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음 날.
회의실에 모인 다연과 직원들은 메뉴개발은 물론 비서 대행에 기사 역할까지 도맡은 ‘불쌍한’ 연다연 대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박! 그런 일이 있었어?”
“작은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셨다.”
“큰 대표님이 회사에서 지원해 줄 테니까 다연이 힘들게 하지 말고 기사 고용하라는 데도 막무가내였다니까.”
과장된 유미의 표현에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쯧쯧쯧 하고는 혀를 차며 다연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
“다연이가 근무 외 수당 쳐달라고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무료 봉사할 뻔했다니까.”
“그럼 연 대리, 졸지에 비서에 기사 노릇까지 하는 거야?”
“네…… 뭐 그렇게 됐어요.”
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불쌍한 직원을 사골까지 우려먹는 나쁜 상사라는 꼬리표 달리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너 정말 괜찮아? 안 피곤해?”
“어. 정말 괜찮고, 전혀 안 피곤해.
그러니까 언니, 제발 그만 좀 해.
“새벽같이 일어나서 픽업하고, 집에는 늦게 들어가는데 안 피곤하다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나도 좋은 차 타고 출근하니까 좋지, 뭐.”
“그깟 운전이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저렇게 엄살인지.”
그때 어디선가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강주은 대리가 다연의 무리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평소 주은에게 좋은 감정이 없던 유미가 나서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렇잖아? 비서 업무야 메뉴개발팀 일 대신에 해서 하는 거고, 고작해야 운전 좀 하는 건데 뭐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는지. 누가 보면 우리 회사 일은 전부 연 대리가 하는 줄 알겠어?”
주은이 배배 꼬인 투로 말하자, 유미가 피식 웃으며 맞대응에 나섰다.
“하긴. 매번 남의 레시피나 뺏어서 지 것처럼 발표하는 누구는 일하는 게 우습겠지.”
“뭐?”
“다른 사람이 다 해놓은 거 홀랑 훔치기만 해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를 거야. 안 그래, 강 대리?”
유미가 한 방 먹이자,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주은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말 다 했어?”
“야아? 이게 얻다 대고 ‘야’래?”
한 살 많은 유미가 한 대 칠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다연이 그녀를 붙잡으며 말렸다.
“언니, 그만해. 강 대리, 너도 그만하고.”
“야, 연 대리!”
주은은 말리는 다연을 붙잡으며 시비조로 물었다.
“네가 그랬냐? 내가 네 레시피 훔쳤다고?”
날카로운 주은의 목소리에 순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다연은 주위를 힐끔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네가 소문 안 냈으면 박 대리가 왜 저런 말을 나불거리는데!”
신경질적인 주은의 반응에 유미가 나서려고 하자, 다연이 그녀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주은에게 다가갔다.
“강주은 대리.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사람들이 아는 줄 알아?”
다연은 그동안 있던 일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메뉴개발팀에 들어간 다연은 미친 듯이 일했다. 어떤 게 맛있는지, 어떻게 요리해야 사람들이 좋아할지 밤새도록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하지만 막상 발표하기 전에 자신의 레시피는 팀 내에서 돌고 있었고, 그게 주은의 짓이라는 걸 알아냈다.
박 팀장에게 말해봤지만, ‘같은 팀원이면 같이 만든 거 아니냐’, ‘좋은 게 좋은 거다’, ‘어차피 우린 팀이니까 상관없지 않느냐?’라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이나 퍼트린 사람 취급을 하는 건지.
“네가 말을 안 했는데 박유미가 어떻게 아냐고!”
“궁금하면 나한테 묻지 말고, 너 자신한테 물어봐.”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다연이 말을 끝내고 자리를 정리하려고 하자, 주은이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야! 연다연. 내 말 안 들려? 박유미가 어떻게 알았냐고!”
“정말 듣고 싶어?”
“어. 듣고 싶어.”
단호한 대답에 다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 주사 고쳐야겠더라?”
“뭐?”
“난 네가 내 레시피를 훔쳐서 대리로 승진할 때에도, 나 대신 네가 성과급 받을 때도, 포상휴가 받았을 때도 유미 언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주은은 눈이 찢어질 정도로 다연을 노려봤고, 다연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술만 마시면 네가 다 나불댔으니까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거든.”
“뭐, 뭐? 내가 언제?”
주은은 제 살은 제가 다 깎아 먹는 타입이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주저리주저리 제 입으로 떠드는 통에 다연은 굳이 제 입을 더럽히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지금 누굴 의심하는지.
“기억 안 나면 같이 술 마신 사람들한테 물어봐. 네가 취해서 무슨 말을 하고 다녔는지.”
“…….”
제 주사를 알고 있는 주은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회의실 유리 너머로 다른 직원들과 태준과 태훈이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주은은 분한 듯 다연은 노려보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두 대표의 등장에 회의가 시작됐지만, 주은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연은 그런 주은을 힐끔 쳐다보고 이내 관심을 끄고 회의에 집중했다. 오늘 다연은 서태준 대표의 비서가 아닌 메뉴개발팀원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중이었고, 그녀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주은 때문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런 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정성껏 준비한 레시피가 최종 후보에 오르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 훌륭한 레시피를 제출하셔서 저와 서태준 대표가 최종 후보를 뽑는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레시피를 제출한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상태로 태훈을 주목했다.
