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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20화 (20/74)

20화

태준의 집무실로 들어간 여자는 다연을 향해 이것저것 요구했다.

“갓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달달한 쿠키 있나요? 아니다. 마카롱 먹고 싶다. 마카롱 있어요? 민트초코로.”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그럼 마카롱이랑 핸드드립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드립 커피 되죠?”

까다로운 여자의 주문에 태준이 선을 그었다.

“김인경. 여기 카페 아니야.”

제 편을 들어주려고 애써 딱딱한 말투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다연의 귀에는 ‘김인경’이라는 여자의 이름만 들려왔다.

“카페 아니어도 내가 먹고 싶은 건 말할 수 있지 않나? 어차피 손님 다과 내올 텐데.”

“네 수발들라고 고용한 사람 아니야.”

“수발 아니고 손님맞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내가 꼭 갑질 하는 것 같잖아.”

“바빠. 줄 것만 주고 빨리 가.”

태준이 쌀쌀맞게 굴자, 인경은 다연을 향해 씽긋 웃으며 말했다.

“부탁드려요.”

교양과 애교가 물씬 풍기는 말투였다.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온 다연은 집무실 문에 기대어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토요일의 여자다. 주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여자이자, 태준이 자신을 두고 만나러 간 여자. 그런데 여긴 왜 왔을까? 왜 하필 지금.

“타이밍도 참 거지같네.”

허심탄회하게 태준에게 모든 걸 물어볼 작정이었다. 당신에게 난 뭐냐, 토요일에 만나러 간 여자는 누구냐, 그리고 난 그쪽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저 여자가 등장하다니.

“정신 차리자, 정신.”

지금은 일단 비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드립 커피…… 민트초코 마카롱…….”

다연은 인경이 주문한 메뉴를 중얼거리며 탕비실로 들어갔다.

한편, 태준은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다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탕비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어제 손가락 다친 게 마음에 걸려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시킬 작정이었는데, 불청객이 찾아왔을 줄이야.

“오빠,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인경은 태준의 시선을 따라 통유리 밖을 쳐다봤다.

“귀신이라도 보는 거야? 아무도 없는 밖은 왜 자꾸 봐?”

“줄 게 뭐야?”

“오빤 나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인경이 서운하다는 듯 눈을 흘기며 묻자, 태준이 깜빡했다는 듯 대답했다.

“연락 없이 회사 찾아오지 마.”

냉랭한 태준의 태도에 인경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와. 진짜 서태준. 내가 치사해서 또 찾아오나 봐라. 자!”

인경은 가방에서 약 봉투를 꺼내 태준에게 휙 던졌다.

“그날 내가 깜빡하고 약을 안 주고 갔더라고.”

“아…… 약.”

태준은 오래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에 의지하지 않으면 단 한 시간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면증은 지독했고, 불안한 마음에 때때로 공황장애가 찾아오기도 했다.

가족들조차 모르는 그의 상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인경이었다. 그녀는 태준의 고등학교 후배로, 태준이 예정대로 의대에 진학했더라면 대학교 선후배까지 됐을 거다.

태준이 한국에 들어온 후, 주치의인 인경은 매주 토요일마다 그의 상태를 체크하며 치료와 약 처방을 내리고 있었다.

“근데 오빠, 어째 얼굴이 멀쩡하다?”

요 몇 년 동안 그를 지켜봤던 인경은 신기한 눈빛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수면제 없이는 침대에 눕지도 못하는 사람 얼굴이 왜 이렇게 뽀송뽀송해? 다크서클도 없고?”

토요일에 미처 약을 주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안 인경은 태준이 걱정돼 연락할 정신도 없이 허겁지겁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 민망할 정도로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멀쩡한 건지.

“너 안 왔으면 약 안 먹은 것도 몰랐을 거다.”

“뭐야? 설마 약 없이 잤어?”

인경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의사로서 순수한 환자에 대한 호기심은 개뿔, 뭐 때문이지? 설마, 혹시!

“오빠! 그 여자 찾았어? 1231?”

인경의 날카로운 질문에 태준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인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 주위를 서성거렸다.

“와! 브라보! 드디어 서태준 살 수 있는 거야?”

지난 13년 동안 태준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잠들지 못하는 밤, 수면제에 취해 겨우 잠들면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악몽,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과호흡,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까지.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지금은 어때? 예뻐? 직업은 뭐야?”

질문을 줄줄 쏟아내던 인경은 손을 휘휘 내젓더니 태준 옆에 앉았다.

“아니다. 이럴 게 아니고 보여줘. 당장. 나도 보고 싶어. 천하의 서태준을 일편단심 민들레로 만든 여자가 누군지. 몇 시에 퇴근한대? 난 늦어도 되니까 아무 때나 만나자고 해. 응?”

인경이 교양 있지만,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조르자, 태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안 돼.”

얼굴은 선한데, 말투는 굉장히 거칠고 단호했다.

“왜 안 돼? 바쁘대? 그럼 당장 오늘 아니어도 돼. 난 언제든 괜찮아.”

“내가 안 돼.”

“왜? 오빠 바빠? 엄청 한가해 보이는데?”

인경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태준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닳아.”

설마 내가 잘못 들었지?

인경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귀를 파고 물었다.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나도 아까워서 아껴 보고 있는데, 널 왜 보여주냐?”

“미쳤나 봐.”

뜨악한 인경이 차마 입도 못 다물며 태준을 쳐다봤다.

