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연은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서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왜?
“태훈이 형, 겉보기와 좀 달라.”
마치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태준의 말투는 무덤덤했다.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이 말은 원래 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안타깝게도 다연에게는 모두 들렸지만.
“뭐 암튼 그러니까…….”
“대표님!”
다연은 화가 났다.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하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험담의 대상이 사촌 형이라니.
사실 태훈은 회식 내내 다연에게 줄곧 사촌 동생의 칭찬만 늘어놓았다.
“녀석이 좀 별나서 그렇지 실력이 보통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못 하는 게 없었어요. 공부는 물론 운동에 사진까지 잘 찍어요. 완전 사기캐지.”
“아, 태준이 S대 의대 수석 입학했던 것도 말했나?”
“잘 생겼지,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그래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았어요.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다녔죠.”
형은 동생 칭찬에 침이 마르지 않았는데, 동생은 다짜고짜 형 험담부터 하다니. 실망이 컸다.
“제가 보기엔 서태준 대표님이 겉보기와 많이 다르신 것 같군요.”
다연이 싸늘하게 말하자, 태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몹시도 맑고 순수해 보였다. 만약 태훈과 대화하지 않았다면 그 순수한 모습에 또다시 넘어갈 정도로 말이다.
그는 순수해 보이는 겉모습을 방패 삼아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선수에,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나쁜 놈인 모양이었다.
신호에 걸리자 차를 멈춘 태준이 다연을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하지만 태준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꽤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 어디엔가 머물자, 다연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여자관계 복잡한 건, 서태훈 대표님이 아니라 서태준 대표님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태준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다연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까 태훈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준이가 고3 때 첫사랑에 빠졌어요. 열병 같은 사랑이었죠. 그 여자 때문에 의대를 포기했는데, 아무도 태준이를 막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깊게 사랑한 만큼 상처도 컸어요. 그때 받은 상처를 치유 받고 싶은지, 저 녀석 지금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네요. 아주 자유롭게.”
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다연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회식 내내 여자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태준을 보고 난 후에야 태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첫사랑의 실패가 여성 편력으로 발현된 거야?’
다연은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다다르자, 그녀의 기분은 완전히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것 같았다.
여성 편력 가득한 남자의 하룻밤 상대가 되었다니. 그런 남자에게 호텔 가자며 손을 이끌고, 안아달라고 애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하는 곳에서까지 그에게 넘어갔다니!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쉬운 여자라고 생각했겠지?
회사 직원인 걸 알면서도 하룻밤을 보낸 그의 속내가 몹시도 궁금했다. 다연은 참지 않고 물었다.
“재미있었나요?”
“……?”
“하룻밤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었냐고요!”
“뭐……?”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티 없이 말간 그의 얼굴에 참담함이 덧칠해지자, 다연의 가슴이 찌릿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상처 준 사람이 그가 아닌 자신인 것처럼.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다.
빵빵-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고, 뒤에서 클랙슨을 울려댔다. 태준은 부드럽게 차를 움직였고, 다연은 길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세워주세요.”
“비가 아직 안 멈췄어. 집까지 데려다줄게.”
“됐어요. 조금만 가면 집이에요.”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더 가야 했지만, 이 좁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했다. 차라리 비를 맞고 가는 편이 편할 정도로.
태준은 더 말리지 않고 차를 길 옆에 세웠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다연은 사무적으로 인사한 뒤, 차에서 내려 빠르게 뛰어갔다.
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어젯밤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것? 아니면 회사에서 그녀를 유혹한 것?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그녀를 보내버리는 것?
아니다. 불쑥 태훈의 이야기를 꺼낸 게 잘못 된 것 같았다. 당장 나에 대한 신뢰도 없는데, 태훈에 대한 험담부터 늘어놨으니.
하지만 회식 내내 다연 옆에 붙어 있는 태훈을 보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혹시나 형이 내 감정을 눈치채고 다연에게 다가가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형은 언제나 내 것을 가지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태준은 여직원들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그러면 태훈이 다연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오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말이다.
회식 내내 형에게 보란 듯이 쇼를 하고 나왔는데, 이제 보니 태훈이 문제가 아니었다. 태훈을 경계한 행동이 다연의 오해를 살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다연의 눈빛은 마치 환멸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순서가 잘못 됐군. 순서가…….”
관계에 있어서 마음이 먼저였어야 했는데, 몸이 먼저였다. 어제 그녀를 말렸어야 했다. 호텔로 자신을 이끌던 그녀를 말렸어야 했고, 사무실에서 그녀의 단추를 푸는 나를 말려야 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달싹이는 촉촉한 그 입술을, 보드라운 그 살결을, 자신을 바라보는 반짝이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태준의 이성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단단했던 그의 이성은 다연을 본 순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녀에게 완전히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목숨이라도 내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 호텔로 가자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지.
남들이 하는 것만 봐서 그런가? 연애라는 게 참 쉬운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태준은 핸들에 머리를 기대며 밀려오는 두통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조수석 바닥에 뭔가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태준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작은 펜던트가 달린 지갑이었다.
열어보니 다연의 신분증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아까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갑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후, 차를 움직였다.
