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19화 (19/74)

19화

“그러니까 아프지 마.”

이 남자.

“다치지도 말고.”

나한테 바라는 게 왜 이렇게도 많은 걸까?

서태훈 대표와 가깝게 지내지도 말라, 아프지도 말라, 다치지도 말라. 아, 그리고 보니 전에 그런 말도 했었지? 달아오른 내 얼굴은 자기한테만 보여달라고.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왜 이렇게 많이 원해? 자기가 뭐라고…….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낮게 내리깐 그의 검은 속눈썹은 무척이나 길고 예뻤다. 모공 하나 없는 맑은 피부도, 높은 콧대도, 반짝이는 눈동자도. 모두 완벽했다.

이 남자는 부족한 게 뭘까? 자상하지, 얼굴도 잘생겼지, 몸매도 좋지, 침대에서 일도 잘하……!

‘어머, 미쳤나 봐!’

태준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다연은 자신의 앙큼한 상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만 보고 있으면 생각의 끝이 왜 그쪽으로 흐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퍽 인상적이어서 그럴 거다. 몸매는 감명 깊고, 입맞춤은 감격스럽기까지 하고, 그와의 야릇한 행위는 뇌리에 박힐 만큼 강렬했으니까. 그러니 자꾸 야한 생각이 들 수밖에.

‘안 돼! 생각하지 마!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다연은 태준을 보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의 벗은 몸을 머릿속에서 떨치기 위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둑이는 돌돌이. 아, 그런데 이건 보통 남자들이 중얼거리는 거 아니야?’

문득 자괴감이 밀려오고 있을 때였다.

“다 됐어.”

“예? 아, 예.”

그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다연은 다됐다는 말에 놀라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제 손을 홱 빼버렸다.

갑작스럽게 손을 빼는 바람에 태준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연을 쳐다봤다.

‘아, 이런 멍청이.’

제 손을 치료해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고맙습니다, 대표님.”

이내 고맙다고 인사하자, 태준의 표정이 풀렸다.

“아프진 않아?”

“예. 이제 통증은 별로 없어요.”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한 다연은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걸음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무언가의 힘에 눌려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건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내가 할 테니까, 넌 앉아 있어.”

“아뇨. 제가 하던 건 제가 마무리 지을게요.”

손가락 조금 베였다고 상사, 그것도 제가 모시고 있는 회사 대표를 혼자 일하게 둘 순 없었다.

아무리 비서 대행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던 다연이 얼른 일어나 채소를 마저 썰려고 하자, 태준이 그녀의 손을 이끌어 다시 의자에 앉혔다.

“내가 말했지?”

키가 하도 커, 앉은 상태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꽤 젖혀야만 했다.

“그 손 나을 때까지, 내가 다 한다고.”

아래에서 보니 그의 목울대가 꽤 섹시하게 울렁거렸다.

위에서 보나, 아래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이 남자는 어느 각도로 봐도 참 섹시하다. 그래서 맥을 못 추겠고.

“네가 다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키지도 않았어. 앉아 있어.”

단호한 그의 말에 다연은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식탁 앞에 앉은 다연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태준이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글보글 육수 끓는 소리와 탁탁탁 칼질하는 소리가 은근히 허기를 불러왔다.

토요일에 태준과 해장국을 먹은 이후, 다연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속이 쓰릴 정도였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몹시도 배가 고팠다.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식욕을 돋우는 건지, 아니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이가 내려갔기 때문인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참을 수 없는 허기가 강하게 밀려오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드디어 새하얀 찹쌀과 잘게 썬 각종 채소 그리고 고급스러운 성게알이 그득 들어간 죽이 완성됐다.

태준은 맛깔스러운 죽 위에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다연에게 내밀었다.

꽤 큰 그릇에 담겨 있는 죽을 본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 먹으라고요?”

“시식해봐야지.”

“아!”

칼에 손이 베이고, 그에게 정신이 홀리는 바람에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잠시 깜빡했다. 그의 보조로서 재료 손질은 물론 시식까지 해야 하는데 말이다.

숟가락으로 죽과 참기름을 잘 섞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냄새만 맡아도 입안에 침이 절로 고였다.

성게알 한 움큼과 함께 숟가락 가득 죽을 푸자, 하얀 김이 하늘로 향해 치솟았다.

다연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뜨거운 죽을 후후 분 뒤, 입안 가득 죽을 넣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찹쌀과 함께 성게알이 머금고 있던 바다향이 입안으로 물씬 들어왔다.

“으음. 맛있다.”

알록달록 색감을 낸 당근과 호박의 식감도 딱 좋았고, 모든 음식의 향을 어우르는 참기름의 고소함도 적당했다.

태준이 해준 요리는 처음 먹어보는데, 그의 레시피가 왜 그렇게 사랑을 받는지 알 것만 같았다.

