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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13화 (13/74)

13화

현관문을 열자마자 빨래 건조대에 걸어놓은 형형색색의 속옷이 보였다.

“잠깐만요.”

놀란 다연은 태준을 잠시 현관 앞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 건조대를 들고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내가 미쳐. 어쩌자고 남자를 집에 데리고 온 거야.”

자취 생활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남자를 집에 들인 적 없었다. 그동안 사귀었던 남자들은 물론 십년지기 서원이조차도.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저 위험한 남자를 덜컥 데리고 온 건지.

아무리 봐도 다연은 자신이 취한 것 같았다. 술이 아닌, 서태준, 저 남자한테. 그를 만난 지 고작 27시간 정도 됐는데, 그 짧은 시간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아…… 이제 어떡하지?”

다연은 벽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그를 데리고 온 자신을 원망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그것도 이 새벽에, 게다가 이미 한 번 관계를 한, 시시때때로 자신을 유혹하는 저 남자를 왜 데리고 온 걸까? 도대체 뭘 기대하고!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물에 빠진 강아지 꼴을 한 태준을 본 순간 얼음처럼 굳었던 그녀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으니까. 자신을 대신해 물 폭탄을 맞은 것도 미안한데, 젖은 상태로 벌벌 떨고 있었으니 마음이 더 흔들렸다.

게다가…….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야……. 누가 보면 헤어진 첫사랑 만난 줄 알겠네.”

정말 그랬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든가, 불꽃이 활활 타오르든가, 아니면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뭐랄까. 자신을 보는 태준의 눈빛에서는 시시때때로 격동이 이는 것 같았다. 내 행동 하나에,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처럼. 여성 편력 심하다는 그 남자가 말이다.

“하아. 뭐가 진심인데?”

다연은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옷만 마르면 보내면 되잖아? 옷만 마르면 보내버리자.”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연은 따뜻한 차라도 대접할 생각으로 물었다.

“커피랑 녹차 있는데…… 허업!”

밖으로 나가 태준을 본 순간 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벗고 있었다.

재킷은 이미 벗은 상태였고, 다연이 나왔을 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셔츠를 반쯤 벗은 상태였다.

다연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오늘 새벽부터 아까 대표실에서까지 줄곧 그의 벗은 몸을 보고 그의 셔츠를 벗겨주기까지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스멀스멀 그의 등 근육이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일까?

미켈란젤로가 살아 돌아와 조각상을 만들면 딱 저런 몸이겠지. 적당한 근육에 완벽한 황금비율, 안기고 싶은 넓은 품 그리고 단단한 가슴까지.

다연은 마치 자신이 피렌체의 한 미술관에 와 있다는 착각을 느끼며, 저 남자 몸만 보면 굳이 르네상스 시대 조각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다연. 정신 차려!”

중얼거리며 정신을 다잡고 있을 때, 등 뒤로 벨트의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다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던 다연은 크게 소리쳤다.

“왜……!”

“응……?”

“옷은 왜 벗는 거예요?”

“옷 말리고 가라면서?”

뭘 잘못한지 모르겠다는 듯 태준은 억울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옷 말리고 가라고 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바지까지 벗을 필요는 없잖아요?”

“바지도 젖었는데?”

정말 몰라서 그런 건지, 순진한 건지, 태준은 다시 해맑게 말했다.

알아! 나도 안다고! 지금 그쪽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알고, 그래서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안다고!

그렇다고 내 앞에서 그렇게 훌렁훌렁 벗어젖히면 어쩌자는 건데? 당신 성난 근육과 너무 건강한 그걸…… 보여주면, 난 어떡하라고?

그리고 왜 하필 지금 대표실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건지. 다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집에 건조기 있어?”

“아뇨. 없어요.”

사고 싶었지만, 집이 좁아 둘 곳이 없어 사지 않았다. 근데 그건 왜?

“다행이네.”

“뭐가요?”

“건조기에 넣으면 옷이 바로 마르잖아.”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잠시 생각하던 다연은 그 말의 숨은 뜻을 눈치 채고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몸을 돌렸다.

“건조기도 없이 어떻게 옷을 말려준다는 거야?”

그러게. 아까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무턱대고 데리고 오긴 했는데, 완전히 젖은 그의 옷을 말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설마 옷 말려준다는 핑계로 날 여기에 가둬 두려는 거 아니야?”

“뭐예요?”

“선녀와 나무꾼처럼. 나 못 가게 내 옷 숨겨두려는 거 아니냐고.”

“뭐래? 옷 줘요. 탈수라도 해서 말려줄 테니까.”

다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연이 네 옷이라도 줘.”

“내 옷은 왜요? 여자 옷 입는 취향 있으세요?”

“그럼, 나 이러고 있어?”

태준은 ‘난 괜찮긴 한데’라고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진짜! 그쪽은 괜찮겠지만, 난 안 괜찮아!

