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다연아, 다연아?”
“으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검푸른 새벽.
태준은 곤히 잠든 다연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촉감에 다연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밥 먹어.”
“몇 시예요?”
“5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던 다연은 배 대신 잠이 더 고팠다.
잠든 지 고작 두세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어쩜 저 남자는 저렇게 힘이 넘칠까.
“갈 데가 있어.”
“갈 데?”
게슴츠레 눈을 뜨자, 태준이 말끔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고, 그의 살결은 뽀송뽀송했다. 머리카락에 물기가 있는 걸 보아하니 샤워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자기를 만난 후 불면증이 싹 사라졌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척이다가 깨어보면 태준이 자신의 곁에 잠들어 있었으니까.
“조금 전에. 그만 일어날까?”
“나 졸린 데.”
“음…….”
다연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태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을 본 다연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응. 문제가 좀 생겼어.”
갈 데가 있다더니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걱정이 됐다.
비공개 레시피가 유출되거나 가맹점에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어 간혹 가다 꼭두새벽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태준의 표정을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연은 이불로 가슴을 가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문제인데요?”
보통 이런 새벽에 문제가 생기는 건 가맹점 문제일 때가 많았다. 주로 요리와 술을 함께 파는 곳에서 분쟁이 생겨 손님이나 경찰서에서 본사까지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디예요?”
가맹점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확신한 다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옷을 입으려고 했다. 그러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고서는 그녀의 가슴 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네가 누워 있으니까 참을 수가 없어서.”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어제 네가 너무 피곤해서 잠든 건 아는데…….”
다연은 고개를 숙여 그의 몸 어딘가를 주시했다.
아…… 이 남자, 건강해도 너무 건강하구나.
다섯 번째였나?
술래잡기 끝에 그에게 잡힌 다연은 다섯 번의 절정을 맛보고 겨우 잠들어 버렸다.
몸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눈을 뜨고 있으면 그가 또 덤빌 것 같았기에 서둘러 눈을 감았던 것이었다.
“자는 네가 너무 섹시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하! 이 남자…… 끝을 모르네, 끝을.
“졸려?”
“왜요? 더 잔다고 하면 덮치려고요?”
“그래도 돼?”
아오! 짐승이야?
“안 돼요!”
단칼에 거절하자, 태준이 세상 다 잃은 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남자, 저 표정이 무기다. 알고 저러는 거다, 알고. 상대방이 저 표정 보면 뭐든지 오케이 해주니까 알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약았어.”
다연이 눈을 흘기자, 태준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해도 돼?”
하지만 다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초반에 잘 잡지 않으면 그는 계속 요구해올 거다.
물론 싫진 않지만…… 아니, 사실 너무 좋지만…… 고작 몇 시간 사이 다섯 번의 절정을 선사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저 남자를 계속 받아주다가는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계속해서 이러면 회사에 출근도 못할 것 같았던 다연은 그가 참지 못하면 이쪽에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두 번.”
다연의 단호한 말에 태준은 주름 하나 없이 반반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그래?”
“왜요? 두 번이면 많이 하는 거지.”
“이렇게 섹시한 널 두고 어떻게 참으라고?”
치. 말이라도 못하면.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그럼 섹시하질 말든가.”
태준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농염했고, 다연에게 뻗은 손길은 거침없었다.
“얼굴은 이렇게나 예쁘고…….”
그의 커다란 손이 보드라운 두 뺨을 스쳐.
“몸은 만지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섹시하고…….”
목덜미와 어깨를 거쳐 봉긋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향기는 또 어떤데. 이런 널 어떻게 그냥 두냐고.”
“하흣. 새벽부터 이러기예요? 흐읍.”
“하루 여섯 번.”
이 인간이 줄이는 것도 모자라 늘려?
“안 ㄷ…….”
안 된다는 대답에 태준은 재빨리 그녀의 입안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화한 민트향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촉촉하고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그녀의 입안에 가득 들어찼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당겼다가 다시 놓는 그의 키스 스킬에 정신이 다 아찔할 정도였다.
“하아. 하루 두 번.”
“다섯 번.”
“세 번.”
“네 번.”
“안 돼요.”
이번엔 다연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태준이 그녀의 입을 막지 못했다.
다연은 배시시 웃으며 그를 달랬다.
“세 번만 해요.”
태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의 귓속에 속삭였다.
“잘 참으면 상도 줄 텐데?”
상이라는 말에 태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상? 무슨 상?”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원하는 건 뭐든’이라는 말에 태준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그가 원하는 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만 같았다.
