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18화 (18/74)

18화

태준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조리실이었다.

다연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다연은 금세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까는 계속 시선을 피하느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태준은 오늘도 말끔했고 멀쩡해 보였다. 자신은 주말 내내 그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는데, 멀쩡한 그를 보고 있자니 화가 울컥 치솟았다.

그의 잘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그렇다고 왜 멀쩡하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 회사의 대표였고, 그녀가 모시고 있는 상사였으며, 오늘 아침 다연은 의 직원이라는 이유로 값싼 이율로 무려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토요일에 그에게 심한 말을 해가며 이별을 고한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의 얼굴이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다연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가라앉히며 물었다.

“조리실에는 왜 오신 건가요?”

“앞으로 사무실이 아닌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무슨 뜻인가 생각하던 다연은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태준은 회사 경영이 아닌 메뉴개발을 주로 맡을 테니, 사무실보다는 조리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을 거다.

“한정식 코스 메뉴로 죽을 넣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회사는 올 하반기 을 대표하는 한식 브랜드를 론칭할 예정이었다.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식욕을 돋울 수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메뉴개발팀에서 제일 실력 좋다더니 말이 잘 통하는군.”

예상치 못한 그의 칭찬에 다연은 얼떨떨해졌다.

다연은 워낙 일을 잘하는 스타일이었기에 상사에게 칭찬받는 건 일상이었다. 물론 박 팀장에게 찍힌 후로는 칭찬에 굶주려 있었지만.

어쨌든 칭찬에 익숙한 그녀가 얼떨떨해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칭찬해준 사람이 바로 서태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사고로 그와 이상하게 얽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다연이 존경하는 요리 연구가였다. 다연은 여전히 그의 레시피를 좋아했고, ‘서태준 레시피 애찬론자’였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자, 이거 매.”

태준은 앞치마 하나를 다연에게 내밀었고, 다연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앞치마는 왜……?”

“일해야지?”

일? 무슨 일?

“상사가 일하는데 그냥 놀고 있으려고? 연 비서는 내 보조를 해야 하지 않겠어?”

태준은 수북이 쌓여 있는 손질되지 않은 채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래서 데리고 온 거구나. 재료 손질하라고.

다연은 그제야 태준이 왜 자기를 조리실로 데려왔는지 이해하며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고, 태준은 냄비에 물을 얹고 물을 끓였다.

다시금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그 대신 탁탁탁 채소 써는 소리와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대신해 두 사람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다연은 커다란 무를 썰며 힐끔 태준을 쳐다보았다.

대충 걷어 올린 조리복 소매 밑으로 근육질의 그의 두 팔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수트를 입고 있는 그도 멋있었지만, 조리복을 입고 열정적으로 요리하는 서태준은 더 멋있었다.

다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토요일에 저 남자는 나와 헤어지고 그 여자를 만났을까? 만나서 뭘 했을까? 그 여자는 누굴까?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정말 내 추측대로 그는 요일별로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난 왜 이렇게 저 남자를 신경 쓰는 걸까?

같이 자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귀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마음이 아닌 몸이 얽히고설킨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 남자를 신경 쓰는 걸까? 두 눈은 왜 저 남자면 쫓고, 두 귀는 왜 저 남자의 목소리만 들으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의 사이를 끊어내기 위해 모진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다연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오늘도 몇 번이나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난 그쪽한테 뭐냐고, 그쪽 정말 바람둥이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실을 들을 용기가 없었으니까. 정말 그의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일까 봐, 무서웠으니까.

“앗!”

정신을 놓고 칼질하던 다연은 알싸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새하얀 무 위로 선홍빛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꽤 깊게 베였는지 피는 멈추지 않았고,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다연은 키친타올로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피를 막고는 연고라도 바를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구급상자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녀는 커다란 벽에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앞을 막은 건 다름 아닌 태준의 넓은 가슴이었다.

다연은 피가 흥건해진 키친타올을 꽉 움켜쥐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을 내려다본 태준의 짙은 속눈썹이 아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제가 아픈 것처럼 반듯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그쪽이 다친 줄 알겠네요.

요리하다 보면 칼에 베이고 불에 데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다연은 태준의 반응이 과장되게 느껴졌다. 뭐, 물론 지금은 좀 많이 베이긴 했지만.

