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날 밤.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조금씩 부는 바람에 하얀색 커튼이 흔들리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간질였다.
“저번 주 토요일에 나 버리고 어디 갔었어요?”
“날 버리고 간 건 넌데.”
태준이 보드라운 다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내가 데이트 신청했는데 거절했잖아요.”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왜요? 토요일의 여자 만나러 가야 해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태준의 손이 흠칫 놀란 듯 멈췄다.
“내 핸드폰 봤어?”“화장실 간 사이에 전화가 왔었어요. 토요일의 여자한테.”
처음 듣는 말에 태준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그날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오전 내내 그녀의 집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이런저런 농담을 즐기고, 여느 연인들처럼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오후에 밖으로 나와 밥 먹을 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부터 다연이 갑자기 화를 냈고, 태준은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인경의 전화 때문이었다니.
“하! 김인경…….”
“둘이 무슨 사이예요?”
“말했잖아. 고등학교 후배이자 내 주치의라고.”
“그건 표면적인 거잖아요. 남자 서태준과 여자 김인경은 무슨 사이냐고요.”
“아무 사이도 아닌데?”
거짓말.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서태준 혹은 서태훈, 둘 중의 한 명은.
다연은 이제 둘 중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확실히 구분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쨌든 자신은 태훈의 말만 듣고 태준을 판단했고, 어쩐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왜요? 김인경 씨 되게 미인이던데.”
다연은 태훈이 한 말을 전하지 않고 에둘러 물었다. 가뜩이나 안 좋은 형제 사이를 괜히 자신 때문에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태준의 눈은 ‘인경이가 미인이라고? 금시초문이네.’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연은 끈질기게 물었다. 어쨌든 ‘토요일의 여자’ 때문에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되게 예쁘고 매력 있으시던데?”
질문인지, 사실을 말하는 건지, 자신을 떠보는 건지.
예전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 태준도 배운 바가 있었다.
“내 눈엔 너만 예쁘고 매력적인데?”
“치. 거짓말.”
콧방귀를 뀌며 눈을 흘기지만, 입술이 웃는 걸 보면 듣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연다연. 이리 가까이 와봐.”
태준이 그녀를 향해 손을 벌리자, 다연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연의 귀에 태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두근, 두근.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마음이 편해졌다.
“인경이는 그냥 후배야. 나한테 단 한 번도 여자였던 적도, 앞으로 여자일 리도 없는, 그냥 후배이자 주치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의 고백을 들은 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의심의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
다연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런데 왜 핸드폰에 그렇게 저장해놓은 거예요?”
“아…… 김인경.”
태준은 잇새 사이로 김인경이라는 이름을 원망스럽게 내뱉었다.
“인경이가 장난친 거야. 토요일마다 만나서 내 상태 체크하고, 상담 받고 있거든.”
“아…….”
오해였구나. 오해였어.
연인들이 만나 데이트하는 요일에 만나니 당연히 사적인 만남으로 생각했다.
“근데 왜 하필 토요일에 만나요?”
“인경이가 토요일만 된다고 해서.”
“왜요? 물어봐도 돼요?”
“토요일만 되면 인경이 집에서 선보라고 난리거든. 병원 진료는 없지, 핑계 삼아 개인 진료 있다고 선배인 나를 써먹는 거지.”
제대로 오해했다. 제대로.
“근데 왜 병원에서 안 만나고?”
전화를 받았을 때, 태준의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에 다연은 확신했던 거고.
“인경이 아버지께서 병원 원장님이셔. 주말에 병원 가면 바로 맞선 자리 끌려간다고 다른 곳에서 상담 받아.”
이건 그야말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치고, 상모까지 돌린 셈이었다.
“아, 쪽팔려.”
그런 것도 모르고 태준이 요일별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파렴치한으로 오해하고,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여기는 바람둥이로 치부하다니!
아…… 망할 진서원! 그리고 서태훈!
‘서원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말을 했다고 쳐. 그럼 큰 대표님은 뭔데?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아까는 인경을 보고 태준과 둘이 사귀었던 사이라고까지 말했다. 태준의 말을 들어보니 전혀 아닌데 말이다.
태준의 가슴이 얼굴을 묻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가 다연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다연은 고개를 들어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사무실에서 수트를 입고 있을 때도, 주방에서 조리복을 입고 있을 때도 멋있지만, 침대 위에서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때가 제일 섹시했다. 지금처럼.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뭐가요?”
“현관에 남자 구두 말이야.”
다연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현관 앞에 남자 구두를 두기 시작했다.
가끔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때나, 택배를 받을 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집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며, 그게 남자라는 걸 알리기 위한 페이크였다.
“요즘 혼자 사는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해요.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흠…….”
설명을 해줬음에도 태준의 반응이 영 꺼림했다.
“왜요?”
“누가 신던 것 같던데?”
“신던 거니까.”
“누가 신던 건데?”
그러게 누가 신던 거였더……라?
“왜 바로 대답을 못 하지?”
“아…… 그, 그게…… 연, 연다훈? 그러니까 남동생! 남동생 거예요!”
남동생 거라고 둘러댔음에도 의심 가득한 태준의 눈빛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훈이한테 전화하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다연은 잽싸게 태준의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낚아채려다 그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태준은 커다란 두 손으로 다연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시지?”
