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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26화 (26/74)

26화

“앞으로 내 차 좀 운전해줘.”

태준의 말에 다연의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아까 분명 회사 사람들에게 우리 둘 사이를 들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태준의 파격적인 명령에 태훈은 말할 것도 없고 유미와 다른 직원들까지 모두 다연을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왜 대표님 차를 운전해야 하죠?”

태준과 눈이 마주친 다연은 온갖 눈짓을 다 하며 제대로 대답하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한국 러시아워가 너무 심해서 운전하기 힘들더라고.”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

“한국에 오기 바로 직전에 영국에 있었는데, 운전석 위치가 바뀌니까 불편하더라고.”

아까 보니까 아주 베스트 드라이버가 따로 없던데?

“한국 도로에 적응할 때까지만 연 비서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어때?”

느른한 말투와 달리 빠르게 깜빡인 그의 윙크에 다연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왜 하필 직원들이 많은 지금 그런 말을 하는지.

직원들에게는 들키지 말아야겠고. 출퇴근은 같이 하고 싶고. 사심을 채우기 위해 비서 대행을 기사 대행으로까지 알뜰하게 사용하시겠다?

자신이 차에서 내린 후, 그가 얼마나 머리를 많이 굴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잔머리가 밉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 잔머리를 굴리는 그가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다연은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퇴근부터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이제 태준과 다연은 같이 출퇴근을 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도로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회사 대표가 비서에게 운전을 부탁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면 기사를 고용하지 그래?”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태훈이 나선 것이었다.

“안 그래도 비서 업무도 처음인 사람한테 운전까지 맡기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태준은 다연을 생각하는 척 끼어드는 태훈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내 여자 걱정을 왜 다른 사람이 하는지 모르겠다.

“잠시만 부탁하는 거야. 내가 운전에 적응할 때까지만.”

“그냥 기사 고용해. 회사에서 다 지원해 줄 건데, 뭐 하러 사람 피곤하게 해?”

“길어봐야 한 달이야. 사람 고용했다가 해고하는 것도 민폐고.”

“그래도 연 비서가…….”

“전 괜찮습니다. 큰 대표님.”

태준과 태훈의 신경전이 길어지자 다연이 나섰다.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둘 다 멈추지 않을 것 같았고, 직원들 앞에서 두 대표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 비서, 지금도 힘들잖아. 괜찮겠어요?”

걱정 가득한 태훈의 물음에 다연은 확실하게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작은 대표님 말씀대로 길어봐야 한 달인걸요. 아, 근데 근무 외 수당 쳐주실 거죠?”

다연이 농담과 함께 상황을 정리하자, 태준은 미소를 지었고 태훈은 얼굴을 구겼다.

***

일을 마친 다연과 태준은 자연스럽게 함께 퇴근 준비를 마쳤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지하 주차장을 향했지만,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이 이미 회사에 쫙 퍼졌기 때문이었다.

유미의 소식통에 의하면 다연은 비서 대행에 기사 역할까지 해야 하는 불쌍한 직원이 되어 동정표를 받고 있다고 했고, 태준은 불쌍한 직원을 부려먹는 악덕 대표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직원들은 거기서 한 마디씩 덧붙였다고.

내 몸이 부서져도 좋으니 나도 서태준 대표님 출퇴근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비서나 기사는 물론 가사 도우미까지 해줄 수도 있다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다연은 뒷좌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시죠, 대표님.”

혹시나 볼 수도 있는 눈을 의식해 기사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연 비서. 난 뒷좌석에 못 타.”

“왜 못 타시죠?”

“뒷좌석에 타면 멀미하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찡긋 눈짓을 보내자, 다연이 피식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윽. 이 귀여운 잔머리꾼.

다연은 배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가 탄 조수석 문을 닫아주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원래 앉던 자리를 바뀌었지만 다른 직원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운전 괜찮겠어?”

“왜요? 비싼 차에 흠집이라도 낼까 봐 걱정돼요?”

“아니. 회사 일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할 텐데 운전까지 시키려니 미안해서.”

“걱정 마요. 나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차가 없어서 못했을 뿐이지.”

태준의 걱정과 달리 운전대를 잡은 다연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태준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면허증…… 있는 거 맞지?”

“당연히 있죠.”

“무사고…… 맞지?”

“무사고는 맞는데, 딱지는 여러 번 끊었죠.”

“딱지? 무슨 딱지?”

