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퇴근 준비를 마친 태준은 유리 너머로 다연의 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6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다연은 퇴근 준비를 하기는커녕 모니터를 보며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퇴근 안 해?”
태준이 밖으로 나오며 묻자, 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아, 먼저 퇴근할래요?”
“오늘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태준은 같이 퇴근하고 싶다는 눈빛을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마치 산책가자며 꼬리를 흔드는 대형견처럼 귀엽지만 애처로운 눈빛을 말이다.
하지만 다연은 애써 그의 눈빛을 피하며 책상 위의 자료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요리는 정말 힘든 것 같아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니까요.”
“연습하다가 갈 거야?”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내내 메뉴개발만 하면 됐지만, 다연은 아니었다.
온종일 비서 업무를 봐야 했기에, 퇴근 후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황은 이해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태준은 고역이었다. 매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에 지친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다연아, 그러지 말고 비서를 새로 뽑…….”
“안 돼요!”
그래서 벌써 몇 번이나 비서를 뽑자고 제안을 했지만, 다연은 번번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나, 둘 다 할 수 있어요. 하게 해줘요. 네?”
다연은 제 자리를 넘보는 주은을 떠올리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사실 주은이 비서로 들어온다 한들 마음이 흔들릴 태준이 아니었다. 다만, 제 레시피를 훔친 그녀가 자신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나쁠 뿐.
그래서 다연은 비서 업무와 레시피 개발 모두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었다. 보란 듯이, 아주 잘!
이런 다연의 속마음을 모르는 태준은 안타깝기만 했다.
다연이 비서로서 또 메뉴개발팀원으로서의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둘 다 너무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사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웠지만, 남자 친구로서는 불만족스러웠다.
벌써 며칠째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은 물론, 보드라운 그녀의 살 내음을 맡아본 지도 오래 되었다. 그나마 같은 공간에 있으니 오가며 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요.”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지. 태준은 결국 다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녀를 응원하는 쪽을 택했다.
“도와줄까?”
“아니요.”
그런데 고집스러운 여자친구는 자신의 도움까지 거부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요. 요리 천재 남자친구 등에 업고 레시피 개발하는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 않아요.”
다연은 그 누구보다 공정하게 겨루고 싶었다. 그래서 너희는 내 레시피를 훔쳐가도 절대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입사 후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던 주은과 박 팀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대충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대신, 외박은 안 돼.”
며칠 전, 집에 가기 피곤하다며 숙직실에서 잔다는 그녀를 겨우 뜯어말려 집에 데려다준 적이 있었던 태준은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네. 집에 꼭 들어갈게요.”
“그래. 집에 갈 때 전화하고.”
태준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다연이 그를 불렀다.
“저기, 태준 씨.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내일?”
다시금 태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커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오랜만에 데이트하자고요.”
“데이트?”
데이트라는 말에 커다란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시간 없어요?”
“아니. 시간 없어도 있어.”
“치, 그게 뭐야?”
다연이 예쁘게 웃자, 태준이 같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데이트를 위해 두 사람은 각자 머릿속에서 할 일을 떠올렸다.
다연은 비서 업무와 함께 최종 메뉴 선정을 해야 했고, 태준은 다연이 좋아할 만한 레스토랑 예약을 해야 했다.
아무래도 데이트 전까지 바쁘게 보낼 것 같았다.
***
다음 날.
임원 회의가 있던 태준은 회의실을 찾았다. 일찍 퇴근하기 위해 30분 먼저 도착해 회의 자료를 훑어보던 그는 각 가맹점의 매출 자료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계산이 틀린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도 어려웠다. 서태훈 대표 부속실에 있는 똑똑한 직원들이 이깟 산수를 못 할 리가 없을 테니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태훈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벌써 왔네?”
“어. 근데 형. 어째 가맹점 매출 자료가 다 틀린 것 같아.”
“어? 서, 설마 그럴 리가.”
“아냐. 이것 봐봐.”
“그, 그러네. 계산을 잘 못 했나?”
태훈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태준은 흔들리는 태훈의 눈빛을 보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형이 회삿돈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태준은 들고 있던 자료를 책상 위에 휙 던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회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
“무, 무슨 소리야?”
“내 회사인데,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태준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한 태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은 겉으로 보기엔 태준과 태훈이 합심해서 세운 회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태준의 힘으로 세운 회사였다.
그가 개발한 레시피로 시작한 테이블 네 개짜리의 작은 한식당이었던 은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점점 사업을 넓히며 분점을 내기 시작했고, 이쪽이 돈이 되는 걸 알아본 태훈이 뒤늦게 합류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태준이 하얀 쌀밥부터 갈비에 잡채 그리고 소고기뭇국까지 잘 차려놓은 식탁에 태훈이 수저만 달랑 들고 상석에 앉은 꼴이랄까?
그동안은 요리 공부한다는 핑계로 다른 나라를 전전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엄연히 회사의 대표는 태준이었고, 대표로서 알건 알아야 했고, 틀린 건 바로잡아야 했다. 그게 아무리 형이라도.
“오늘 회의는 다음 주로 미루자. 임원 회의인데 덧셈 뺄셈도 제대로 안 된 자료로 회의할 순 없잖아?”
태준이 나가자 태훈은 매출 자료를 훑어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찢어버렸다.
“재수 없는 자식!”
매서운 태훈의 눈이 유리 너머 태준에게 향해 있었다.
아무리 지가 회사 대표라고 해도 내가 형인데 항상 이딴 식으로 무안을 주는 건지!
