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침에 눈 뜬 다연은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가 묵직하게 자신을 누르는 무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그의 손이 자신의 가슴 위에 얹어져 있었다.
하얗고 기다란 손은 꽤 예뻤지만,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칼에 베이고, 불에 데인 손.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썼는지 보여주는 상처들이었다.
다연은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 하얀 얼굴에 내려앉은 긴 속눈썹, 높은 콧날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어제 밤새도록 자신의 몸을 간질였던 입술.
저 붉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핥았고, 가슴을 물고, 어깨를 빨고, 허리 위를 지분거렸지. 그리고 내 두 다리 사이를 입 맞추었던…… 하아…….
어제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고, 하체는 달뜬 듯 묘한 느낌이 들며 그녀를 흥분시켰다.
남자와 관계를 하며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엊그제야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제는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도, 그의 숨결도, 그의 손길도, 입맞춤도 모두 기억났다. 마치 동영상이라도 찍어놓은 듯 자세하고 선명하게 말이다.
다연은 아이처럼 제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흐릿한 기억 저편에 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연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 나는 건 아마도 그가 대한민국 제일가는 비주얼 배우를 닮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니. 그 배우보다 더 잘생겼나?
다연은 실크처럼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태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쾌락을 하룻밤에 몇 번이나 선사해준 남자. 고지식한 연다연의 금기를 몇 번이나 깨버린 남자.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남자…….
“나, 그쪽한테 흔들리는 것 같은데…….”
태준은 깊게 잠든 모양인지,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
“흔들리는 내가 좀 두렵네요.”
이 남자가 나한테 바라는 건 섹스뿐이겠지?
다연은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썸도 타고,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리고 사랑도 하고…….
한참 동안 태준을 바라보던 다연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는 내내 온갖 잡념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밖으로 나오자 싹 사라졌다.
“좋은 아침.”
태준이 아침 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흠. 보드라워.”
그는 다연의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던 다연의 몸에 그의 손이 닿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침대에 나밖에 없어서 깜짝 놀랐어. 네가 또 도망간 줄 알고.”
어제 침대 위에서는 무척이나 어른스럽더니, 이럴 땐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는 다연의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더니 조금 더 밑으로 내려와 그녀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아아, 거긴…….”
다연이 몸을 살짝 돌리려고 하자, 태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여기 왜 이렇게 됐어?”
사실 다연의 몸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오른쪽 가슴과 등 사이에 이어진 상처.
“어렸을 때 사고 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꿰맨 자국이에요.”
그 상처 때문에 수영장도 가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노출이 있는 옷은 입지도 않았다. 어쩌면 전 남자친구들과 섹스를 즐기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잠자리를 시도했을 때, 전 남자친구는 그녀의 상처가 징그럽다고 말했다. 성형 수술을 하라고도 했던가?
그때 다연은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덧대어진 기분이었다. 사고 때 받았던 고통만큼이나 아픈 말이었다.
다연은 손으로 상처를 가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태준도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아서…….
하지만 태준은 벗어나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에 입을 맞추고 핥아주었다.
“많이 아팠겠네…….”
태준은 참 위험한 남자였다. 순식간에 남의 마음을 이렇게 후벼 놓으니까.
“흐읏.”
그의 입맞춤은 또 한 번의 행위로 이어졌고, 꽤 오랫동안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두 사람은 배고픔 때문에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태준의 옷은 바짝 말라 있었다.
“뭐 먹을까?”
태준이 묻자, 다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해장국이요.”
두 사람 모두 연달아 이틀 동안 술을 마셨으니, 해장이 절실했다.
“해장국이면 양평 해장국?”
“양평 해장국!”
거의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해장국 먹을 줄 아시네요.”
“초코 우유로 해장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러고 보니 묵은지 닭볶음탕 먹을 때부터 입맛이 참 비슷했다.
집 근처 해장국집에 도착한 다연은 해장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해장국이 나오자, 다연과 태준은 거의 동시에 매운 고추를 집었다.
“대표님도 해장국에 청양고추 넣어요?”
“그래야 칼칼하고 시원하지. 먼저 넣어.”
다연은 숟가락 가득 청양고추를 퍼서 해장국에 넣은 뒤 잘 섞어주었다. 그러자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아, 맛있겠다.”
다연은 국을 퍼서 맛을 보고는 하얀 쌀밥을 가득 푼 뒤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여기 선지가 엄청 싱싱하네?”
“네. 사장님이 매일 새벽 마장동에서 떼오신대요.”
“역시. 콩나물도 직접 키우시는 것 같은데?”
“사모님이 키우신대요.”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흘러갔다.
