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15화 (15/74)

15화

‘토요일의 여자?’

오늘이 바로 토요일이었다. 그럼 저 전화는 오늘 만날 여자에게서 온 건가? 혹시 요일별로 여자를 바꿔가면서 만나는 건가? 월화수목금토일. 만나는 여자가 매일 다른 건가? 그게 아니면 월수금, 화목토. 뭐 이런 건가?

전화 한 통 때문에 다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중요하다는 그의 말에 일말의 희망이 보였는데,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던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한 현재라는 건 이런 거였는지도 모른다. 과거 한 여자만 사랑했던 그때보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지금이 더 좋다는 것일지도.

생각에 잠긴 사이 전화가 끊겼다.

식당 안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다연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태준, 그 남자에 대한 생각.

그 남자에게 난 무엇일까? 그의 핸드폰에 난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을까? 그 남자는 날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그저 며칠 데리고 놀 여자로?

♬♪♩♪♩♬♪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다연은 흠칫 놀라며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액정에 적혀 있는 [토요일의 여자]라는 글자가 다연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다연은 가느다란 손을 들어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자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다연을 후벼팠다.

-오빠! 어디야? 나 오빠 집인데, 아침부터 어딜 간 거야?

오빠? 집? 아침부터 집에 들락거릴 사이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뒷골이 띵했고, 손도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남자를 뭘 믿고 함께 잔 것도 모자라 집에까지 들이다니.

아랫입술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고 있을 때, 태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다연은 전화를 끊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만 일어날까?”

태준이 다정하게 말하자, 다연은 서둘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궁금했다. 그에게 난 어떤 여자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다연은 슬쩍 그를 떠봤다.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

다연이 묻자, 태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가봐야 해.”

“아, 선약.”

선약이라는 건, 토요일의 여자와 한 거겠지? 아침부터 당신 집에 가 있다는 그 여자와.

“잠시만요. 저도 화장실 좀.”

다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하며 자리를 옮겼다.

화장실에 들어온 다연은 차가운 물을 틀어 세수부터 했다. 고개를 들자, 몹시도 초라한 여자가 거울에 비쳤다.

예전엔 꽤 괜찮은 여자인 줄 알았는데, 주인 없는 사이 남의 전화를 대신 받질 않나, 잠자리 한 번에 마음마저 달라는 질척거리는 여자였다니.

“너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 까짓것 섹스 파트너 하자고 해. 너도 즐거웠잖아?”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지만, 다연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마음 없이는 잠자리를 가질 수 없는 여자라는 걸.

그러니 더 답답했다. 어제 그제는 마음 없이도 잘 즐겨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어제와 그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최소한 미래가 열려 있는 관계라면 몰라도 요일별로 여자를 갈아치우는 남자와는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예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다연은 조리개발팀원이 아닌, 서태준의 비서로 일해야 한다. 그럼 하루 종일 그와 얼굴을 마주 보며 부대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단 한순간도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둬야겠어.”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이지만, 약간의 퇴직금과 실업급여가 나오니 다른 회사를 구할 동안에는 여유가 있을 거다.

되도록 빨리 옮길 회사를 알아봐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화장실을 나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다연은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엄마가 딸한테 전화도 못 해?

“토요일엔 모임이다 뭐다, 바쁘다고 전화도 잘 안 받았으면서?”

다연과 남동생 다훈이 독립한 후로 엄마는 자신의 삶을 즐기며 지내고 계셨다. 평일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노래 교실을 다녔고 토요일에는 등산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전화를 걸면 산 타느라 힘드니 이따 전화한다고 말하곤 했으니 어쩐 일이냐는 말이 튀어나갈 수밖에.

-으응. 내가 그랬나…….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하아.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한숨을 쉬는지, 다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마가 한숨 쉬는 이유는 딱 하나였으니까.

“다훈이 그 자식 또 사고 쳤어?”

-아니, 사고라기보다는…….

어느새 엄마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마치 엄마가 잘못하기라도 한 듯.

-다훈이 걔가 잘못한 게 아니고, 다훈이 친구 걔 있잖아. 걔가 글쎄…….

“됐어.”

잘못한 것도 없이 풀 죽어있는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었고, 정신 못 차리는 동생 녀석의 핑계도 듣기 싫었다.

