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설마…… 나더러 저걸 입으라는 건 아니겠지?
태준의 손에 들려있는 옷을 본 순간 다연의 눈에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 그녀와 달리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옷을 건넸다.
“갈아입어.”
“이걸 입으라는 거예요?”
“왜? 싫어?”
“싫다기보다는…… 이거 대표님 옷이잖아요.”
그랬다. 태준이 가져온 옷은 다름 아닌 그의 셔츠였다.
다연은 차마 잘 다려져 있는 새하얀색 고급 셔츠를 잠옷으로 입을 수 없었다. 밥 먹을 때 음식이 튈 수도 있고, 옷이 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값비싼 그의 구두를 자신의 집 지킴이로 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셔츠마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난 상관없어.”
“그래도요. 하얀 옷에 뭐라도 흘리면 어떡해요?”
“그럼 검은색 셔츠 갖다 줄까? 근데 리넨 소재라서 속이 비칠 수도…….”
“됐어요! 주세요, 입을게요!”
태준의 응큼한 농담에, 다연은 눈을 흘기며 그의 손에 들린 옷을 낚아챘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저 남자.
처음에 만났을 땐 순진한 눈빛으로 커다란 강아지처럼 꼬리만 겨우 살랑살랑 흔들면서 내 눈치를 살폈는데, 이젠 머리 꼭대기에 앉아 냥펀치를 날리고 있다니.
“엉큼해진 거 알아요?”
“나 원래 엉큼했어.”
“자랑이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내 셔츠 들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태준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하자, 다연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뭐, 뭐요?”
“내가…… 갈아 입혀줄까?”
“됐어요! 내가 해요, 내가!”
다연은 다가오는 태준을 피해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근, 두근.
그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걸어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지.
“휴우. 저 얼굴로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지, 반칙이야.”
다연은 속절없이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서태준…… 너무 좋다. 좋아도 너무 좋아!
***
옷을 갈아입은 다연은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원피스를 입고 와서 할 수 없이 다 벗을 수밖에 없었는데, 또 막상 셔츠만 걸치기엔 너무 노출이 심한 것 같았다.
커다란 셔츠가 그녀의 몸을 다 가려주고 있긴 했지만, 살짝 비치는 속옷과 셔츠 밑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다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 나가도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밖에서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연아, 밥 먹자.”
“자, 잠깐만요.”
“빨리 나와. 음식 식는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요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다연은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셔츠 끝을 끌어 내리며 밖으로 나갔다.
“뒤돌아보지 말아요.”
“보고 싶은데?”
“안 돼요.”
“일단 밥부터 먹자.”
다연은 그가 돌아보기 전에 얼른 식탁 앞에 앉아버렸다.
집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다연은 요리하는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요리하는 남자의 모습은 섹시하다. 아니지. 서태준이라서 섹시한 건가?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나를 위해 요리하는 남자, 요리를 기다리는 나. 맛있게 먹는 우리.
바로 다연이 꿈꾸던 미래였다. 꿈꾸던 미래가 눈앞의 현실로 보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다 됐다.”
완성된 요리를 본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가져온 요리는 식빵 피자였다.
식빵 끄트머리를 자른 후 달달 볶은 소시지와 양파를 얹고 케첩을 뿌린 뒤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올린, 다연이 제일 좋아하는 소울 푸드였다.
“우와. 신기하다!”
태준이 테이블 위에 식빵 피자를 올려놓자, 다연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나, 이거 되게 좋아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식빵 피자라고 하면 사족을 못 썼어요!”
다연의 격한 반응에 태준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걸 그렇게나 좋아했어?”
“사실 내가 먹은 첫 피자가 이거였거든요.”
테이블에 놓인 식빵 피자를 본 다연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간 듯 추억에 젖었다.
“옛날에 엄마가 부잣집 별장 관리를 하신 적이 있었어요.”
공기 좋고 산 좋은 경기도에 살 때였다. 다연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다연의 엄마는 아이들과 숙식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했다.
작은 주방과 화장실에 딸린 별장 관리실은 넓지는 않지만 세 식구가 지낼 정도의 크기였고, 서울에 사는 별장 주인은 끽해야 몇 달에 한두 번 찾아와 깐깐하게 굴지도 않았다. 별장 일은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었고, 아직 어린 자식들과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겨울 방학 때였나? 별장 주인 아들이 온 적 있었어요.”
고급스러운 차를 타고 온 주인 아들은 깔끔했고 정말 잘생겼었지만, 다연의 머릿속에는 주인 아들이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박스만 눈에 들어올 뿐.
“근데 주인 아들이 오면서 피자를 사 온 거예요. 살면서 피자를 처음 봤는데, 와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태준이 피자를 잘 자른 후 모차렐라 치즈를 주욱 늘려 다연의 접시에 먹기 좋게 놔주자, 흥분한 다연이 피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래, 이 치즈! 어린 마음에 이걸 보고 어찌나 먹고 싶었는지!”