다연은 태준의 쌜룩거리는 입술과 음흉한 눈빛을 보며 후회했다.
‘아……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거 아닐까? 취소할까?’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다연이 취소를 외치려는 순간!
“오케이, 콜! 하루 세 번!”
태준이 먼저 외쳤다.
“취…….”
“취소는 안 되는 거 알지?”
끄응.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다.
이럴 거면 하루 한 번으로 확 줄여버릴걸.
어째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보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 이제 밥 먹자.”
다연은 태준의 엉큼한 표정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선 순간, 조금 전에 했던 걱정이 한순간에 싹 잊혔다.
식탁 위에 맛깔스러운 요리가 펼쳐져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준비했어요?”
“우리 회사 메뉴개발팀 맞아? 냉장고에 재료가 너무 없던데?”
“회사 복지가 너무 좋아서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 없네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구내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배려해놓은 덕에 또 메뉴 개발하면서 시시때때로 시식하는 바람에 집에서 밥 먹을 겨를이 없었다. 주말에는 거의 서원의 식당에서 처리하곤 했고.
“해주고 싶은 요리가 있었는데, 재료가 없어서 대충했어.”
“대충한 게 이거예요?”
대충이라고 하기엔 진수성찬이었다.
요리 재료라고는 고작 달걀 몇 알과 김치뿐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내놓다니.
엄마랑 살 땐 몰랐다. 아침 밥상 차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자취 생활 6년차가 되니, 직접 차려 먹는 건 귀찮고, 편의점에서 사 먹는 건 질리고, 아침부터 회사 식당에서 먹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그 시간에 자고 말지.
“우와. 맛있겠다.”
다연이 밥을 한 숟갈 뜨고 반찬을 집으려고 하자, 태준이 반찬을 집어 그녀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나 손 다쳤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예요? 안 그래도 되는데.”
“해줄 거야. 내가 다 해줄 거야.”
“아침부터 호강인데요?”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침상 차려주는 것도 모자라 반찬까지 얹어주는 남자가 어디 흔한가. 게다가 요리는 또 어찌나 잘하는지. 아침부터 과식하게 생겼다.
“그럼 평생 호강시켜줄까?”
“푸흡!”
“왜? 목에 걸렸어? 물. 물 마셔.”
“콜록. 콜록. 콜록.”
다연은 물을 마시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 물론 그녀가 사레가 걸리는 바람에 태준이 더 놀라긴 했지만.
“등 두드려 줄까? 괜찮아?”
다연은 자신을 살뜰하게 챙기는 태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삐걱대던 사이였다.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가졌고, 오해와 불신으로 돌고 돌아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이제 막 시작하는 사이가 됐는데, 저 남자는 뭘 믿고 저렇게 직진인 걸까?
매사가 장난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항상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호강시켜준단다. 그것도 평생.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말을 거침없이 꺼내는 걸까?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왜? 왜 이렇게 빠르게 다가오는 걸까?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치 날 만나면 전력 질주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나만 보고 직진인 걸까?
이번엔 사레가 걸리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다연이었다.
***
“내가 한다니까.”
손님인 태준이 식사 준비를 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다연은 그의 허리춤에 묶인 앞치마를 벗겨주며 말했다.
“손 나을 때까진 내가 해.”
“안 그래도 돼요. 나 다 나았어.”
다연이 손을 내밀며 말했지만, 태준은 믿지 않았다.
살점이 덜렁거릴 정도로 베였던 상처가 하루아침에 나을 리가 없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요. 고무장갑 끼면 물도 안 닿는걸요.”
“자꾸 움직이면 상처 붙을 시간이 없어서 안 돼.”
“그래도…….”
“상처 나을 때까지만 한다니까.”
물론 그 이후로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태준은 다연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태준은 다연에게 만큼은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그녀가 먹을 요리를 하는 것도, 설거지하는 것도, 태준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귀찮거나 하기 싫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면 됐고, 설거지하고 있을 땐 내 옆에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주기만 하면 됐다.
“어쨌든 손 나을 때까진 물 닿는 건 뭐든 다 내가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안 그래도 되는데.”
다연은 피식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 나왔다.
이제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일찍 일어났다고 여유를 부렸더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씻고 나올게요.”
속옷과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려던 다연은 이내 태준이 뻗은 긴 팔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왜 그러냐는 듯 다연이 눈을 크게 뜨고 태준을 올려다보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아.”
“……?”
“물 닿는 건 뭐든 다 내가 해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