저놈은 어렸을 때부터 저런 식이었다. 꼭 뒤늦게 나타나서 제멋대로 바꾸고 남의 세상을 마구 흔들어댔다.
어렸을 때 태준 때문에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아직도 태훈은 그때를 떠올리면 끔찍하기만 했다. 집안 어른들에게 형제는 서로의 비교의 대상이었다.
“태준이는 S대 의대 수석이야! 넌 도대체 뭘 한 거야? 재수까지 해놓고 겨우 지방대? 이러려면 때려치워!”
“우리 가문에서 너같이 멍청한 놈은 처음이다!”
“가업을 이끌어갈 사람은 태준이 아니라, 장자인 너야! 그런데 왜 이 모양인 거야!”
“넌 도대체 태준이보다 나은 게 뭐냐? 공부를 잘하길 해, 운동을 잘하길 해! 하다 하다 이제 사업도 태준이한테 밀려?”
“언제까지 태준이 밑에 있을 거야? 어떻게든 태준이를 이겨보라고!”
아버지에게 태훈은 태준이보다 못한 멍청한 놈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동생을 이겨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며칠 밤을 새워도 봤다. 졸릴 때마다 제 손을 물어뜯으며 샤프 촉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잠을 쫓아냈다. 하지만 전교를 넘어 전국에서 노는 태준을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지만, 그에게 있는 건 허울뿐인 대표 직함이었다.
태훈은 제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동생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더 쉬운 방법은 따로 있었다. 그냥 동생의 것을 뺏으면 된다.
그게 회사든 여자든.
“오늘 저녁 데이트 안 잊었지?”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해요?”
태훈은 유리 너머로 태준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다연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 뜻대로 저 녀석을 이겨드릴게요. 이제야 저 녀석의 약점을 알았거든요.”
비릿한 미소를 짓던 태훈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태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 나쁜 표정을 지우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작은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요즘 제가 연락이 뜸했죠?”
다연과의 데이트를 준비하고 나온 태준의 의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전에 태준이 일찍 끝나면 연락 달라고 하셨잖아요. 예.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아요.”
맞선 보러 나가기에도 손색이 없는 의상이었다.
“이따 전화 한 번 해보세요. 제가 연락드린 건 비밀로 해주시고요. 예. 나중에 찾아뵐게요.”
통화를 마친 태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의 데이트를 위해 다연은 오늘 하루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약속 시각에 1분이라도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일한 보람이 있었다.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연의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메신저 상대는 다름 아닌 유미였다.
-거꾸로 해도 연다연!
-응, 언니. 왜?
-회의 잡혔어.
-응? 회의? 갑자기 웬 회의?
-몰라. 메뉴개발팀 전원 모이래. 너도 포함.
이런 십팔 색 크레파스 같은 상황이 있나! 양심적으로 퇴근 10분 전에 회의 잡기 있어?
다급해진 다연의 손이 빠르게 타자를 두드렸다.
-급한 거야?
-모르지만, 중요한 얘기 하려는 거 아닐까?
-중요한 얘기?
-최종 레시피 경연 있기 전에 하는 마지막 회의니까, 뭔가 있지 않을까?
하긴 다음 주에는 최종 후보자들의 마지막 관문인 요리 경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 전에 하는 마지막 회의이니 분명 중요한 공지가 있을 것 같긴 했다.
-암튼 빨리 와.
-으응.
대화를 마친 다연은 유리 너머 태준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잔뜩 기대감이 부푼 그는 컴퓨터를 끄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아. 회의가 오래 걸리진 않겠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태준이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에서 나왔다.
“갈까? 레스토랑 예약해뒀어.”
“저기…….”
“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메뉴개발팀 회의가 잡혔어요.”
다연의 말에 태준은 시계를 보며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무슨 회의?”
“저도 모르겠어요.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얼른 가봐.”
다행히 태준은 다연을 이해해주었다. 무슨 회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급히 잡힌 거면 급한 일이겠지.
“기다리고 있을게.”
“연락할게요.”
다연은 핸드폰과 필기도구를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태준은 소파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 한 번 하기 어렵네.”
***
회의실에 모인 지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팀장들이 오지 않는 바람에 회의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뭐야? 왜 이렇게 안 와?”
“그러게.”
다연은 시계만 보며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목을 쭉 빼고 누가 오나 지켜보고 있을 때, 태훈의 비서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큰 대표님이랑 팀장님들 얘기 중이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얼마나요?”
마음 급한 다연이 묻자, 비서가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한 30분이면 될 것 같은데요.”
비서의 대답에 다연은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이미 30분이나 지났고, 또 30분 후에 회의하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었다. 마냥 기다리라고 할 수 없었던 다연은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 끝났어?
“아뇨. 아직 회의 시작도 못 했어요. 아무래도 오늘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미안해요.”
-미안하긴. 갑자기 회의가 잡힌 건데.
“어떡해요? 레스토랑 예약했다면서요.”
-취소하면 돼. 데이트는 다음으로 미루자.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 오랜만에 데이트 약속이었는데.”
-괜찮아. 대신 다음에 찐하게 놀자.
다연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태준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런 천사 남자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집에 가서 쉬어요.
“그래. 회의 잘하고. 끝나면 전화해.”
전화를 끊은 태준은 가만히 앉아 다연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는데도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힘들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
“하아. 내 애인 너무 바쁘네.”
그냥 집에 가기 싫었던 태준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다연을 기다리기로 했다. ‘회의 끝나고 오면 서프라이즈 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예. 어머니. 지금요?”
태준의 어머니, 박 여사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