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공금,갠소, IMHA]
태훈은 제 앞에 선 다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살짝만 건드려도 반응을 해 오는 태준을 보아하니 다연에 대한 마음이 꽤 진지한 모양이었다.
10여 년 전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여자에게 관심이 없던 태준이었다. 여자와 사귀기는커녕 그 흔한 썸도 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뭐기에 빙하처럼 꽝꽝 얼어붙었던 동생 녀석을 한 번에 녹였을까?
다연이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는다. 능력 있고, 예쁘고, 성격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숱한 여자를 만나왔던 태훈이 보기에 다연은 평범하기만 할 뿐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밖으로 나간 다연이 그를 불렀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아,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요, 연 비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던 태훈의 얼굴은 다연이 멀어지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
업무 준비를 하던 다연은 문득 행동을 멈추고 통유리 너머 태준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사무실은 주인처럼 아주 말끔해 보였다.
오늘부터 그와 매일같이 이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봐야 할지,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다연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당하게 굴어야지 하다가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몸을 보면 금세 마음이 흔들렸다.
너무 짧은 시간 자신을 흔들어놔서 혼란스럽고 또 너무 많이 흔들리는 자신을 보니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만약 회식 때 태훈이 태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가 바람둥이라는 사실도 몰랐겠지?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좋다고 어울렸을 거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가슴은 그를 원하는데, 얼음처럼 차가운 머리는 그를 밀어내라고 아우성쳤다.
가슴과 머리가 각자 다른 명령어를 입력하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휴우. 정신 차리자. 정신!”
고개를 저어 사념을 떨치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태준이었다. 그는 황홀하리만큼 완벽한 수트발을 장착한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치명적인 외모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다연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
다연이 인사를 건넸지만, 태준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태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허! 뭐야?”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다연은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주말 내내 울었던 흔적을 지우느라 오늘 아침 얼음찜질을 몇 번이나 했고, 힘든 마음 겨우 달래가며 출근했으며, 애써 미소 짓는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인사도 안 받아주다니.
“아무리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 좀 하지?”
공사 구분은 해야 한다며 아픈 가슴 쥐어짜며 애써 괜찮은 척하며 인사했는데, 태준이 이렇게 나오니 맥이 확 빠져버렸다.
두 다리가 후들거려 자리에 앉았다. 통유리 너머로 태준이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겉옷을 벗었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다연은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토요일에 그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다연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밥 한술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도 힘들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이틀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가 좋아 미치겠다고 아우성치는 가슴을 학대하느라. 넌 등신같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남자를 왜 좋아하느냐고, 자존심도 없느냐고 자학하느라. 괜찮다고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고 자신의 인생을 달래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는데, 퀭한 눈이 뻐근해서 죽을 지경인데, 물도 못 마신 속이 쓰려 미치겠는데! 저 남자는 괜찮은가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저도 모르게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아,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고 있을 때, 태준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다연의 책상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그쪽은 나한테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난 공사 구분 확실하게 할 거야. 최대한 예의 지킬 거라고. 애처럼 징징대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당찬 눈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태훈이 형과 가깝게 지내지 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다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가 사촌 형인 태훈을 경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전에도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자기는 이 여자 저 여자 요일별로 만나고 있으면서, 태훈과 가깝게 지내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라고.
태준은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닫고는 짧게 대답했다.
“질투 나니까.”
순간 다연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지금 뭐가 난다고? 질투? 왜?
의문도 잠시. 뒤로 이어진 말은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말려 죽이기 싫으면 태훈이 형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말려 죽어? 왜? 내가 서태훈 대표님이랑 가깝게 지내면 왜 그쪽이 말라죽는데? 난 그저 그쪽의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일 뿐이잖아! 그런데 왜?
머리 위로 묻고 싶은 말이 둥둥 떠다녔지만, 태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바람에 아무런 질문도 꺼낼 수 없었다.
“임원들 오찬 회의 몇 시지?”
