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태훈 오빠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
고등학생 때부터 태훈을 봐왔던 인경이 불안한 듯 중얼거렸지만, 태준은 그녀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연 앞에 서 있는 태훈을 보자, 며칠 전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기에게 보란 듯이 구는 형의 태연한 행동에 태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슬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태훈 오빠가 관심 보였을 때, 안 넘어간 여자가 있었나?”
인경은 궁금했다. 태준이 좋아한다는 다연이라는 여자는 어떨지 말이다.
***
유리 너머로 태준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인경을 보자, 어제 베였던 손가락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트레이를 정리한 다연은 애써 괜찮은 척,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꾸만 머릿속에 자신의 다친 손가락을 핥아주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속은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과 묘하게 색정적인 그의 표정에 홀랑 홀려서 완전히 속은 기분이었다.
어제는 제게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줄 것처럼 굴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견딜 수 없는 질투가 피어올랐다.
전 남자친구들이 제발 좀 해달라는 질투를, 서태준에게는 차고 넘치게 하고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태훈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손님이 와 있네요?”
다연은 빠르게 표정을 고친 후, 태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인경과 태준이 무슨 관계일까 생각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과는 퍽 다른 표정이었다.
“아, 인경이구나.”
태훈이 아는 척 하자, 다연의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는 분이세요?”
“고등학생 때 태준이 여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말에 다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전 여자친구, 게다가 고등학생 때 만나던 여자친구를 여태까지 만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토요일의 여자’는 또 뭐고? 헤어졌지만 육체적 관계는 지속하는 사이인가?
어제는 애타 죽겠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남자가 지금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니 다연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태준이 정성껏 끓여준 죽 덕분에 주말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상념에서 겨우 벗어나는 것 같았는데, 태훈의 말로 다시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눈에 띄게 다연의 표정이 무거워진 것을 본 태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슬쩍 운을 띄었다.
“둘이 다시 만나나?”
“네……?”
놀란 다연의 표정에 태훈은 좀 더 말을 덧붙였다.
“사실 태준이 저 자식, 인경이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하긴 뭐 그렇다고 해도 인경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자……. 그럼 나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여자 중 하나인 건가?
“태준이 저 자식은 이 여자, 저 여자 너무 갈아탄단 말이야.”
“……!”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녀석이 첫사랑의 실패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녔거든요. 인경이도 그중에 한 명이었고. 내가 본 여자만 몇 명인지. 연 비서도 조심해요. 저 녀석이 언제 들이댈지…….”
“저기, 대표님.”
다연이 그의 말을 자르자, 태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마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요.”
“뭔데요? 편하게 말하세요.”
태훈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다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서태준 대표님에 대한 험담, 저한테 안 하셨으면 합니다.”
냉철한 다연의 말투에 놀란 태훈은 할 말을 잊은 듯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서태준 대표님은 제가 모시고 있는 상사입니다. 그런데 자꾸 좋지 않은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시면, 제가 대표님 모시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연은 태훈이 왜 자꾸 제게 묻지도 않은 태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자꾸 들으면 듣기 싫은 법인데, 남의 험담을 자꾸 해대니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니 듣기 거북했다.
“아니, 난 다연 씨 조심하라고…….”
“뭘 조심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굳이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서태훈 대표님이 제 오빠도, 아빠도, 남자친구도 아니니까요.’라고 말하려던 다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감정적인 표현은 최대한 절제하고 말을 이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말을 마친 다연이 고개를 들어 태훈을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에 민망함과 약간의 분노가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아…… 내가 연 비서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했군요. 그럼, 난 이만.”
“작은 대표님 만나러 오신 거 아니세요?”
“이따 다시 올게요.”
멋쩍은 표정을 짓던 태훈은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걸 확인한 다연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하! 내가 큰 대표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태준이 바람둥이든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니든 그건 당사자의 문제였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굳이 비서에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다연이 쓰린 제 속을 겨우 달래놓았는데, 자꾸만 찾아와 쓸데없는 정보를 주며 자신을 들쑤시는 태훈에게 화가 났다.
