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서원이 태준에게 시선을 꽂은 채 물었다.
“누군데 널 뚫어지게 쳐다보냐?”
“…….”
“아는 사람이야?”
다연은 잠시 고민했다.
‘응. 나랑 어제 원나잇 한 남자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우리 회사 대표님이셔.’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연은 지금 태준과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원에게 그를 소개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아니, 몰라.”
다연은 그렇게 대답하며 맥주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태준과 눈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리로 돌아온 다연이 서원에게 맥주를 내밀자 그는 뚜껑을 따며 태준에게 말했다.
“영업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연의 술잔에 맥주를 따르고 있을 때,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서원은 ‘이 자식 뭐야?’ 하는 눈빛으로 태준을 쳐다봤고, 다연은 여전히 모른 척 술잔을 잡았다. 그리고 맥주를 들이켜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서 맥주잔을 낚아챘다. 고개를 들자, 태준이 그녀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서원은 여전히 ‘이 새끼 뭐야?’ 하는 눈빛으로 태준을 노려봤고, 다연도 그를 노려봤다.
태준은 다 마신 빈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 다연에게 말했다.
“다른 남자가 따라주는 술은 안 마셨으면 좋겠는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새 컵을 서원에게 내밀었다.
“따라줘.”
“어?”
“맥주 따라 달라고.”
“어.”
서원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와 잔에 따랐다. 그리고 다연이 맥주의 거품을 입안에 머금으려는 순간, 다시금 태준이 그녀의 맥주를 빼앗아갔다.
“허!”
다연의 입에서 짜증과 화가 뒤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킨 태준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자,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다른 남자가 따라주는 술 안 마셨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왜요? 아무리 대표님이지만, 저한테 이럴 권리는 없잖아요?”
다연의 입에서 ‘대표님’이라는 말에 나오자, 서원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가 남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든, 고양이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든, 그게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시죠?”
“그야 우린 같이 자ㄴ…….”
뒷말을 예상한 다연은 벌떡 일어나 그의 입을 막았다.
깜빡했다. 그는 아침에도 보안팀 직원과 청소 아주머니가 있을 때, 우리가 같이 잤다는 둥 침대가 어쨌다는 둥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는 남자라는 것을.
다연은 서원을 힐끔 쳐다보며 태준에게 속삭였다.
“그 얘기 꺼내지 말라니까요!”
“그더니가 다든 나자가 따다 주는 수를…….”
입을 막는 바람에 태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입 다물고 따라와요.”
다연이 도끼눈을 뜨고 태준에게 명령하자,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눈은 또 왜 이렇게 예쁜지. 다연은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태준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입을 꾹 다물고 그녀만 바라보았다.
“미안. 우리 회사 대표님이신데, 나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대.”
“정말 대표 맞아?”
“어.”
“대표 누구?”
“응?”
계산하기 위해 가방을 뒤지던 다연은 무슨 말인가 싶어 서원을 쳐다봤다.
“너희 회사에 대표가 두 명이라며? 일 잘하고 성실한 대표랑, 일은 안 하고 싸돌아다니지만 요리는 더럽게 잘하는 대표랑. 그 둘 중 누구냐고.”
아…… 내가 평소에 그렇게 말했었나?
다연은 난처한 얼굴로 태준을 올려다봤다.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를 쳐다볼 뿐 다문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말은 잘 듣네.
“그것도 나중에 말해줄게. 얼마야?”
“1만 5천 원.”
그런데 아무리 가방을 뒤져도 지갑이 없었다.
“지갑이 어디 갔지? 두고 왔나?”
아무리 친구라도 계산은 철저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있을 거로 생각한 지갑이 없자 다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연이 난처해하고 있을 때, 태준이 카드를 꺼내 서원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입은 다문 채였다. 그러자 다연이 태준의 손에서 카드를 낚아채 다시 그에게 돌려줬다.
“대표님한테 얻어먹고 싶지 않아요.”
태준은 말없이 긴 손가락으로 꾹 다문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다연은 귀찮다는 듯 말하라고 손짓한 뒤, 서원에게 말했다.
“서원아. 미안한데 계산은 내일…….”
그때, 다시금 태준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화가 잔뜩 난 다연이 소리쳤다.
“분명히 말씀드렸죠? 대표님한테 얻어먹고 싶지 않다고요!”
“이거 연다연 씨 카드인데?”
“예?”
내 카드? 내 카드를 왜 이 남자가?
“아까 차에 떨어뜨리고 갔길래 돌려주려고 왔어.”
순간 민망함이 몰려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귀가 뜨거워졌다.
‘그런 것도 모르고 별 쇼를 다 했구나.’
다연은 태준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카드를 빼앗듯 낚아채고는 서원에게 내밀었다. 그는 계산하면서 태준과 다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응. 걱정 마.”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말과 달리, 서원의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가시죠. 대표님.”