“11시 30분입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들고 있던 재킷을 입었다.
“갔다 올게. 점심 꼭 챙겨 먹고.”
“다녀오십시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던 다연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버티듯 겨우 서 있던 다연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질투 난다는 그의 한 마디가 다연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망할 놈.”
공사 구분 확실하게 하려는데, 왜 이상한 말을 해.
“썩을 놈.”
생긴 건 뭐 저렇게 잘 생겨서, 왜 자꾸 눈에 밟혀.
“나쁜 놈.”
너 같은 놈 잊으려는데, 왜 자꾸 흔들어?
“그리고 난 왜 자꾸 흔들리냐. 하아.”
***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때, 유미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거꾸로 해도 연다연. 밥 먹자.
다연은 힘겹게 키보드를 눌렀다.
-나 오늘은 입맛이 없네. 언니 맛있게 먹고 와.
-왜? 오늘 너 좋아하는 성게 비빔밥 나오는데, 같이 가자.
-미안. 나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유미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곧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무슨 일 있어? 작은 대표님이 네 걱정 많이 하시던데? 사실은 조금 전에 작은 대표님 만났는데, 너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 어디 아파?
키보드를 두드리던 다연의 손이 멈칫거렸다.
잠시였다. 그가 자신에게 눈길을 주었던 것은. 그런데 그 잠깐 사이 내 상태를 체크한 건가? 오전 내내 그렇게 괜찮은 척 굴었는데, 이미 다 눈치 채고 있었다니.
-작은 대표님이 네 걱정 엄청 하시던데. 아프면 약 사다 줄까?
“치.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챙겨주든가…….”
도대체 그 남자 속을 모르겠다. 정말 날 걱정해주는 건지, 아니면 그저 어장 관리를 하는 건지.
***
그 비싼 요리를 먹는데도, 태준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회사 경영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태준의 머릿속에는 다연만 가득 차 있었다.
하루 사이 다연의 얼굴은 퀭해질 정도로 안 좋아 보였다. 밥을 먹지 않았는지, 보기 좋았던 얼굴은 볼품없어졌고 온몸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었길래 밥까지 못 먹느냐고.”
웬만하면 밥 거르는 일이 없던 다연이었다. 열이 펄펄 끓어도 죽 한 그릇은 뚝딱 해치웠던 그녀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하루 못 본 사이 얼굴이 홀쭉해져 있다니.
걱정되는 가운데, 아침에 본 장면을 떠올라 화가 울컥 치솟았다.
다연은 오늘 온종일 자신을 못 본 척하고,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피했고,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런데 태훈에게는 그렇게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그것도 역대급으로 예쁘게.
그녀의 행동을 보면 제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왜인지 알 수 없었다.
태준은 제 손에 들려 있는 약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는 아까 식사를 마치자마자 약국에 들러 온갖 약을 사 왔다. 다연의 상태를 모르기에 있는 약을 모두 쓸어온 것이었다.
13층에 도착한 태준은 제 방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결심한 듯 안으로 들어간 그는 다연의 책상 앞에 걸음을 멈췄다.
어딜 갔는지 다연은 자리에 없었고 그녀의 책상 위에는 샌드위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태준은 샌드위치 위에 붙어 있는 쪽지를 읽어내려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밥은 챙겨 먹어. 유미가.
안 그래도 핼쑥해 보이는 다연이 걱정스러워 유미에게 부탁했는데, 여태 밥도 안 먹었다니.
태준은 갑자기 화가 울컥 치솟았다.
다연이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을 괴롭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제게 화를 내지 왜 애꿎은 몸을 괴롭히느냐 말이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도 모르고.
“오셨습니까?”
다연이 탕비실에서 나오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태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밥은?”
“먹었습니다.”
“뭐 먹었는데?”
“샌드위치 먹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유미가 사준 샌드위치는 그대로였으니까.
화가 난 태준은 화를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연 비서. 따라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