게다가 다연은 죽 요리에서 자주 쓰이는 전복보다 성게를 더 좋아했다. 물론 자신의 취향을 모르고 준비한 재료였겠지만, 다연은 그가 해준 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따 집에 가서 해 먹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맛있어요. 성게도 싱싱하고 부드러워서 목 넘김도 좋고, 자꾸 먹고 싶어지는 맛이에요. 메인 메뉴보다 더 인기 많을 것 같은데요?”

다연의 맛 평가에 태준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식 평가를 마친 다연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태준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맛있다면서?”

“네. 맛있어요.”

“근데 왜 먹다 말아?”

“시식 평가 끝났잖아요.”

보통 시식 평가를 위해 음식을 먹을 때는 맛을 알 수 있을 정도만 먹곤 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해왔으니 오늘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정색하며 묻는 건지.

다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태준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먹어.”

“네? 시식은 끝났는데요?”

“그래도 먹어. 오늘 시식 요원은 너밖에 없고, 난 내 요리 버리는 거 극도로 싫어해. 혐오한다고.”

정성껏 한 요리를 버리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래서 시식할 땐 적당량만 하곤 했는데, 뭘 이렇게 많이 했는지.

시식할 사람이 다연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애피타이저용으로 나갈 양이 아니라 1인분 양을 해놓은 것이었다.

물론 죽이 아주 맛있긴 했지만, 태준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시식 외에 그가 해준 요리를 먹고 싶진 않았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바닥을 볼 때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다연이 고민하자, 태준은 그녀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

“하지만 전…….”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굶으래?”

“예?”

“뭐 때문에 얼굴에 티가 날 정도로 굶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먹어.”

내가 굶은 걸 알고 있었어?

“밥 먹고 힘을 내야 싸우든 따지든 할 수 있을 거 아냐?”

내가 싸우고 따질 상대가 그쪽인 건 알고 하는 말인가?

“자, 먹으라니까? 안 먹어? 그럼 내가 먹여준다?”

다연이 숟가락을 쥐지 않자, 태준이 먹여줄 태세였다.

“제, 제가 먹을게요.”

이런 상황에서 오글거리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던 다연은 재빨리 그의 손에 들린 숟가락을 낚아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남은 죽을 다 먹고 메뉴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기로 했다.

다연은 태준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을 살짝 떠서 입안에 넣었다.

“으음.”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죽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요리 좀 한다는 서원이도 이 정도의 맛을 내지는 못했다.

꼭꼭 씹으며 맛을 보던 다연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정식 코스에 애피타이저로 나갈 요리치고는 값비싼 성게 양이 너무 많았던 것이었다.

“근데 대표님. 판매할 때 성게는 얼마나 나갈 예정이세요?”

“응?”

태준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떼르륵 굴렸다.

“뭐, 대강 이 정도?”

“그렇게나 많이요?”

“너무…… 많은가?”

“그래서 단가가 나오겠어요?”

태준이 가리킨 성게의 양을 본 다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 정도 양이면 인심 좋은 정도가 아니라 회사를 거덜 낼 정도였다.

“메인 메뉴도 아니고 애피타이저에 성게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닐까요?”

“그래?”

잠시 고민하던 태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성게 죽은 포기.”

“예?”

너무 빠르고 단순한 포기 선언에 다연은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 맛을 내기 위해서는 꽤 오랫동안 연구하며 머리를 싸맸을 거다. 그런데 왜 저렇게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는 거지?

순간 아까 태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

“누가 그렇게 굶으래?”

“뭐 때문에 얼굴에 티가 날 정도로 굶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먹어.”

그럼 설마……?

“이거 혹시 저 먹으라고 만드신 거예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게 많은 건가? 단가 계산은 생각도 못 했는데.”

태준은 다연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예? 아니죠?”

애초부터 성게 죽을 메뉴로 내놓을 생각이 없던 태준은 대답 없이 빈 그릇을 보며 빙긋 웃었다.

***

다음 날.

출근하던 다연은 로비에서 태준과 마주쳐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손은?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태준은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다연의 손을 보며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다연은 어제 조리실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칼에 베인 제 손을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던 것, 아파하는 저를 보며 더 아파했던 태준의 표정, 메뉴에 내놓지도 않을 요리를 만들어 제게 먹였던 것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마음이 없었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바람둥이라서 자상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태준의 눈과 마주쳤다.

진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그의 눈빛에 다연은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직접 물어보자. 정말 날 수많은 섹스 파트너 중 한 명으로 생각하느냐고.’

속으로 끙끙 앓느니 회사 대표고 뭐고 그냥 묻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깨끗하게 마음 정리를 하든, 다시 그를 끌어안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대표님. 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무실 들어가서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오빠!”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다연의 심기를 거슬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처음 보는 여자가 태준에게 다가와 살갑게 인사했다.

“이제 출근해? 한참 기다렸잖아.”

교양과 애교가 뒤섞인 묘한 목소리였다.

‘분명 들어 본 목소린데. 어디서 들었더라?’

다연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 태준이 딱딱하게 물었다.

“회사까지 웬일이야?”

“토요일에 오빠한테 못 주고 간 게 있어서.”

여자의 새빨간 입술이 움직인 순간, 다연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토요일의 여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