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말했잖아. 물 닿는 건 뭐든 다 내가 해준다고.”
단호한 그의 말에 다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도, 능글거리는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걱정하는 진심이 담겨 있을 뿐.
그의 진심을 알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무리 잠자리를 함께한 사이라고 해도 샤워까지는…… 워후! 상상했어!
낯 뜨거운 상상을 겨우 떨쳐낸 다연은 태준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아뇨. 이건 제가 할게요. 나 혼자!”
‘혼자’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한 뒤,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연이 사라진 자리. 혼자 남은 태준은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하아. 상상했어.”
음란마귀가 끼인 게 분명하다.
32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를 보고 동한 적 없던 그였다.
그를 잘 아는 인경은 태준을 보고 말하곤 했다. ‘오빤 아마 고자인 것 같아. 힘내!’라고.
그런데 다연을 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끌어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살을 비비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그녀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싶었다.
“안 되겠어. 휴가를 앞당기든가 해야겠어.”
아직 6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태준은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
다연이 화장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태준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가요.”
먼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 다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를 기다렸지만, 태준은 꽤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잠시만요.”
다연은 안에 타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버튼을 눌렀지만, 태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안 타요?”
출근 시간, 날카로운 사람들의 눈빛에 다연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놓아야만 했다.
“왜 안 나오지?”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된 다연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태준은 현과 앞에 우두커니 서서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나오고 뭐 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요?”
뜬금없이 뭐가 안 된다는 건지. 하지만 태준은 대답 대신 신발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열어봐도 돼?”
“신발장이요? 뭐, 상관은 없는데…….”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 다연은 그냥 그가 하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태준은 잘 정돈되어 있는 신발장을 쭉 둘러보더니 슬리퍼 하나를 꺼냈다.
“이거 신어도 왜?”
“여자 신발 신는 취미 있어요? 그걸 왜요?”
그가 꺼낸 신발은 검은색 바탕에 흰 줄 세 개가 그어져 있는 일명 삼선 슬리퍼였다. 주로 집 앞 편의점이나 서원이네 식당에 갈 때 신고 나가곤 했던 것이었다.
“안 돼?”
“아뇨. 신는 건 상관없는데, 왜 굳이……?”
“신어도 된다는 거지?”
“뭐 그렇긴 한데 작을 텐데…….”
그의 발은 족히 280mm는 넘어 보였고, 다연이 발은 240mm였다.
멀쩡하다 못해 몹시도 고급스러운 그의 구두가 버젓이 놓여 있는데, 왜 사이즈도 안 맞는 삼선 슬리퍼에 목을 매는지 알 수 없었다.
“작아도 상관없어.”
다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준은 얼른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가 작아 발이 반쯤 들어간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
“풉! 웃겨요. 그냥 구두 신으세요.”
“싫어. 이거 신고 출근할 거야.”
“예에? 그걸 신고 출근한다고요?”
슬리퍼 신고 출근하는 것도 눈에 띌 텐데, 굳이 왜 하필 여자 슬리퍼를 신고 가려는 걸까?
“그거 신고 출근하면 직원들이 다 쳐다볼걸요?”
“상관없어. 읏차.”
태준은 작은 슬리퍼에 커다란 발을 욱여넣은 뒤, 현관에 놓여있던 낡은 구두를 집어 들었다.
“어? 그건 왜……?”
가져가야 할 값비싼 제 구두는 두고 왜 헌 구두를 가져가려고 하는 건지.
“이제부터 이 집은 내 구두가 지켜.”
“예?”
“내 신발 외에 다른 남자 신발은 안 돼.”
설마 이것 때문에 내 슬리퍼를 신은 거야? 전 남친 신발이 내 집에 있는 게 싫어서?
잠시 멍했던 다연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를 향해 올라갔다. 가슴이 막 간질간질하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 저 남자. 왜 이렇게 좋지? 좋은데 더 좋다. 너무 좋아 미치겠다. 귀엽고 멋있고. 멋있는데 귀여워.
다연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헤벌쭉 웃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간 태준이 다시 들어와 말했다.
“아, 다훈이는 허락해 줄게.”
피식. 그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이 났다.
“빨리 와. 엘리베이터 왔다.”
연애하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연애하는 기분.
***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태준은 손끝에 걸려 있던 낡아 빠진 구두를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렸다.
그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구두를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노려보더니 자신의 차에 있는 블로퍼로 갈아 신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다연이 중얼거리자, 태준이 눈썹을 삐딱하게 세우며 물었다.
“왜? 저 신발에 미련이라도 남았어?”
“아뇨. 전혀.”
그럴 리가. 저 신발 주인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한데 미련은 무슨.
그저 자신의 집에 있는 그의 신발이 몹시도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럼? 뭘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거야?”
“태준 씨 구두, 그거 되게 비싸 보이던데.”
“응. 비싸. 이태리에서 산 거야.”
“그러니까요. 사실 그렇게 비싼 구두를 그냥 집 지키는 용으로 두는 게 아깝잖아요.”
