주 앉게 된 태준은 상황이 점차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예원이라고 해요.”

꽤 세련되게 생긴 여자는 쾌활하게 자기소개를 하더니, 살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 창업자라면서요? 저도 종종 식당 가서 식사하곤 해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보다 저희 아버지께서 식당을 좋아하세요.”

여자가 을 좋아하든, 그녀의 아버지가 을 좋아하든 태준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친구의 딸이라는 것과 그래도 을 좋아하는 고객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혹시 YM 푸드 아세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YM 푸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YM 푸드는 각종 요식업 브랜드는 물론 다양한 식품을 제조하는 거대 회사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얘기를 왜 꺼내나 싶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YM 푸드 대표세요. 전 본부장이고.”

그녀의 말에 태준은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리인지 사업인지 계속할 거면 맞선이라도 보거라! 언제까지 구멍가게나 하고 있을 거냐? 사내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포부를 더 크게 가지란 말이야!”

그땐 그저 의대에 다시 진학하라는 잔소리려니 하며 그냥 넘겼는데, 진짜로 맞선을 보게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할 줄이야.

어떻게 상황을 정리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예원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사실 제가 태준 씨 보고 싶다고 저희 엄마한테 졸랐어요. 예상보다 더 마음에 드네요. 태준 씨는 저 어떠세요?”

“…….”

“호호. 제가 너무 성급했나요? 첫 만남에 이런 질문을 하고. 근데 어차피 맞선보는데, 서로 솔직한 게 낫지 않아요?”

여자는 저돌적이었고 또 거침없었다.

“우리 YM 푸드는 에 관심이 많아요. 정확히는 저희 아버지께서요. 전 태준 씨한테 관심이 많고요. 두 회사가 힘을 합치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최고가 될 것 같은데, 태준 씨 생각은 어떠세요?”

예원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YM 푸드의 장예원 본부장과 의 서태준 대표가 서로 회사를 대표해서 만난 자리가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로 만난 자리였고, 곧 그녀의 제안에는 ‘결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준은 다연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고, 단호한 그의 거절에 예원의 얼굴에 경련이 인 것처럼 살짝 꿈틀댔다. 하지만 예원은 곧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연애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나요? 결혼 전에 다 정리하고 오기만 하면 되죠.”

“장예원 씨. 난…….”

“태준 씨,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세요? 난 올가을에는 하고 싶은데.”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결혼을 묻는 그녀의 당당함이 난감하다 못해 사람을 질리게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 태준이 자리를 정리하려는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본 순간 빳빳하게 굳어버린 여자는 다름 아닌 다연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다연은 예원의 말이 다 들릴 만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태준은 회의 때문에 늦게 끝난다는 다연이 왜 호텔에 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연아!”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부르자, 예원이 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예원의 날카로운 눈빛은 다연을 향했고, 불길이 인 태준의 눈은 태훈과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왜 형이랑 같이…….”

태준이 물었지만,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다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태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연 씨!”

태훈은 다연을 불렀고, 태준은 다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예원이 태준의 팔을 붙잡았다.

“태준 씨, 지금 어디 가시는 거죠?”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내 여자 잡으러 갑니다.”

태준은 예원의 손을 뿌리치고 다연을 잡기 위해 달렸다.

예원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너무 쉬운 남자는 재미 없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YM 푸드에서, 게다가 나 같은 미인이 그렇게 솔깃한 제안을 하면 두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까일 줄이야. 존심 상하게.

태준은 그동안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예원이 만났던 남자들은 대개 그녀의 배경을 보고 먼저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찝쩍거리거나, 집안의 주선으로 접근하거나.

하지만 태준은 달랐다. 예원이 먼저 그에게 접근했다는 것도, 그녀의 배경이나 돈을 탐하지 않는 것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보기 드문 순정남이네?”

명품도 리미티드 에디션만 찾아다녔던 예원이었다. 뭐든 한정판이 최고였고, 요즘 저런 순정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뭐든 애가 타야 가졌을 때 성취감도 큰 법. 갖고 싶은 걸 바로 얻으면 금방 질리는 법이다.

“아, 오랜만에 승부욕 돋네.”

예원은 가방을 챙기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엄마. 방금 헤어졌어. 마음에 들어. 다음에 아줌마랑 같이 만나면 안 될까? 엄마는. 내가 이렇게 말한 적 있어? 변덕 안 부린다니까.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또각또각. 예원의 구두 소리가 로비를 가득 메웠고,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들은 태훈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

호텔을 빠져나온 다연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팔짱 낀 연인들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K 호텔에 와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분위기 좋은 이곳에 그와 함께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그와 꼭 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와 있었다. 그것도 다른 여자와 맞선을 보면서.

-아직 회의 중? 어머니께 연락이 와서 뵈러 가고 있어. 회의 끝나면 연락해.

아깐 분명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어머니와 오랜만에 만나는 걸 알기에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도 하라고 했다. 그런데 맞선을 보고 있었다니.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한테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의심이 한 번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만나자마자 잠부터 잔 사이라 날 쉽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결혼 따로 섹스 따로?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날 섹스 파트너로만 생각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다연은 그의 진심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네 마음을 원해. 네 눈길을 원해. 네 관심을 원해. 네 손길을 원하고, 네 사랑을 원해.”

다연은 그때 그의 진심을 느꼈고 그랬기에 그와 만남을 지속했다. 하지만 마지막엔 이런 얘기도 했었지.

“그리고 네 몸도 원해.”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얼마나 걸었는지 다연의 작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다연은 휘청거리며 골목 구석에 주저앉았다.

맞선, 결혼, YM 푸드와 의 결합…….

맞선녀가 했던 말이 자꾸만 다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태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아무리 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대기업의 자금이 투입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만약 YM 푸드와 이 결합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큰 기업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태준은 종종 말하곤 했다.

“세계 각 나라에도 분점을 내고 싶어. 내가 만든 식당이 전 세계에 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과연 그는 맞선녀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리고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의 앞길을 막고 싶진 않았다. 내 꿈을 이루고 싶은 만큼 그의 꿈도 응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역할이, 나의 존재가 그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 우린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서로 대화 주제도 잘 맞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그는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다연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연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검은 밤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녀의 두 뺨 위로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

한편. 호텔에서 나온 태준은 주변을 뒤져 다연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곧장 달려온 게 아니었기에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젠장.”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낯선 여자와 맞선을 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게다가 예원은 애타는 태준의 속도 모른 채, 결혼이니 결합이니 하는 말을 계속 내뱉고 있었다. 그때 다연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연은 왜 이 시각에 호텔에 왔던 걸까?

갑작스러운 의문이 그의 머리에 박혔을 때였다. 호텔에서 태훈이 여유로운 얼굴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내 스케줄을 알고 갑자기 연락을 해오신 건지, 데이트를 앞둔 다연에게 왜 급한 회의가 잡힌 건지, 다연이 뜬금없이 왜 호텔에 와 있는 건지. 그리고 왜 하필 제 앞에 다연이 앉은 건지까지.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은 있었다.

“어? 태준이 네가 여긴 웬일이냐?”

태준은 뻔뻔하게 아닌 척 인사를 건네는 태훈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태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술이 터졌는지 태훈의 입가에 피가 고였지만, 태준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아니, 제 마음이 풀릴 때까지 더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는 내 여자한테 접근하지 마.”

갑작스럽게 주먹질을 당한 태훈은 죽일 듯한 눈으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부탁 아니고 명령이니까 잘 새겨들어.”

태준은 매서운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