“아……. 잠시만요.”

그가 벗고 있는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다연은 자신의 옷 대신 이불을 꺼내 그에게 내밀고 젖은 그의 옷을 들고 얼른 다용도실로 향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다연이……?”

분명 자신을 ‘다연이’라고 불렀다. ‘다연 씨’도 아니고, ‘연 비서’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알기라도 한 듯, 그의 음성에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잤다는 사실만큼이나 쇼킹한 호칭이었다.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정말 사람 헷갈리게 하네.”

다연은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고 탈수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멍하니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안을 쳐다보고 있을 때,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전자 어디 있어?”

다연은 추위에 떨고 있던 그가 떠올라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는 이불을 둘러싸고 있어 맨살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연은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고 컵에 녹차 티백을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 태준은 식탁 앞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셔요.”

다연이 녹차를 내밀자, 태준은 고맙다고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혼자 살아?”

“네.”

혼자 사니까 이 새벽에 데리고 왔지.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등짝 스매싱을 몇 대고 맞았을 거다.

“어머님은?”

“엄마는 지방에 사세요. 집에 원래 지방이었는데,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어요.”

“그랬구나. 전공이 뭐였어?”

다연은 태준이 묻는 것에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처음에는 왜 자꾸 사적인 질문을 하는가 싶어 대충 대답하고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갈수록 의 직원 연다연에 대해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니, 서로에 대해 약간은 알아두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흐음. 그럼 은 어떻게 지원하게 된 거지?”

지원 동기는 면접 때에도 받았던 질문이었다. 다연은 면접 때를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메뉴가 워낙 유명하잖아요. 메뉴도 독특하고. 누구 머리에서 이렇게 기발한 메뉴가 탄생했지? 이런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그 사람 얼굴 한 번 봤음 좋겠다 싶어서 지원했어요.”

다연이 진지하게 말하자, 태준이 말간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다연이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럼 결국 내가 보고 싶어서 에 지원했다는 거잖아?”

“예?”

“그렇잖아. 그 레시피 만든 사람 보고 싶어서 지원했다며? 그 레시피 만든 사람은 나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묘한 그의 표정이 거슬렸다.

그는 에 입사한 이유를 온전히 ‘서태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치 ‘나를 향한 관심과 호감 때문에 에 지원한 거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연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 지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태준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서태준이 아니라, 기발한 레시피를 개발한 의 ‘요리 연구가’ 서태준이 궁금했던 거였다.

“뭐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그래.”

심플하게 넘기는 그의 말투가 거슬려 다연은 부가 설명했다.

“은 이 분야에서 최고잖아요.”

“그렇지.”

“전 성공하고 싶거든요.”

“성공 좋지.”

“제가 개발한 레시피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상상하면 벌써 마음이 두근거려요.”

“으응. 그럴 거야.”

“을 대표하는 메뉴를 만드는 게 제 꿈이에요.”

“오. 꿈이 크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연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머릿속에는 ‘다연이는 나 때문에 에 지원했어.’라는 생각만 가득한 것 같았다. 절대로 그런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넘어서 외국에도 제 레시피를 선보일 거예요.”

“응. 좋아, 좋아.”

다연은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생각하는 남자에게 ‘네게 호감이 있어서 너희 회사에 입사까지 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키스해도 돼요?”

차라리 이쪽도 섹스 파트너로 보이는 편이 나았지.

“응. 좋지, 좋…… 뭐?”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놀라 토끼 눈을 뜨고 있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놀란 모양인지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그의 입술이 다연의 입술을 머금었다.

달콤한 입술이었다. 다연은 저도 모르게 두 입술을 벌렸고, 태준의 혀는 그 틈을 노리고 그녀의 입안으로 침투했다.

입안의 야들야들한 감촉이 태준의 혀를 에워싸자, 그는 아찔한 촉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하아……. 진짜 넌…….”

왜 이렇게 날 미치게 만드니? 내가 겨우 잠재운 욕망을 왜 자꾸 깨우는 거야?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소리와 함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태준은 숨 막히도록 끈적한 이 감촉이 너무도 좋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살결도, 잡으면 도망치고 놓아주면 달라붙는 색정적인 그녀의 여린 혀도 좋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태준은 다연을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러자 다연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침대 위를 어지럽혔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미친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 앞에서 무력했다.

그녀의 예쁜 얼굴도, 귀엽게 조잘거리는 입술도, 반짝이는 눈빛도 그를 무력하게 했지만, 가장 강력한 건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저 섹시함이었다.

“오늘은 그쪽이 날 요리해줄래요?”

그래서 태준은 오늘도 무너지기로 했다. 그녀의 품에 와르르 하고 말이다.

“내가 말했지? 난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고.”

태준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이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곧 조각상 같은 나신이 다연의 몸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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