“상관없어.”
네. 님은 상관없으시겠죠. 하지만 난 부담스럽다고요.
아직 물질적인 무언가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고 판단한 다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구두 한 켤레 사드려도 될까요?”
다연의 말에 태준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물론 우리 집에 둔 구두만큼 비싼 건 못 사드리겠지만 그래도…….”
“싫어.”
그의 마음 씀씀이에 성의를 보이려고 했던 다연은 단칼에 잘라버리는 태준의 태도에 당황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가 구두 사주는 거 싫다고.”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었다.
아니, 뭐 때문에? 왜? 굳이 ‘싫다’라고 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나?
칼 같은 그의 반응에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진 다연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왜요? 왜 제가 사드리는 건 싫다는 거죠?”
“그냥 싫어.”
뭐가 그렇게 싫은 건지, 태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사드릴 거예요.”
“싫어. 사줘도 안 신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허! 안 신어? 줘도 안 갖는다는 거야 뭐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다연은 그를 몰아붙였다.
“왜요? 제가 사드리는 건 싸구려라서 싫다는 거예요?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수제화가 아니라서 싫다는 거예요?”
흥분으로 뒤덮인 눈으로 씩씩거리며 태준을 노려보자, 그가 대답했다.
“신발 선물하면 헤어진다면서.”
“……예?”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다연은 얼이 빠졌다.
아니, 겨우 그런 이유로 선물을 거절했던 거야?
“전에 어디서 들었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신발을 선물하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라고.”
그건 다연도 아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건 근거 없는 일종의 미신 같은 거다. 그리고 그건 연인 사이에나 적용되는 말 아닌가? 우린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닌데…….
“일말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아.”
“……?”
“너랑 헤어지는 건 상상하기도 싫으니까.”
이거 무슨 뜻이지?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건가?
***
여린 빗줄기에 와이퍼가 느리게 움직였다.
조수석에 앉은 다연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까 태준이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너랑 헤어지는 건 상상하기도 싫으니까.”
“일말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아.”
저음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 심장에 빵빵하게 들어찬 기분이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저 남자, 내가 좋아해도 될까? 사랑해도 되는 걸까?
사실 이제 거칠 게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는 그가 바람둥이인 줄 알았고, 그가 원하는 게 섹스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오해였고, 지금은 모든 오해가 풀렸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걸릴 게 없지 않을까? 저 남자를 마음껏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저 멀리 회사 건물이 보였다. 깜짝 놀란 다연은 태준을 향해 외쳤다.
“대표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다급한 그녀의 말에 태준은 이유도 묻지 않고 차를 세웠다.
“전 여기서 걸어갈게요.”
“걸어서 가려면 꽤 걸릴 텐데?”
“같은 차 타고 출근하면 회사 사람들이 우리 둘 사이를 오해할 거예요.”
“오해?”
“네.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요.”
다연은 태준이 말리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럼 회사에서 봬요!”
“다연아……!”
뒤늦게 다연을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차에서 내린 후였다.
“비 맞는 거 싫어하면서…….”
태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빗속을 뛰고 있는 다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연은 같이 출근하는 걸 보면 회사 사람들이 우리 둘 사이를 오해할 거라고 했지만, 그들이 오해할 건 없었다.
그건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니까.
하지만 태준은 다연의 뜻대로 둘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 대신.
“같이 출퇴근할 핑계를 따로 만들어야겠군.”
***
회사 로비에 들어선 태준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다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태훈이 그녀 앞에 있던 것이었다.
며칠 전처럼 다정한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던 태훈은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연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빗물을 털어주려는 듯 태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빗물을 털어주려는 순간!
“야, 거꾸로 해도 연다연!”
출근 중이던 유미와 몇몇 직원들이 그녀를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바람에 태훈의 손이 갈 길을 잃어버렸다.
나이스! 박 대리!
태준은 유미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큰 대표님.”
“어머. 작은 대표님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태준과 태훈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다연의 옆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연은 유미와 다른 직원들에게 파묻혀 그들이 옆에 설 자리는 없었다.
태준은 엘리베이터에 탄 직원들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들으며 다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출근할 때 버스 타면 안 되겠어.”
“왜?”
“앞에 사고가 났는지 길이 엄청나게 막히더라고. 김 기사님, 오늘 엄청나게 막혔죠?”
유미는 태훈의 차를 운전하는 김 기사를 향해 물었다.
“출근 시간에는 아무래도 좀 일찍 움직이는 수밖에 없죠.”
“그렇죠? 차라리 지하철이 낫다니까. 제시간에 딱딱 오고 가고.”
“근데 지하철은 완전 지옥철이잖아. 사람 너무 많아.”
엘리베이터 안은 어느새 지하철과 버스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해진 순간, 태준의 머릿속에 뭔가 반짝거렸다.
“연 비서.”
느른한 부름에 다연은 물론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태준을 향했다.
“예. 대표님.”
다연이 대답하자, 태준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내 차 좀 운전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