“저 잠시 연고 좀 바르고…….”

‘……와서 마저 썰어놓겠습니다.’라고 말하려던 다연은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깐 사이 가까이 다가온 태준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다친 손가락을 그의 입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연은 손을 뺄 겨를도 없었다.

“아, 아니 그걸 왜……?”

다연은 그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당혹스러움도 잠시. 다친 손가락 끝에 여리디 여린 그의 입안의 속살이 느껴져 움찔하고 말았다.

태준은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 물고 혀끝으로 상처를 조심스럽게 핥고 있었다.

마취제가 섞이기라도 한 듯, 그의 혀가 쓸고 간 자리는 따끔거리던 통증이 차츰 잦아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입속에 들어가 있는 손가락이 묘하게 색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피가 묻어 있는 손가락을 정성스럽게 핥는 그를 보니 꼭 뱀파이어 같았다. 곱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도 그렇고,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새하얀 피부도 그렇고, 피처럼 새빨간 입술도 그렇고,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도 그렇고, 내 마음을 단숨에 홀린 것도 그렇고.

주말 동안 미친 듯이 미웠던 그가 왜 지금은 이토록 좋은 걸까?

다연은 자신의 손가락을 열심히 핥고 있는 태준을 바라보며 결론 내렸다.

……이 남자한테 홀린 게 틀림없어.

전에는 그저 그에게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가 뻗은 마수에 걸려든 것 같았다.

엊그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저 입술에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 걸 보면 틀림없었다.

다연이 들끓는 제 욕망을 겨우 참아내고 있을 때, 태준은 자신의 입안에 물고 있던 그녀의 손을 빼내었다.

“기다려. 약 발라줄게.”

“제가 해도…….”

“넌 가만히 있어.”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화가 난 것만 같았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친 자신의 손가락을 거리낌도 없이 입에 넣을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느냐 말이다.

정말 태준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같이 있으면 한없이 좋다가도 또 한순간에 틀어져 버리는,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남자.

“앉아.”

구급상자를 가져온 태준은 다연을 의자에 앉혀놓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가 할게요.”

엊그제 그에게 모진 소리를 했던지라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그녀를 꼼짝도 못하게 했다.

“가만히 있어. 꽤 깊게 베였어.”

그의 말처럼 다연의 손가락은 살점이 덜렁거리고 있었고, 막상 제 눈으로 상처를 보니 더 아프게 느껴졌다.

다연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태준은 꽤 능숙하게 치료를 시작했다.

소독약이 손끝에 닿자 다연의 입에서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파?”

“왜요? 아프다고 하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하려고요?”

그가 너무 진지하기에 다연이 피식거리며 유명 드라마 속 대사로 농담을 건네자, 태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 네가 아픈 거 보니까 난 아파 죽을 것 같아.”

“……!”

“그러니까 아프지 마.”

“…….”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절대 다치지도 말고.”

아니, 이 남자가 정말 왜 이럴까? 아침에도 비슷한 말을 하더니.

정색하며 오글거린다고 한마디 하려던 다연은 태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자신을 치료하고 있었다.

핏줄이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행여나 다연의 상처에 닿을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상처 부위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물 닿으면 흉터 남을 수도 있어.”

“안다고요.”

“물 닿을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왜요? 물 닿을 일 있으면 다 해주시게요?”

“손 나을 때까지 내가 다 해.”

그의 말에 다연은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물 닿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해준다니. 세수하고 양치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 당장 그의 보조를 하기 위해서도 손에 물을 묻혀야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말하면 다 해준다고?

다연은 괜히 하는 소리겠지 싶어 넘기려고 하자, 태준이 다시금 그녀에게 확인했다.

“나 농담 아냐.”

“예, 예. 그러시겠죠. 이왕이면 제 머리도 감겨주시겠어요?”

다연이 싱거운 농담을 하며 상황을 넘기려고 하자, 태준이 그녀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연다연. 나 진심이야.”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기에 충분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냉철함과 동시에 뜨거운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지금도 네가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 미쳐버릴 것 같다고.”

다연은 지독하게 매력적인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건 그쪽이 아니라 나인 것 같은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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