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22화 (22/74)

22화

“주치의라뇨?”

다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이라면 주치의가 따로 없다.

간혹 가다 부잣집에서 건강관리를 위해 주치의를 둔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다연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아파요? 어디가? 얼마나? 왜? 언제부터 아팠는데요?”

“하나씩 질문해. 정신없어.”

태준이 슬며시 미소를 짓자, 다연이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아, 미안해요. 아픈 사람을 때리다니.”

다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속없이 웃는 태준이 안쓰럽다가도, 회사 대표한테 손찌검하는 비서가 웬 말이냐 싶다가도, 아픈 사람을 때린 제 손을 꺾어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남자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벌쭉 웃고 있는 건지.

“왜 웃어요?”

“좋아서.”

좋아? 이 와중에 뭐가 좋아?

“뭐가요?”

“네가 내 걱정하고 있잖아.”

진심으로 걱정됐다. 지금도 걱정하는 중이고. 하지만 그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김인경이라는 여자가 태준의 후배에 주치의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그리고 또 주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토요일의 여자’였으며, 태훈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사귀었던 사이라고 했다.

“걱정은 누가 했다고. 저 걱정 안 했어요.”

“걱정 안 한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나?”

“제 표정이 뭐 어쨌길래…….”

“세상 다 잃은 표정이랄까? 혹시 내가 네 세상이야?”

어쩜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하는지.

“전 그저 비서로서 모시는 상사께서 아프다고 하시니까 조금 걱정한 것뿐입니다.”

“어쨌든 한 거잖아. 내 걱정.”

태준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생글거리며 가까이 다가왔지만, 다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디가 아프길래 주치의까지 있는 거예요?”

다연은 지금, 조리실에서 손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 태준의 마음속에 벅찬 감정이 솟아올랐다.

태준은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다연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냥. 불면증이 좀 심했거든.”

불면증이 얼마나 심했으면 주치의가 있을 정도일까?

“얼마나 심한데요?”

“음. 열흘?”

“열흘이요?”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자,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열흘 동안 단 1분도 못 잤었거든.”

담담한 그의 대답에 다연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얼마나 불면증이 심했으면 열흘이나 못 잘 수가 있는 거지?

머리 닿기가 무섭게 잠드는 다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잠 못 드는 고통이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괴로울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 피어오를 때, 몇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호텔에서 곤히 자고 있던 그의 모습과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에 취해 있던 그의 얼굴이었다.

다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불면증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자던데요?”

다연에게는 진실을 촉구하는 날카로운 질문이었지만, 태준에게는 그녀가 귀엽게만 보였다.

“나 잘 때, 자는 모습 훔쳐봤어?”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훔쳐보긴 뭘 훔쳐봐요. 일부러 본 게 아니고…….”

“나 자는 모습 어땠어?”

근자감 넘치는 이 질문은 뭐지?

“왜? 너무 황홀해서 차마 입 밖으로 못 꺼내겠어?”

“황홀은 무슨. 코 엄청나게 골던데요?”

“내가 코를 곤다고? 설마. 새근새근 곤히 잤겠지.”

“새근새근은 무슨. 이도 막 드르륵 갈고, 몸부림은 또 얼마나 심한지. 내가 자다가 놀라서 몇 번이나 깬 줄 알아요?”

“거짓말.”

“진짜거든요.”

“난 못 믿겠어.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와. 이 남자 이런 캐릭터였나?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뜬금없는 행동을 하고, 뱀파이어처럼 섹시한 얼굴로 내 입술을 핥긴 했어도, 이렇게 뻔뻔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 속에 몇 개의 캐릭터가 숨어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뚫어지게 저를 바라보는 뜨거운 그의 눈빛에 얼굴이 다 따끔거린 다연은 슬며시 말을 돌렸다.

“암튼 살면서 대표님처럼 잠버릇 심한 남자는 처음 봤어요.”

그녀의 말에 반반했던 태준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버렸다.

어느 부분에서 그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버렸다.

“증명해봐.”

“뭘요?”

“내 잠버릇이 네 말처럼 심한지 아니면 내 말처럼 얌전한지.”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그걸 무슨 수로 증명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불면증이 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했고, 설사 잠을 잔다고 해도 내 말을 믿기나 하느냐 말이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왜 그걸 증명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번에 거절하기엔 태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아니, 화가 단단히 아주 단단히 난 것 같기도 하고.

다연은 거절할 생각으로 슬며시 운을 뗐다.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 게다가 불면증 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면서요?”