“응…… 그게 기억이…….”
“왜 날 못 보지?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아…… 그러니까 의류 수거함에서 주어왔던가?”
“눈빛이 흔들리는데?”
태준은 두 손이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다연의 귓불을 핥았다.
“하읏. 이거…… 흣, 반칙이에요.”
“그럼 바른 대로 대답해.”
태준의 혀가 귓불을 지나쳐 목덜미에 닿자, 다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읏……항복…… 말할게요.”
“말해.”
“손은 놔줘야죠.”
“두 번이나 거짓말 한 사람을 뭘 믿고.”
“치.”
다연이 눈을 흘기자, 태준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슴 위를 치근거렸다. 그는 보드라운 살결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핥았다.
“하흐윽. 말할게요. 말…… 해줄게. 흣!”
그리고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자, 다연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외쳤다.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 거예요.”
사실대로 고백하자, 이불 밑에 숨어 있던 태준의 얼굴이 미어캣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붉은 입술이 타액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
그는 꽤 놀란 모양인지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왜 놀랐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은 다연은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전에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는데, 배달원이 계산하다가 마음에 든다면서 갑자기 제 전화번호를 묻는 거예요.”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도 못 본 그 배달원이 어찌나 무섭던지.
다행히 그날 별일은 없었지만, 바로 다음 날 남자친구를 만나 안 신는 구두 한 켤레를 가져왔다.
그때 전남친은 하도 닳은 구두라 버리는 듯 다연에게 주었고, 헤어진 후에도 버리지 않고 그냥 현관 앞에 둔 것뿐이었다.
전남친이 준 물건이긴 했지만, 구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전남친도 그녀를 염려해서 구두를 그냥 둔 것이 아니었고, 다연도 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집안에 그의 물건을 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버릴 이유를 찾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저 남자 신발이 필요했으니까.
“그때 둔 걸 아직 안 버렸어요. 새 신발 사기엔 괜히 돈도 아깝고.”
다연이 열심히 설명했지만, 태준은 그녀의 말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왜요? 문제…… 있어요?”
뭐가 그렇게 문제일까? 신발이 문제라고 하면 그냥 갖다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태준의 표정은 아주, 아주 많이 심각했다.
그는 잠시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거야?”
이게 무슨 성춘향 절개 지키는 소리지?
“당연하죠.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다연의 나이가 무려 스물하고도 여섯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연애 경험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태준이 아까보다 더 충격 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없어. 그럼 태준 씨는 여태 여자친구도 없었어요?”
‘자기도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이런데? 설마 여자 과거 이해 못 하고 그런 꽉 막힌 남자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에이, 설마. 서른두 살인데?
“혹시…… 연애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없었어. 단 한 번도.”
연애는 안 해봤지만, 썸은 타 봤겠지?
“썸은요?”
“없어.”
하긴 요즘 마음보다 몸이 먼저니까.
“섹스는…….”
“처음이야.”
설마 키스는 해봤겠지.
“키스는…….”
“너랑 한 게 처음이었어.”
말도 안 돼. 그럼 손은 잡아 봤겠지?
“손은 잡아…….”
“내 모든 처음은 다 너야.”
다연은 진심으로 놀랐다.
어떻게 저 얼굴에, 저 몸매에, 저 직업에 내가 처음일 수 있지? 주변에 강주은 같은 여자가 수도 없이 달라붙었을 텐데.
라는 궁금증과 더불어 이런 궁금증도 생겼다.
처음이라면서? 근데 왜 그렇게…… 잘해?
다연은 단 한 번도 섹스의 즐거움을 몰랐다.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태준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다.
즐거움을 알았고, 달콤함을 맛봤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은 즐거움 느끼고 달콤함을 맛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게 사랑의 맛을 알려준 그가 처음이라니!
“거짓말!”
다연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자, 태준의 얼굴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었다.
“연다연. 너 설마…….”
아……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구나.
“내가 처음이 아니야?”
“아…… 그게…….”
처음은 아니지만, 당신이 최고였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태준의 눈빛이 싹 변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 같아, 다연은 본능적으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워워. 우리 대화로 해요. 대화로.”
“내가 과연 대화로 끝낼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물론 몸의 대화를 할 것 같긴 하지만.
“이리 와!”
태준이 다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가자, 다연이 꺄르르 웃으며 침대 저편으로 도망쳤다.
“좋은 말로 할 때 오시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잔다고 약속하면?”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
“뭘 하려…… 꺄악!”
다연은 도망쳤고, 태준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말하고 있는데 잡는 건 반칙이에요.”
“침대 위에 룰이 어딨어.”
너와 나의 사랑만 있는 거지.
다연을 침대에 눕힌 후, 태준은 입술로 그녀의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연다연은 내 여자라고 도장을 찍기라도 하듯.
“하아. 당신이 처음이 아니라서 해서…… 아흣…… 기분 나빠요?”
“조금. 아니. 사실 많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래. 대신 약속해.”
“뭘요?”
“내가 네 마지막이 되게 해줘.”
“좋아요…… 하읏!”
점차 밑으로 내려가는 그의 입맞춤에 다연의 눈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