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회의는 허무하게 끝났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최종 경연에서 힘내라’는 응원의 말 한 마디가 전부였다.
대회의실을 나서는 직원들은 모두 한 마디씩 툴툴거렸다.
“이럴 거면 내일 하든가.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별 쓸데없는 소릴 하고 있어.”
신경질이 난 유미는 입술을 댓 발 내밀며 투덜거렸고, 다연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퇴근 전에 급한 회의라고 붙잡아놓는 바람에 데이트까지 취소했건만, 이렇게 어이없는 말을 하려고 기다리라고 한 건지.
“야, 거꾸로 해도 연다연. 짜증나는데 오랜만에 치맥 어때?”
“언니, 미안. 나 약속이 있었거든. 다음에 먹자.”
다연은 혹시나 태준이 기다릴까 싶어 유미를 뒤로 하로 서둘러 13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7시가 훌쩍 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계속 다연에게 기대를 품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연은 빠른 걸음으로 대표실을 향해 걸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괜히 태준이 더 보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문자라도 보내 놓을걸.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걸.
이런저런 후회하며 문을 연 순간, 텅 빈 사무실이 보였다.
“하아. 없네.”
실망하고 있는 그때, 다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태준의 문자였다. 다연은 재빨리 문자를 확인했다.
-아직 회의 중? 어머니께 연락이 와서 뵙기로 했어. 회의 끝나면 연락해.
“아, 어머니 만나러 갔구나?”
한국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잔소리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 자주 찾아뵙고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데이트를 놓치게 돼서 서운하긴 했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 거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어머니와의 데이트를 방해할 생각이 없던 다연은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
-회의는 방금 끝났어요. 식사 맛있게 하고 오랜만에 어머님이랑 데이트도 해요. 난 집에 가서 쉴 테니까 걱정 말고요.
문자를 보낸 다연은 조리실에 가서 연습할까 고민하다가 짐을 챙겼다. 며칠 동안 계속 늦게 퇴근했더니 몸도 피곤했고, 졸리기도 했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하고 주말에 해야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연 비서. 이제 퇴근해요?”
태훈이 다가와 다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이제 퇴근하는 모양이었다.
“예. 대표님도 이제 퇴근하세요?”
“요즘 일이 많네요.”
“레시피 경합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다들 바쁘네요.”
다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태훈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준이는요?”
“어머님과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먼저 퇴근하셨어요.”
“아…… 작은어머님과 약속이 있었군요.”
앞을 보고 있던 다연은 몰랐다. 작게 중얼거리는 태훈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다연은 1층을 누르며 태훈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지하 1층에 차 있나요?”
“네. 음. 그런데 연 비서.”
“예?”
“괜찮으면 같이 저녁 식사 할래요?”
예상치 못한 태훈의 식사 제안에 다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준이야 처음부터 밖에서 만났던 사람이라 별 거부감이 없었지만, 태훈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회사 대표와 직원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와 회사 밖에서 만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이 시각에?
그렇게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밤에 그와 함께 식사할 이유도 없었다. 커피를 한잔하는 것도 아니고, 웬 밥?
태훈은 ‘제가 왜요?’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다연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여태 그 어떤 여자도 제 식사 제안을 저렇게 온몸으로 거부하는 여자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같이 밥 한 번 먹고 싶어서 안달이었지.
태준과는 별개로 은근히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처음엔 열정 가득한 평범한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직원이라고 생각했고, 요리조리 뜯어보니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거기까지였는데, 보면 볼수록 소유욕이 생겼다.
그간 자신이 만나던 여자들과 다른 반응이 새롭게 느껴졌고, 당당하게 제 의견을 내놓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태준의 여자라는 것까지.
‘아,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
오기가 생긴 태훈은 오늘 꼭 다연과 함께 식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계획과는 별개로 말이다.
“K 호텔에 베이커리에 새 메뉴가 나왔다는데…….”
“K 호텔에 새 메뉴가요?”
K 호텔의 새 메뉴라는 말에 다연의 눈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K 호텔의 베이커리는 이쪽에서는 꽤 맛있기로 유명했고, 다연도 새로운 메뉴가 생기면 제 돈 주고 가서 먹기도 했다.
메뉴개발을 위해서는 요리 연습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것도 필요했다.
“사실 내 친구들은 먹기만 할 줄 알지 요리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같이 음식 얘기를 하고 싶은데, 연 비서가 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태훈은 다연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그녀를 유혹했다. 하지만 다연은 쉽지 않은 여자였다.
조금 전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K 호텔의 새 메뉴를 떠올리는 듯싶었지만, 이내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해맑게 거절했다.
“그럼 내일 낮에 같이 가시는 건 어떨까요?”
더 시간을 끌어봐야 다연의 마음은 거절 쪽으로 기울일 거다. 빨리 그녀의 대답을 들어야 했던 태훈은 히든카드를 꺼냈다.
“전에 나한테 밥 사준다고 했던 약속, 안 잊었죠?”