“최종 레시피 후보는 모두 3팀입니다.”
팀?
개인적으로 레시피를 제출했던 다연은 ‘팀’이라는 말에 마음을 졸였다.
거기다 옆자리에서 자신을 보며 히죽거리는 박 팀장과 강주은 대리의 얼굴을 보자, 자신감마저 하락하는 것 같았다.
다연은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고 발표를 기다렸다.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레시피는 다시 만들면 되잖아.’
레시피는 다시 만들면 되지만, 자신감이 떨어지면 다시 회복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연은 무엇보다 멘탈 잡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다연의 두 손에는 축축할 정도로 땀이 뱄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먼저 첫 번째 후보는 메뉴개발 1팀의 <촉촉 보쌈>입니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다연의 귀를 때렸다. 가슴은 더 세차게 뛰었고, 등 뒤로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
곧 두 번째 후보 발표가 이어졌다.
“두 번째 팀은 메뉴개발 3팀의 <너도 나도 쌈밥>입니다.”
박 팀장과 강주은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고, 유미는 그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짜증난다. 저거 네가 제출했던 레시피잖아. 거머리 같은 것들.”
다연이 단독으로 레시피를 낸다고 했던 건, 바로 저 쌈밥 메뉴 때문이었다.
박 팀장과 주은은 다연이 만든 레시피를 그녀의 이름은 쏙 빼고 자신들의 이름을 메인 개발자로 올렸다. 그 사실을 안 다연이 화가 나서 따로 레시피를 개발했고, 개인으로 제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팀원들은 제 편이 아니었다. 다연이 억울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주은과 박 팀장이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다연 개인이 아닌 자신이 속해 있는 팀이 잘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모든 팀원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던 건, 최종 후보에 오를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타는 속을 애써서 달래고 있을 때,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레시피 발표하겠습니다.”
다연은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박 팀장과 강주은 대리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레시피는 연다연 대리의 <나의 작은 밥상>입니다.”
다연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가만히 눈을 떴다.
축하해주는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질투하는 박 팀장과 강주은 대리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연의 눈에는 태준만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기뻐하는 그의 축하 메시지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다음 날.
오랜만에 유미와 함께 점심을 함께 먹은 다연은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셨다.
“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뭐긴? 최종 후보에 뽑혔다고 끝난 게 아니잖아.”
그건 다연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 ‘후보’일 뿐이다.
최종 후보 3팀은 각 레시피를 보완해서 직접 요리를 만들어 회사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한다. 시식 후, 임원과 대표가 직원들의 투표를 토대로 최종 레시피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근데 넌 지금 레시피 보완은커녕 비서 대행에 기사 노릇까지 하고 있잖아. 어느 세월에 레시피 보완하고 요리 연습할 건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러지 말고 비서 새로 뽑아달라고 해.”
“뭐? 비서를?”
유미의 말에 다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어차피 넌 비서 대행이잖아. 말 그대로 정식 비서 뽑기 전에 잠시 대행하는 거 아냐?”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다연의 역할은 정식 비서를 뽑기 전까지 잠시 태준을 돕는 것뿐이었으니까.
“이참에 비서니 기사니 하는 것들 확 그만두고 네 일을 하라고. 솔직히 네가 직접 만든 레시피를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게 네 꿈이잖아.”
그랬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으니까.
“그럼 그럴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때, 웬 인영이 다연의 머리 위를 덮었다. 강주은 대리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다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 대리. 운전이 체질인가 봐? 얼굴 좋아 보인다?”
어제 다연에게 그렇게 당했는데도 꿋꿋하게 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멘탈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다연은 커피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그래? 근데 강 대리는 메뉴개발팀이 체질에 잘 안 맞나봐?”
“무슨 소리야?”
“얼굴이 영 안 좋아 보인다. 어제 그러고 나서 잠 못 잤어? 피부 관리 좀 해라. 얼굴이 그게 뭐니?”
다연은 붉으락푸르락한 주은을 보며 같잖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왜 매번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을 거는 건지. 하지만 주은은 이내 멘탈을 잡고 다시 물었다.
“너 요즘 많이 피곤하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친절하게 묻는 건지.
다연은 경계를 풀지 않고 떨떠름한 얼굴로 주은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은이 여우같은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너 대신 내가 작은 대표님 비서로 일하면 어떨지 제안 드려보려고.”
“뭐?”
“그렇잖아? 어차피 비서 대행은 메뉴개발팀원이면 상관없다고 했고, 애석하게도 넌 레시피 개발 때문에 바쁘고. 너 대신에 내가 해줄게. 작은 대표님 비서.”
비릿하게 웃는 주은을 보자, 회식 때 태준에게 달라붙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태준의 사심을 사려고 온갖 애교를 부리던 그 모습에 다연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