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월요일 아침.
태준은 출근하는 차 안에서 다연이 한 말을 떠올려 보았다.
“전 남자 서태준한테 관심이 없어요. 내 스타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고.”
그때 분명 다연은 검지 손톱으로 엄지손톱을 뜯고 있었다.
“돈 좀 있는 남자인가 싶어 꼬셔보려고 했는데, 회사 대표는 좀 불편하네요.”
그 말을 할 땐 아랫입술까지 깨물었지, 아마?
“그러니까 앞으로는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 말고,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났으면 해요.”
마지막엔 손톱을 뜯으며 아랫입술을 깨물기까지 했고.
그건 다연의 버릇이었다. 거짓말을 할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
그러니까 다연은 남자 서태준에게 관심이 있으며, 자신은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이고, 또 앞으로 남자와 여자로 만나고 싶다는 얘기다.
“아직도 거짓말에는 소질 없네.”
토요일에는 예상보다 인경이 빨리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연을 그렇게 보냈지만, 주말 내내 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다연은 뭐 때문에 갑자기 화를 내고 돌아간 걸까?
다연이 자신의 핸드폰을 봤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태준은 그녀가 왜 화를 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볼까 아니면 집으로 찾아가볼까 하고 여러 번 고민했지만 참기로 했다.
아무리 연다연이 제멋대로 구는 스타일이라지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필요했다. 서태준이 아는 연다연은 이럴 때 무작정 묻고 따지는 것보다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정리하는 게 더 필요한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태준은 다연이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한 후에 그녀를 위로해주면 된다. 적어도 서태준이 아는 연다연은 그랬으니까.
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액셀을 밟았다.
***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기 위해 총무과를 찾은 다연은 제게 질문을 던지는 김 과장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시각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몇 없었지만, 몇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연에게 꽂혔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데 이렇게 대출을 많이 받아?”
내가 너한테 대출받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니?
다연은 김 과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대답했다.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요.”
“연 대리, 시집가는 건 아니고?”
김 과장이 기분 나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아래위로 훑어보는 불쾌한 눈빛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김 과장에게 밉보여 마냥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다.
오늘은 태준의 비서로 일하기로 한 첫날이었다. 그러니 빨리 대출을 받고 새로운 업무를 준비해야 했다.
“개인적인 일이라 다 말씀드릴 순 없고, 신분증이랑 통장 필요하죠?”
미리 준비해온 서류와 통장을 꺼내려는데, 김 과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성격 좀 죽여.”
난데없는 말에 서류를 꺼내던 다연의 손이 멈칫했다.
“팀 버리고 단독으로 레시피 냈다며?”
그제야 김 과장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딴지를 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박 팀장 그리고 강주은 대리와 친하게 어울리는 사이였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좋은 소리를 못 들었겠지.
“성격이 그러니까 시집도 못 가는 거야. 남자들, 연 대리 같은 여자 싫어해. 깐깐하지, 꽉 막혔지, 그렇다고 여자가 나긋나긋 하기를 하나. 지 잘난 줄 알고 남자를 아래로 보고. 여자가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지. 얼굴만 좀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나대지 말고…… 잠깐. 연 대리. 지금 뭐 하는 거야?”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리던 김 과장은 책상 위로 쑥 들어오는 다연의 핸드폰을 보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녹음이요.”
“뭐? 내 말을 왜 녹음해?”
“여러모로 쓰일 데가 있을 것 같아서요.”
침착한 다연의 대답에 김 과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뭘 어쨌다고 녹음을 해? 난 당당하다고!”
“네. 그러시겠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특히 제 변호사가요.”
“벼, 변호사? 설마 이거 갖고, 성희롱이니 뭐니 이러면서 고소할 생각은 아니겠지?”
“글쎄요.”
다연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김 과장이 애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렇게 깐깐하고 앞뒤 꽉 막힌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자, 김 과장의 얼굴이 낮술 한 사람처럼 빨갛게 익어버렸다.
“뭐, 뭘 원하는 건데?”
“사과하세요.”
“뭐?”
“사과하시면 없던 일로 할게요.”
그녀의 말에 김 과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지. 내가 말이 좀 심했어.”
김 과장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어린애처럼 1초 만에 후다닥 사과를 끝내버렸다.
억지로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심보인지 김 과장이 시간을 끌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연은 태준이 출근하기 전에 대출을 받고, 엄마에게 송금하는 일까지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방금 자신에게 당한 김 과장이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거 서류가 몇 개 빠졌는데?”
“서류는 빠짐없이 준비했는데요.”
“몇 개 빠졌잖아.”
김 과장은 귀찮다는 듯 쪽지에 필요한 서류를 휘갈겨 적어주었다.