그의 말에 다연은 떼르륵 눈동자를 굴려 총무과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도움으로 김 과장의 딴지에도 빠르게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로 밥 한 번 사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고.
호텔에서 그와 단둘의 식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요. 안 잊었죠. 가시죠.”
최대한 빨리, 밥만 먹고 나오자. 밥만.
다연은 그렇게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제 차로 이동하죠.”
“네.”
삑- 소리와 함께 화려한 차의 도어락이 열렸다. 다연은 조금 앞서 걸어가며 손을 내미는 태훈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문 열어주려는 거야?’
단둘이 ‘호텔’에서 식사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왜 저런 행동까지 하는 거지?
다연은 걸음에 속도를 내서 태훈과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태훈이 조수석 문을 열려는 찰나, 재빨리 손을 뻗어 문을 열어버렸다.
“어머, 차가 좋아서 그런지 그립감이 장난 아니네요.”
태훈이 무안할 수도 있으니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아, 그런가요? 타세요.”
“예.”
다연은 혹시나 값비싼 차에 흠집이라도 남기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막 안전벨트를 매려는 순간, 불길한 손길이 감지되었다. 태훈의 손이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 정말 왜 저래?’
문 열어주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없는 스피드 내서 겨우 제 손으로 문을 열었는데, 이젠 더 나아가서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하는 건지!
드라마에서 남주가 안전벨트 매줄 땐 그렇게 로맨틱해 보이던데, 아무 감정 없는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니 이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태훈이 벨트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다연은 급히 창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태훈이 벨트에 손을 대기 전에 재빨리 안전벨트를 당겼다.
“안전이 제일이죠. 어머, 대표님은 아직도 벨트 안 매셨어요?”
괜히 호들갑을 떨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자 태훈이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벨트를 맸고, 고비를 넘긴 다연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두 번씩이나 거절당한 태훈은 몹시도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열어주는 차에 타고 싶어 안달인 여자들이, 안전벨트 매달라고 애교 부리는 여자들이 한 트럭인데, 다연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아예 자신을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했다.
자신과는 손끝도 닿지 않으려는 듯 거대한 철벽을 치는 것만 같았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태훈을 창밖을 보며 미소 짓는 다연을 비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
K 호텔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호텔에는 꽤 많은 투숙객이 오가고 있었다.
예약을 해둔 덕에 태훈과 다연은 곧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과 함께 분위기 좋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팔짱을 낀 연인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커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다음에 태준 씨한테 여기서 데이트 하자고 해야겠다.’
너무 예쁜 분위기를 보자, 다연은 자연스럽게 태준이 떠올랐다.
오늘은 아쉽게 데이트를 하지 못하게 됐지만, 다음엔 이런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싶었다.
“베이커리 좀 보고 올까요?”
“예. 보니까 다쿠아즈랑 망고 빙수가 새로 나온 것 같아요.”
“이 호텔이 원래 다쿠아즈가 유명하죠?”
“네. 여기 파티시에님들 솜씨가 정말 좋아요. 여기 다쿠아즈를 온종일 먹으려고 호텔에 투숙하는 손님이 있을 정도래요.”
다행히 호텔에 오자 태훈은 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고, 둘은 자연스럽게 일 얘기를 할 수 있었다.
K 호텔은 호텔의 수준이나 서비스도 좋았지만, 베이커리가 유명한 곳이었다. 고급스러운 호텔 베이커리를 선도해 나갈 정도였고, 디저트 카페를 준비 중인 에서 배울 점이 참 많은 곳이었다.
베이커리를 둘러본 두 사람은 새로 나온 메뉴와 평소 먹고 싶었던 다쿠아즈 몇 개를 골랐다.
자리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태훈은 어딘가를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다연을 안내했다.
“저기 앉을까요?”
“예.”
빨리 베이커리 맛을 보고 싶었던 다연은 별다른 경계심 없이 태훈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호텔 직원이 음료와 함께 그들이 골라둔 디저트를 가져왔다.
“와. 맛있겠다.”
예쁜 접시에 맛깔스럽게 올려져 있는 케이크와 다쿠아즈를 보자 침이 절로 고였다.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다쿠아즈를 빨리 먹고 싶었던 다연은 얼른 접시를 집어 들었다. 초콜릿 맛 다쿠아즈를 손에 들자 폭신폭신한 촉감과 함에 달콤한 향이 진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달달함에 취한 다연은 손에 든 다쿠아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초콜릿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감미로운 빵이 입안에서 살살 녹아버렸다. 입안에 달콤함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으음. 맛있다.”
순식간에 초콜릿 다쿠아즈 하나를 먹어버린 다연은 산딸기 다쿠아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쿠아즈를 집으려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작은 대표님?”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다연과 눈이 마주친 태준은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걸 감지하지 못한 다연은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태준의 앞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태준 씨,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세요?”
여자의 맑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연은 입안의 달콤함이 싹 사라지고 쓴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