아…… 화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회사 대표이고 전에는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줬다. 그런데 이렇게 단호하게 내쳐버렸으니 많이 민망했을 거다.
“하아…… 어쩌지?”
두 손을 머리카락을 마구 휘젓고 있을 때, 태준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인경이 튀어나와 다연의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인경의 행동에 다연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태준 오빠 후배 김인경이라고 해요.”
아, 예 그런데 내 손은 왜 잡는 거죠?
“방금 태훈 오빠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그러게요. 내가 뭐라고 했을까요?
“뭐라고 했길래 완전 똥 씹은 표정으로 나가는 거죠?”
똥 씹은 표정……? 표정이 그렇게나 안 좋았나요?
“서태훈을 한방에 KO 시키는 여자는 별로 없는데, 연다연 씨 대단하다.”
이건 칭찬인가? 아니면 나 멕이는 건가?
“서태훈 그 인간이 원래 쓸데없이 멘탈만 강해서 남이 무슨 소리를 해도 흔들리지 않는데, 아까 다연 씨가 한 말에 눈동자에서 지진이 일더라고요.”
아…… 그 정도였어? 이러다가 나 잘리는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얘길 했기에 저 인간이 저래요? 예?”
인경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계속 질문을 퍼붓자, 뒤늦게 따라 나온 태준이 그녀를 말렸다.
“김인경. 볼일 끝났으면 그만 가.”
“잠깐만. 나 다연 씨랑 얘기 좀 더 하고.”
“그만하고 가라니까.”
“이것 좀 놔봐. 나 다연 씨랑 할 말이…….”
결국, 인경은 태준의 손에 질질 끌려 밖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오빠. 나 궁금해 미치겠는데. 다연 씨랑 얘기 좀 더 하면 안 돼?”
“안 돼.”
“오빠. 오라버니. 선배님.”
인경이 교양 있지만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태준을 불렀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생긴 서태준 님. 응? 조금만.”
“엘리베이터 왔다.”
“야, 서태준! 너 정말 이렇게 치사하게 굴 거야?”
“멀리 안 나간다. 조심해서 가.”
“야! 치사해서 내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인경의 목소리가 정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아.”
인경을 보낸 태준은 자신의 사무실과 태훈의 사무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태훈과 인경이 다녀간 사무실은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정신없었다.
다연은 태준이 나간 사이 그의 집무실에 들어가 어지럽혀진 테이블을 정리했다.
인경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는 찻잔과 마카롱 부스러기를 치우던 다연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아무리 태훈이 한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고등학생 때 태준이 여자친구.”
“둘이 다시 만나나?”
“태준이 저 자식, 인경이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하긴 뭐 그렇다고 해도 인경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겠지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인경이 먹은 컵이나 치우고 있자니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왜 이렇게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건지.
주말에는 내내 침울했고, 어제 태준과 조리실에 있을 땐 미친 듯이 설렜고, 오늘 인경을 본 순간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은 태훈으로 인해 완전히 녹다운 되어버렸다.
다연은 이런 제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감정 변화가 별로 없던 자신이, 목석이라고 불리던 연다연이, 태준을 만난 후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제 감정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를 만나고 난 뒤로는 내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다연은 심장 부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너 내 거잖아. 내 심장이잖아. 근데 왜 네 멋대로 움직여? 제발 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라, 응?”
거의 빌다시피 매달렸건만, 다연의 심장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태준은 보자마자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온 태준은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다연의 손을 낚아챘다.
“내가 치울게.”
“아닙니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둬. 손 다 나을 때까지 내가 한다고 했잖아.”
“제 일입니다.”
“후배야.”
갑작스러운 태준의 말에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진심과 염려가 가득 담겨있었다.
“인경이, 고등학교 때 후배라고.”
그건 아까 태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안다고 해도 태풍이 휘몰아치는 다연의 감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했고.
“저한테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게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태준이 서둘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내 주치의야.”
“!”
순간, 차갑게 돌아서던 다연이 몸을 돌려 태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