“정신과 의사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농담을 던지는 태준의 얼굴이 밝았다.

13년 전, 그 사건 이후로 태준의 얼굴이 이렇게 밝은 건 인경도 처음 보았다. 아무리 즐겁고 좋은 일이 생겨도 잘생긴 그의 얼굴 한구석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두운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서태준답지 않은 닭살 멘트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신이 존경했던 선배가, 한때는 좋아했던 남자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연민하고 있는 태준이 행복하다면 된 거지.

“그 여자도 오빠 만나니까 좋대?”

인경의 질문에 계속 미소를 짓고 있던 태준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왜? 그 여자는 아니래? 설마 결혼했어?”

“결혼했는데, 내가 이러겠냐?”

“하긴 그럼 완전 미친 놈이지.”

“김 닥터, 말 좀 가려 하시죠.”

“결혼도 안 했는데 뭐가 문제야? 남친 있대?”

궁금증이 인 인경은 못 기다리겠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13년을 찾아 헤맨 첫사랑을 겨우 만나, 이제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다는 그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걱정스러웠다.

“날 못 알아봐.”

“뭐? 오빠를 못 알아본다고?”

태준은 다연과 우연히 만난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한국에 들어온 지 세 달쯤 됐을까. 그는 꽤 소문난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진식당에 찾아갔다. 맛집답게 빈자리는 없었다. 다음에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서려고 할 때,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한 여자가 있었다.

뒷모습만 봤을 뿐인데, 태준은 그 여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 헤맬 땐 코빼기도 안 보여주다가 포기하니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 여자.

태준은 그녀의 옆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다연이었다.

혹시나 잊을까, 매일 밤 떠올렸던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태준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지만, 그녀는 지금도 태준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13년 전이면 너무 어렸다. 못 알아볼 만도 해. 그래서 지금은? 말했어? 오빠가 바로 13년 전 그 남자라고?”

“아니.”

“왜?”

답답하다는 듯 묻는 인경의 질문에 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실망감도 잠시. 태준은 어쩌면 이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 위의 성처럼 불안했던 과거를 지우고, 견고한 사랑을 쌓고 싶었다.

“왜 말을 안 해?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굳이 말할 필요 못 느껴.”

“하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왜 말 안 하냐고 방방 뜰 줄 알았던 인경이 금세 태도를 바꿨다.

“뭐가?”

“그렇잖아. 전국 수석에, 한국 병원 원장 아들에, 미래가 탄탄대로로 깔려 있던 남자가 자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고 산 거 알아봐. 충격 받지 않겠어?”

“다 지난 일이야.”

“지난 일이라도…….”

“김인경. 입 다물어.”

태준이 갑자기 낮고 서늘하게 말하는 바람에 인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그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준을 쳐다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다연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트레이가 들려있었고, 트레이 위에는 인경이 주문했던 커피와 민트초코 마카롱이 맛깔스럽게 놓여 있었다. 다연은 테이블 위에 커피와 마카롱을 올려놓고 가볍게 인사했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인경은 대수롭지 않게 인사하며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달콤한 마카롱을 입안 가득 통째로 집어넣자 온몸에 당이 돌며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카롱 맛있다. 오빠도 먹어봐…….”

마카롱을 권하려고 태준을 힐끔 본 순간 인경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말았다.

태준의 눈이 다연을 좇고 있었다. 다연이 왼쪽으로 가면 그의 고개도 왼쪽을 향했고, 자리에 앉으면 그의 눈동자가 아래로 굴러갔다. 아까도 통유리 밖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더니…….

“오빠, 설마! 1231이 저 비서였어?”

“어떻게 알았어?”

“오빠, 저 여자 볼 때 눈이 어떤 줄 알아?”

“어떤데?”

“곰돌이 푸가 내 밥, 이러면서 달려들게 생겼어.”

“그게 무슨 말이야?”

“눈에서 꿀 떨어진다고.”

그제야 인경의 말을 알아들은 태준은 피식 웃고는 다시금 다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쁜 다연의 얼굴에 먹구름이 한가득이다.

‘손가락이 아픈가? 약을 발라주는 게 아니라 병원 데리고 가서 입원을 시켰어야 했는데.’

넋 놓고 다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인경이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좋아? 날 투명인간 취급할 정도로?”

“볼일 끝났으면 가라.”

“와. 10년 우정, 이렇게 금이 가나?”

“아, 맞다. 칼에 베였으면 무슨 과로 가야 해?”

난데없는 질문에 인경이 놀라 물었다.

“칼에 베였어? 어디? 얼마나? 괜찮아?”

“나 말고 우리 다연이.”

“그럼 병원을 데리고 갔었어야지, 이 인간아! 일어나. 병원 가자. 어디 베였는데?”

“손가락.”

“뭐? 손가락? 얼마나?”

“1cm 정도?”

태준의 대답에 인경이 소파에 놓여있던 쿠션을 들고 그에게 덤볐다.

“이 인간아! 놀랐잖아!”

“나도 놀랐거든.”

다연의 베인 손을 떠올린 태준이 소름 끼친다는 듯 몸서리치자, 인경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솔로인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여자라고는 모르고 살던 사람이 어쩜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연다연이라는 여자,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밖을 내다보던 인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오빠. 긴장 좀 해야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밖을 봐봐.”

인경의 말에 고개를 돌린 태준은 다연 앞에 서 있는 태훈을 보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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