추궁 반 걱정 반으로 묻자, 그가 불쑥 다연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는 바람에 다연의 몸이 뒤로 휘청거리며 폭신한 의자 위로 쓰러졌고, 태준은 바퀴 달린 의자를 제게 끌어당겨 그녀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의 시야에 잘생긴 태준의 얼굴이 가득 차오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성난 몸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던 것 치고는 너무도 순진한 반응이었다.

다연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준은 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

“네가 재워주면 되겠네.”

훅 들어온 그의 말에 다연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다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태준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재워서 확인하면 되잖아. 내 잠버릇.”

아아. 그저 장난삼아 한 말이었는데, 왜 대화가 이렇게 흐르는 거지?

다연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대화를 끝내기 위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농담이었어요.”

그러자 태준이 의자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대표님은 코도 안 골고, 이도 안 갈아요. 물론 몸부림도 안 치시고요. 마치 아기처럼 새근새근 주무시던데요?”

안 믿을 거라는 걸 알아서일까? 말을 마친 다연이 배시시 미소까지 지어 보였지만, 구겨진 태준의 얼굴을 펴질 줄을 몰랐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아까는 잠버릇 안 심하다고 그렇게 반박을 하더니, 왜 이젠 못 믿어서 안달이래?

다연은 느른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준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자존심 상했으니까.”

자존심 상할 일이 뭐가 있었다고 자존심이 상해?

“여기서 자존심 얘기가 왜 나와요?”

“난 항상 내 잠버릇에 자부심이 있던 사람이라고.”

잠버릇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나?

“그런데 네 말에 상처 받았어. 그러니까 진짜 내 잠버릇이 어떤지 확인해줘.”

“그걸 왜 제가 해요?”

“그럼 누가 해?”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실까?

하지만 너무 당당한 태준의 태도에 다연은 말까지 더듬으며 생각나는 후보군을 떠올렸다.

“부,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은 나 불면증이 있는 것도 모르셔.”

“왜요?”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어.”

하긴. 매일 밤, 잠 못 드는 아들을 보면 부모님이 가슴 아파하실 거다. 우리 엄마 같았으면 같이 날밤을 새웠을지도 모르지.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부모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럼…… 서태훈 대표님?”

다연의 입에서 태훈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태준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연도 대충 알고 있다. 두 사촌 형제가 그리 가깝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고 김인경이라는 여자한테 확인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그의 잠버릇을 확인하는 건, 태준과 앙숙인 태훈보다는 인경이 더 적합했다. 그녀는 태준의 친한 후배이며 그의 주치의였으니까.

하지만 싫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위험한 생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토요일의 여자한테 이 남자를 맡기느니 자신이 그의 잠버릇을 확인하는 게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난 정말…… 이 남자한테 미쳐 있구나. 이 남자를 좋아해. 아니, 어쩌면 더 깊은 감정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다연도 확인이 필요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 남자의 진심이, 감정이 뭔지 알아야만 했다.

“태훈이 형이라니. 내가 무슨 대답할지 알지?”

“네.”

“그럼 네가 확인해줘.”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태준은 뭐든 대답해 줄 수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다연은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저한테 원하는 게 있으세요?”

태준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연은 직접 물었다.

“혹시 제 몸을 원하시나요?”

거침없는 질문에 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다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남자 서태준이 여자 연다연에게 원하는 게, 혹시 섹스예요?”

“그래.”

그의 대답에 이번엔 다연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원하는 건 정말 제 몸뚱이뿐이었나?

그래도 마음을 나눴다고 생각했다. 손톱만큼의 감정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두 번의 잠자리 그리고 몇 번의 절정에는 단순한 쾌락만 있던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흔들리는 것처럼, 그도 내게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원하는 게 몸뿐이라니.

몸이 덜덜 떨려왔다. 배신이라고 하기엔 나눈 게 너무 없었고, 차였다고 하기엔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그래. 그저 그냥 사이처럼 하룻밤 불청객을 만난 거야. 그런 거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몸을 원해.”

끝까지! 어디까지 농락할 거냐고! 언제까지 날 가지고 장난칠 거냐고!

뺨이라도 후려칠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네 마음을 원해.”

“……?”

“네 눈길을 원해. 네 관심을 원해. 네 손길을 원하고, 네 사랑을 원해.”

“……!”

“그리고 네 몸도 원해.”

그 어느 때보다 태준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난 널 보면 참을 수가 없거든. 미친 듯이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거든.”

간절한 눈빛을 한 태준은 다연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 좀 네 입맛대로…… 요리해줄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