해장국의 재료, 재료 공수하는 방법, 식당의 역사와 오고 가는 손님의 연령대와 성별까지. 밥 먹는 내내 쉴 틈 없이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는 일과 관심사가 같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와의 대화가 편했다. 온종일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와. 속이 확 풀리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다연은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운 후에야 식사를 마쳤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커피 맛있게 하는 데 아는데.”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연은 지갑을 들고 해장국집 문 앞에 놓인 커피 자판기 앞에 섰다. 그리고 100원짜리 두 개를 넣은 후, 밀크커피 두 잔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카페 가는 거 아니었어?”
“에이. 해장국 먹는 법을 잘 모르시네요.”
“응?”
“해장국 먹은 뒤에는 다방 커피 한 잔 마시는 거라고요. 달달한 커피 한 잔 마셔야 진정한 해장이 되는 거라고요.”
다연이 빙긋 웃자, 태준은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따라 웃었다.
커피를 마시던 다연은 문득 태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태준의 첫사랑은 어떤 여자였을까? 도대체 어떤 여자였기에 저렇게 완벽한 남자한테 상처를 준 건지…….
“저기…….”
다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대표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커피를 홀짝이던 태준이 눈을 들어 다연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종이컵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검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는 궁금증 가득한 다연의 얼굴이 비쳤다.
“혹시 태훈이 형이 무슨 말…… 했어?”
그의 질문에 다연은 당황해서 횡설수설 말했다.
“아뇨. 큰 대표님이 왜 그런……. 그냥 궁금해서요.”
다연은 그의 첫사랑에 대해 태훈이 말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뭐 사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준의 반응을 보니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좋아했기에 웃음 가득했던 태준을 한순간에 저렇게 만드는 건지. 태훈의 말처럼 아주 대단한 여자였나보다.
다연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은근한 질투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남자한테 나는 그저 섹스 파트너겠지?’
태준에게 첫사랑은 그야말로 ‘사랑’의 대상이겠지만, 자신은 그저 ‘섹스’의 상대일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은 그 여자를 질투조차 할 수 없는 위치였다.
다연은 자신의 처지를 조소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다 드셨으면 나가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내 생명을…….”
태준이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여자.”
“…….”
그의 말에 다연은 할 말을 잊었다. 태훈의 말이 정말이었나보다. 첫사랑 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의대까지 포기했다고 들었는데, 엄청 많이 사랑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까……? 왜 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키는 작고,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눈은 갈색이었는데 엄청 똘망똘망했어.”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다연은 갈색 눈을 똘망거리며 태준의 말에 집중했다.
“음. 그리고 겉보기엔 얌전한데 제멋대로였지. 은근히 고집 있는 스타일? 고집이 어찌나 센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니까.”
태준은 뭘 떠올리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예뻤나 봐요?”
뾰로통해진 다연이 가시 돋친 말투로 묻자, 태준은 턱을 괴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음. 예쁜가……?”
“아니, 그렇잖아요? 예쁘지 않고서야 제멋대로에 똥고집인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러자 태준이 다연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떻게 보면 예쁜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흥. 거짓말. 되게 예쁜가 보네. 그것도 엄청 끝내주게.”
“그러고 보니까 너, 내 첫사랑이랑 닮았다?”
예뻤냐니까 날 닮았다고?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됐어요.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치사해서 안 물어봐.”
“왜? 더 물어봐도 되는데?”
여자는 마음에 둔 남자의 첫사랑과 닮았다는 말을 싫어한다. 첫사랑이라면 모를까. 첫사랑과 닮았다니? 그럼 첫사랑이랑 닮아서 호감이 생겼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나도 내 첫사랑 얘기 안 해줄 거야. 누군 뭐 궁금해서 물어본 줄 아나?”
다연이 씩씩거리자, 태준은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난 궁금한데, 네 첫사랑.”
“그럼 더욱더 말 안 해줘야지.”
“그래. 하지 마. 난 과거보다 지금이 더 중요해.”
“흥. 누가 뭐랬나?”
“잠깐 손 좀 씻고 올게.”
다연은 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좋은가?”
첫사랑에 대해 물은 건 자신이었지만, 그 여자에 대해 얘기하면서 태준의 눈에서는 꿀이 아주 뚝뚝 떨어졌다.
“고3 때 만났다더니 얼굴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시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는데. 흥.”
태준은 마치 그 여자를 보며 말하듯,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만큼 그 여자의 얼굴을 마음에 각인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아.”
한숨을 푹 내쉬던 다연은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과거보다 지금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과거에는 그 여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만 보겠다는 뜻? 아니면 만나보자는 뜻? 사귀자는 뜻?
알쏭달쏭한 태준의 말뜻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아마 태준이 화장실을 가면서 그냥 두고 간 모양이었다.
안 받으면 끊기겠지, 싶었지만 핸드폰은 질기게도 울렸다.
“급한 전화인가?”
혹시 회사나 태훈에게서 온 전화인가 싶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 다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핸드폰 액정에는 [토요일의 여자]라고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