그가 준 쪽지를 본 다연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그녀가 전화까지 해서 알아봤을 땐 필요하지 않다고 한 서류들이었는데, 김 과장이 딴지를 거는 것이었다.
“어떡하나? 오늘은 대출 못 받겠네? 서류 준비해서 내일 다시 와.”
빈정거리는 말투를 보아하니 그가 적어준 서류를 떼어가도 또 다른 트집을 잡을 것 같았다. 다연은 그를 괜히 건드렸다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김 과장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태훈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아이고,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김 과장은 자리에서 허겁지겁 나오느라 벗어놓은 슬리퍼도 제대로 못 신은 채 태훈 앞으로 달려와 연신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태훈은 김 과장의 인사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다연을 보며 물었다.
“연 비서, 아침부터 총무과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그게…….”
대출받는 중이라고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다연이 대충 얼버무리려고 할 때, 김 과장이 나섰다.
“연 대리, 대출받고 있었습니다.”
아, 저 인간 입을 확 꿰매버려야 했는데.
“대출? 연 비서, 대출받으려고요?”
“아, 예.”
괜히 민낯을 보인 기분이 들어 아니라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거짓말해봤자 금방 들킬 것 같아 순순히 대답했다.
오늘 일진 정말 사납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다연의 표정을 살피던 태훈이 뒤편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됐네.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일 보고 와요.”
할 말?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여기서 기다린다고 하시지? 그냥 이따 보자고 해도 될 것을?
다연이 볼일 끝났다고 말하기도 전에 태훈은 자리에 앉으며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려는 그때, 다연보다 더 불편한 얼굴로 태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 과장이었다.
없는 꼬투리를 잡아 다연을 돌려보내려고 했던 그는 갑작스러운 태훈의 등장에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대출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연 대리, 비서 되더니 빽 좋아졌네?”
김 과장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다연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전화를 끊은 태훈은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른 아침 바쁜 그가 왜 자신을 기다린다고 했는지, 어쩐지 다연은 알 것도 같았다.
***
태훈의 등장과 동시에 대출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회사 대표인 태훈이 뒤에 앉아 있자 잔뜩 겁먹은 김 과장은 꼭 필요하다던 서류가 없음에도 모든 걸 처리해주었다.
다연은 괜한 시간 낭비를 막아준 태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덕분에 빨리 처리됐어요. 감사합니다.”
“내 덕분에? 뭐가요? 난 한 일이 없는데.”
게다가 이렇게 모른 척 해주니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언제 제가 밥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밥 사준다는 거 거절 안 해요.”
가볍게 받아치는 그의 농담에 다연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근데 하실 말씀이라는 게……?”
“할 말? 까먹었네. 다음에 연 비서가 밥 사줄 때 얘기할게요.”
토요일에 태준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다연은 주말 내내 밥도 먹지 못했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 울적했던 기분이 태훈의 농담으로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태훈은 다연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말에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왜요?”
“평소에는 연 비서 피부가 반짝거리는데, 오늘은 안 그런 것 같아서요.”
뭘 반짝거리기까지 했겠냐마는 그래도 듣기 나쁘진 않았다.
다연은 푸석해진 얼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잠을 좀 못 잤더니 금세 이러네요.”
잠을 못 잤다고 하기엔 다연의 얼굴이 꽤 많이 상해 있었다. 이틀 사이에 살도 빠진 것 같았고.
더 자세히 물어볼까 고민하던 태훈은 고개를 돌리다가 이제 막 출근하는 태준을 발견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던 태준은 태훈과 함께 있는 다연을 보고 걸음을 멈춰 섰다.
꽤 멀리 서 있음에도 태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사촌 동생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대표님, 엘리베이터 도착했습니다.”
“네. 타죠.”
태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다연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연 비서, 잠깐만.”
다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태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뭔가를 떼어주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의 손길은 다정했고, 다연을 보는 눈빛은 꽤 끈적해 보였다.
“먼지가 붙어 있었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엇! 감사합니다.”
태훈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다연의 얼굴에는 당황과 부끄러움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태준이 좋아하는 표정이자, 자신에게만 보여줬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태준이 미간을 좁히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자, 태훈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태준과 태훈의 눈이 마주쳤다.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두 남자의 눈빛은 마치 사나운 맹수들 같았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고, 넓은 로비에 선 태준은 1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태훈을 바라보던 다연의 얼굴이 자꾸만 맴돌았다. 살짝 상기되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던 다연의 얼굴이 말이다.
태준은 다연의 그런 얼굴을 보면 미친 듯이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런데 태훈을 그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미쳐 돌 수밖에.
“그 표정은 나한테만 보여달라니까.”
태준은 잔뜩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