“얼마면 돼?”

다연이 직접적으로 묻자, 엄마는 미안한 듯 말했다.

-3천…….

“허!.”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지만, 이건 엄마가 아닌 동생 녀석에게 뱉어야 할 말이었다. 못해준다고 하면 엄마는 또 여기저기 구걸하고 다니겠지. 그 꼴은 더 보기 싫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응. 그럼 마지막이지. 내가 다훈이 녀석 혼쭐을 내놓을게. 근데 다연이 너 돈은 있어?

“내가 돈이 어딨어?”

사업한답시고 동생이 사기를 당한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때마다 돈을 해주는 바람에 오피스텔 보증금도 고작 몇 백만 남아 있었다.

“끊어.”

돈 나올 구멍은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은 직원 복지가 좋은 편이었다. 직원대출 이자가 쌌으니까. 대출받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지.

사표를 쓸 생각이었던 다연은 마음을 고쳐먹고 밖으로 나갔다.

“나왔어?”

“…….”

“다연아,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내가 누군지 기억…….”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태준이 어렵게 입을 열려는 찰나.

“서태준 대표님.”

다연이 딱딱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검고 말간 그의 눈동자가 다연과 마주쳤다.

아마도 [토요일의 여자]에게 온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저 남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겠지. 그리고 영화를 보고 다른 연인들처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하거나 아니면 또 몸을 섞었겠지.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죄송합니다만,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딱딱한 다연의 말투에 불길함을 감지한 태준의 검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다연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렇게 예쁜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으면 그를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대표님이라서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사실 대표님 제 취향 아니에요.”

다연은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적인 관계는 여기까지만 하죠. 월요일부터는 의 서태준 대표와 연다연 비서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태준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를 쫓았다.

“다연아!”

또 그렇게 부른다. 왜 그는 ‘다연 씨’나 ‘연 비서’가 아닌, ‘다연아’하고 친근하게 부르는 걸까? 사람 마음 흔들리게.

하지만 다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뜨며, 냉정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대표님?”

“너야말로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면…….”

“잘못한 것 없으십니다.”

“그럼 왜 그래? 밥 잘 먹었고, 우리 방금까지 좋았잖아.”

좋았다는 말에 다연은 실소가 터졌다. 그의 말처럼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해를 못하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에 태준은 다연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전 남자 서태준 씨한테 관심이 없어요. 내 스타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고.”

“…….”

“돈 좀 있는 남자인가 싶어 꼬셔보려고 했는데, 회사 대표는 좀 불편하네요.”

“!”

“그러니까 앞으로는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 말고,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났으면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다연은 냉랭하게 말한 뒤,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자신을 좇는 게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연은 일곱 개의 요일 중 한 요일의 여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일주일 내내 자신을 바라는 남자였으니까.

“됐어. 잘 된 거야.”

어떻게 만난 지 고작 이틀밖에 안 된 남자한테 마음을 줄 수 있는 건지. 나도 미친 년이지. 돌았지.

자신을 호되게 혼냈지만, 다연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고 눈앞까지 뿌옇게 변해버렸다.

한편, 홀로 남은 태준은 멀어져가는 다연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분위기는 좋았다. 아침에도 사랑을 나누었고, 밥 먹을 때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몇 번이나 웃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러는 걸까?

“하아. 연다연. 여전히 제멋대로군…….”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토요일의 여자]라고 적혀있는 발신인을 보고 태준은 인상을 구겼다. 대체 [토요일의 여자]는 누구고, 누가 나 몰래 이렇게 저장을 해놓은 거란 말인가?

태준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오빠,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인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인경?”

-오빠, 우리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었어?

잊었을 리가.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왔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약속은 저녁이었잖아.”

-오빠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왔다고? 어딜?”

-어디긴 오빠 집이지.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아니, 지금 집에 들어갔다고?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서태준 비밀번호 뻔한 거 아니야? 1231

“야, 김인경 너!”

-오빠앙. 빨리 와앙. 보고 싶어.

“하아. 근데 네가 내 핸드폰 만졌어? 네 이름이 이상하게 저장돼 있는데?”

-당연히 내가 저장했지.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태준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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