다연이 먼저 앞서 걷자, 태준이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태준은 돌아서는 중 서원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다시 만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다연을 뒤따라 갔다.
***
늦은 새벽이라서 그런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연은 아무 말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도무지 저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지갑을 핑계 삼아 자신을 만나러 왔나 싶다가도. 그러면 보통 남자가 계산하지, 여자의 카드를 내밀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내 카드를 내밀지 누가 알았냐고?’
도대체 서태준이라는 남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좋아서?’
그래서 아까 그의 차에서 싸운 게 마음에 걸려 화를 풀어주기 위해 찾아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서원이 한 말이 떠올랐다.
“원나잇 하고 마음에 들어 사귀는 경우는 천만 번에 한 번 정도 있다고는 들었어.”
‘그래. 그건 아닐 거야.’
다연이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그와 자신은 어젯밤에 처음 만났고, 하룻밤을 함께 했다고 해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들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기껏해야 약간의 호감 정도겠지.
여성 편력을 가진 그가 제게 어떤 호감이 있어 이 새벽에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다. 지갑이야 회사에 출근해서 줘도 되는 거고.
‘그럼 설마……?’
다시 서원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섹스 파트너.”
“서로 너무 잘 맞아서 앞으로도 계속 즐기기 위해 만나는 경우는 봤어.”
“사귀면 서로 구속하지, 시시때때로 연락해야 하지, 점심 먹었냐? 뭐 먹었냐? 그러다가 우리 결혼하자. 그런 게 다 싫은 거야. 그냥 딱 섹스만 원하는 거지.”
그제야 다연은 태준이 제게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섹스 파트너. 감정은 섞지 않은 채, 쾌락만을 위해 만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원하는 거야……?’
다연은 확신했다. 태훈과 서원의 말 그리고 회식 때 태준이 한 행동을 종합해 봤을 때, 그것 외에 다른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정말 저 남자의 속내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회사 대표였고, 자신은 그의 회사에서 월급 받고 사는 직원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찰나, 태준이 재킷 한쪽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촤아아아아-
차 한 대가 태준의 등에 물벼락을 뿌리고는 유유히 지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괜찮아?”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태준의 입술이 보였다.
물에 젖은 그는 몹시도 섹시했다. 비에 젖어 안이 훤히 비치는 셔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까지.
그의 어깨가 참 넓다고 생각했는데, 재킷 안에 두 사람이 있으니 꽤 좁았다. 다연이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팔 어딘가에 닿는 걸 보면.
재킷 안 분위기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이런…….”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가 다연의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고,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이 그녀의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젖었네.”
태준이 다연의 머리카락을 털어주지 않았으면 아마 그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할게요.”
다연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내며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그를 보자, 그는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
찻길과 인도 사이에 움푹 파여 있던 웅덩이에 빗물이 고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가 웅덩이 빗물을 튀기고 내빼버렸고.
그냥 비에 맞은 것도 아니고 구정물에 젖은 터라 태준의 옷 여기저기가 더러워져 있었다.
“대표님 옷이…….”
“아. 털어내면 돼. 그보다 넌 괜찮아? 춥지 않아?”
다연이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태준은 자신의 옷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연을 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
그의 눈빛을 본 순간 다연은 헷갈렸다. 그녀가 추측하기로 그는 자신에게 바라는 게 섹스인데, 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다연은 그 눈빛이 당혹스러웠다. 사람 헷갈리게 왜 저런 눈빛을 보내는지…….
만약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아니, 최소한 태훈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그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줄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착각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곤란했다.
다연은 최대한 사무적으로 인사했다.
“지갑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었어. 위험한데, 집까지 데려다줄게.”
태준의 호의에 다연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건 밤이 아니라, 다연의 마음이었다. 다연은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보고 있는 남자에게!
그건 위험했다.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바로 앞이에요.”
냉정하게 돌아서려는데, 잘게 떨리는 태준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꽤 쌀쌀했다.
낮에는 완연한 초여름 날씨였는데, 비가 내리고 나니 기온이 뚝 떨어진 모양이었다. 거기에 물벼락까지 맞았으니 추울 만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연은 두 손으로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등 뒤로 태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까? 어떤 기분으로 저 자리에 서 있는 걸까? 나한테 뭘 기대하면서.
그리고 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천천히 걷는 걸까?
다연은 스스로가 참 우습게 여겨졌다. 그에게 여성 편력이 있는 것도, 또 제게 뭘 원하는지 아는 데도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
이런 감정이 드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으면서도 그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의 키스도. 그와 함께했던 잠자리도.
얼마쯤 걸었을까. 다연은 태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옷, 말리고 가세요. 우리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