태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다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과속이요. 꽉 잡아요.”

***

길이 뻥 뚫려있을 때도 30분은 족히 걸릴 거리를 20분 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에도 태준은 손잡이를 마치 생명줄처럼 꼬옥 잡고 있었다.

“내리세요.”

“다연아.”

“예?”

“다음부터 운전은 내가 할게.”

“왜요? 차가 쭉쭉 잘 나가는 게 나랑 딱인데.”

“나, 꿈이 있어.”

다연은 갑자기 웬 꿈 타령인가 싶어 잠자코 태준을 바라보았다.

“나 너랑 알콩달콩 오래오래 살고 싶어.”

태준은 ‘오래오래’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고, 다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밟지도 않았는데 엄살은.”

흘깃 눈을 흘기던 다연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저택에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여기가…….”

“맞아. 내 집이야.”

“혹시 부모님께 상속받거나 그런 거예요?”

젊은 나이에 제힘으로 산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다연은 저도 모르게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아니. 내 힘으로 산 내 집. 들렀다 갈 거지?”

“부모님은요?”

“따로 사셔.”

“그럼 이 큰 집에 혼자 사는 거예요?”

마당에 들어선 다연은 휘둥그레 뜬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푸릇한 잔디가 폭신하게 깔린 마당에는 예쁜 꽃과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던해 보이는 건물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거실에는 소파와 TV만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지만, 주방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과 불 조절이 가능한 가스레인지, 몹시도 예쁜 그릇과 찻잔이 찬장에 그득그득 들어 있었다.

“요리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다연이 조심스럽게 주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갈 거지?”

“아뇨. 집 구경하러 들른 거예요.”

그리고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회의가 잡힌 날이었다. 다연이 기다리던 최종 레시피 후보를 발표하는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회사 대표와 임원들이 최종 후보를 뽑은 터라, 태준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연은 그에게 결과를 미리 묻거나 궁금해 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사적인 관계를 공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직원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비밀에 부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집에 들렀다가 나 데리러 오려면 피곤하지 않겠어?”

태준의 집에서 다연의 오피스텔까지는 차로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같은 곳에서 자지 않는 이상, 매일같이 출퇴근을 함께 하는 건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연은 태준이 기사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매일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그저 함께 출퇴근하고 싶어 핑계 김에 한 말이려니 생각했다.

“내일은 좀 봐주시죠, 서태준 대표님.”

그런데 다연이 애교 섞인 투로 말하자, 태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그건 안 되겠는데, 연 비서.”

냉담한 그의 반응에 다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자 온 집안에 다연의 웃음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꺄아악! 뭐 하는 거예요?”

“맛있는 저녁 해줄게. 자고 가.”

백허그를 한 태준이 다연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옷이 없잖아요. 당장 잘 때 입을 옷도 없는데요?”

“…….”

“……?”

다연은 아무런 대답 없는 태준이 이상해 고개를 돌렸다. 자고 가라고 설득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뭐예요? 무슨 생각하는데 그렇게 웃는 거예요?”

“음…….”

“빨리 말해요.”

다연이 다그치자 태준이 수줍게 대답했다.

“난 네가 아무것도 안 입고 자도 좋은데…….”

“이럴 줄 알았어! 음란마귀!”

다연이 몸을 돌려 그의 가슴을 때리자, 태준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자고 갔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 조금이라도 잘 텐데.”

“치. 약았어.”

이 남자, 아무리 봐도 약았다. 이럴 때만 자기 약점을 드러내서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거 보면.

“입을 만한 옷 있어요?”

“드레스 룸에 있을 거야.”

“내일 똑같은 옷 입고 출근하기 싫은데.”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가 회사 사람들에게 시달린 날을 떠올리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내일 일찍 나가서 새로 사자. 아니면 지금 너희 집에 가서 옷 가져올까?”

입던 옷을 가져오는 게 제일 좋긴 했지만, 그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이삿짐센터를 부를 태세였다.

“내일 일찍 나가요. 갈아입을 옷 좀 주시겠어요?”

다연은 꽉 달라붙는 치마가 불편해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잠깐만.”

태준이 드레스 룸에 들어간 사이, 다연은 아까 보다만 주방을 구경했다.

그의 주방에는 꽤 큰 회사의 메뉴개발팀에 있는 다연이 보기에도 신기한 도구들이 많았다.

처음 보는 주방 도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태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연아.”

태준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다연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옷을 본 순간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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