“좀 달라고 하지?”
“엄마한테 혼날 일 있어요? 주인집 근처에 가기만 해도 혼났는데.”
“그래서? 결국, 피자는 못 먹었어?”
태준이 묻자, 다연은 떼르륵 눈동자를 굴려 그때 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아뇨, 먹었어요.”
“어떻게?”
태준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두둥실 떠올랐다.
“다들 잠든 사이에 내다 버린 피자 박스를 뒤졌어요. 혹시 남은 게 있나 싶어서. 근데 그걸 별장 오빠가 본 거예요. 아, 별장 주인 아들을 별장 오빠라고 불렀어요.”
별장 오빠……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근데 뭐 이미 피자는 다 먹고 없지, 난 피자 먹고 싶다고 징징 짜지. 어떻게 됐는 줄 알아요?”
“어떻게 됐는데?”
“우는 내가 너무 안 돼 보였는지, 그 오빠가 결국 피자를 만들어줬어요.”
다연은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듯 피식거렸다.
“근데 그 오빠도 생전 피자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아니, 요리 자체를 처음 해본 것 같았어요. 하긴 부잣집 도련님이 라면도 안 끓여 봤을 걸요?”
식빵에 케첩을 뿌리고 소시지에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프라이팬에 익힌 것이, 다연이 생에 처음 먹어본 피자였다.
“식빵 바닥이 새카맣게 탔는데도 난 그게 왜 그렇게 맛있는지, 또 해달라고 계속 졸랐다니까요.”
어설프게 만든 피자였지만, 다연은 식빵 피자 한 조각으로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오, 이것도 똑같았어요!”
다연은 식빵 위에 얹어져 있는 깻잎을 보며 소리쳤다.
“피자 흉내 내보겠다고 이것저것 다 넣다가 푸른색이 부족했다고 느꼈나 봐요. 갑자기 냉장고에서 깻잎을 꺼내 와서 피자에 얹는 거예요. 꼭 이것처럼.”
모양도 어색했고 맛도 엉성했지만, 그녀가 먹어본 그 어떤 것보다 맛있었다.
“내가 식빵 피자 먹고 그 오빠한테 한 말이 뭔 줄 알아요?”
‘오빠, 나랑 결혼하자!’
“‘오빠, 나랑 결혼하자.’였어요.”
호호호. 웃는 다연의 얼굴 위로 13년 전 꼬맹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앙큼한 소녀는 공부밖에 모르던 순진한 소년에게 프러포즈와 함께 입맞춤을 해왔다.
너무 놀란 소년은 소파 위로 쓰러졌고, 소녀는 맞댄 입술을 꾹 누르며 그의 첫 키스를 빼앗았다.
‘어? 오빠 입술에 케첩 묻었다.’
입맞춤의 증거인 케첩을 알뜰하게 핥아먹기까지.
당혹스러움과 동시에 가슴이 뛰었다. 집, 학교, 학원 그리고 독서실밖에 모르던 지독한 공붓벌레의 세상은, 아찔한 첫 키스와 동시에 연다연이라는 소녀로 세상이 변해버렸다.
나의 첫 키스를 빼앗은 여자, 나의 동정을 가져간 여자, 내 마음을 지배한 여자. 내 세상, 연다연.
하지만 겨울이 채 다 가시기도 전에 태준은 그의 세상을 잃어야 했고, 다연을 품은 채 13년을 살았다. 내일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매일 밤 악몽을 견디며.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했다.
그의 처음을 가져갈 만큼 여전히 앙큼했고, 여전히 해맑았고, 여전히 그를 정신없이 홀렸다. 그리고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태준은 행복했다. 앞으로도 딱 지금만큼만 행복했으면 좋을 만큼.
“와. 어떻게 바질 대신 깻잎 올린 것도 똑같지?”
신기하다는 듯 식빵 피자를 베어 문 다연의 입술에 빨간 케첩이 묻었다.
티슈를 뽑아 그녀의 입술을 닦아주려던 태준은 13년 전을 떠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연아.”
“예?”
“입술에 케첩 묻었어.”
“응? 어디요?”
다연은 케첩을 핥아먹기 위해 작은 혀를 내밀었지만,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케첩은 여전히 그녀의 입술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 아닌데.”
“응? 그럼?”
붉은 입술을 핥는 작은 혀가 왜 이렇게 관능적인지, 태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가볍게 맞닿더니, 태준의 혀가 다연의 입술 위에 묻은 케첩을 핥았다.
“맛있네.”
“뭐예요.”
크크큭 하고 웃는 다연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고, 혀끝으로 전해지는 케첩 맛이 그의 미각을, 부드러운 다연의 입술이 그의 촉각을, 그리고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 다연의 모습이 그의 시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널 요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