***
샤워를 마친 다연은 침대에 누웠다.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머릿속에 태준과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세차게 고개를 젓고 다시 머리를 비우려고 애썼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의 어깨와 가슴 사이 그 어디쯤 닿았던 그의 입술의 촉감이 느껴졌다.
“야! 연다연! 잠 좀 자자! 잠 좀!”
다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뺨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태준과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햇볕을 가려준다며 자신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펼쳐주던 그가, 초코 우유를 마시던 그가, 신원 확실하다던 그가, 자신의 손을 잡던 그가…….
“하아. 잠자긴 다 틀렸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다연은 대충 옷을 입은 뒤, 서원의 식당을 찾았다.
“영업 끝났……. 뭐냐, 이 새벽에?”
식당에 들어서자, 테이블 정리하고 있던 서원이 심드렁하게 다연을 반겼다.
“왜? 내가 온 게 불만이냐?”
“킁킁. 너 술 마셨냐?”
“회식하면서 와인 한 잔 했어.”
“회식했으면 씻고 잘 것이지 뭐 하러 이 새벽에 나와?”
“잔소리는 됐고, 묵은지 닭볶음…….”
평소 그녀가 애정하는 메뉴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이내 닫아버렸다. 묵은지 닭볶음탕을 생각하니 태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묵은지 닭볶음탕과 서태준이 세트 메뉴라도 되는 것처럼. 닭고기에 묵은지를 올려 먹는 내내 태준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닐 것만 같았다.
“해줘?”
“아니. 됐다. 나 피자나 해줘.”
“피자 재료 없는데?”
“케첩이랑 식빵은 있을 거 아니야? 식빵 피자 해줘. 깻잎 올려서.”
“식빵 피자 귀신 같으니라고.”
서원이 요리를 시작하자, 다연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와 컵에 따랐다.
맥주가 컵에 닿자,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어냈다. 머리가 짜릿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청량감이 온몸에 확 퍼지는 것 같았다.
“캬아.”
바 테이블에 앉은 다연은 오픈 주방에서 서원이 요리하는 걸 지켜보며 그를 불렀다.
“진서원.”
“왜?”
소시지를 볶기 위해 팬을 들썩일 때마다 서원의 팔뚝 근육이 살짝살짝 움직였다. 다연은 그의 팔뚝을 아무 감정 없이 쳐다보며 물었다.
“너 원나잇 해 본 적 있어?”
갑작스러운 다연의 질문에 서원은 프라이팬 움직이는 걸 멈추고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없어?”
다연이 심드렁하게 묻자, 서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취했냐?”
“아니. 말짱해.”
아까 와인을 서너 잔 마신 것 같은데, 어쩐지 술을 마시지 않을 때보다 정신이 더 또렷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없어.”
“정말 없어?”
“어.”
단호한 서원의 대답에 다연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들의 심리에 관해 묻고 싶었는데,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맥주만 홀짝이고 있자, 서원이 완성된 요리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기운 없던 다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와. 맛있겠다.”
“넌 식빵 피자 질리지도 않냐?”
“응. 안 질려.”
“촌스럽긴.”
“촌스러우면 어떠냐? 맛만 있으면 됐지.”
다연은 뜨거운 식빵을 호호 불어가며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자 입안에 상큼한 토마토 향과 함께 고소한 치즈 맛이 가득 퍼졌다. 조금씩 씹히는 소시지까지 아주 맛깔스러웠다.
요즘 피자처럼 세련된 맛은 아니었지만, 식빵 피자는 고유의 맛이 있었다. 추억의 맛이랄까?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해? 설마 너……?”
서원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다연이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나 아니거든. 친구가 그랬다고 그래서…….”
“친구 누구?”
“너 모르는 친구.”
“내가 모르는 네 친구도 있냐?”
“나 친구 많거든?”
대충 얼버무렸지만, 서원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다연은 버럭 소리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암튼!”
“그럼 뭐가 중요한데?”
서원이 의심을 조금 거두자, 다연은 본론을 꺼냈다.
“남자들은 원나잇 하고 나면 그 여자랑 사귀……나?”
다연은 질문 속에 기대감을 반쯤 얹어서 물었다.
사촌 형을 험담하는 여성 편력 가득한 남자한테 실망하긴 했지만, 그에게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원나잇이 왜 원나잇이겠냐.”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했다.
“그냥 하룻밤 즐기려고 만나는 게 원나잇이지. 오늘 밤 외로워. 누군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고, 누군가 날 위로해줬으면 좋겠어. 너도? 나도. 야, 나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니즈에 맞아서 만나는 게 원나잇 아니겠어?”
서원은 다연의 속도 모르고 원나잇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다연은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면 사귈 수도 있지 않나?”
“원나잇 하고 마음에 들어 사귀는 경우는 천만 번에 한 번 정도 있다고는 들었어.”
“뭘 또 그렇게까지…….”
다연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회식 내내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태준이 떠올랐으니까.
‘가볍게 즐기려고 날 만난 걸까?’
머리를 비우기 위해 나왔는데, 더 복잡해졌다.
“아, 다시 만나는 경우를 본 적은 있다.”
서원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섹스 파트너로.”
“섹스 파트너?”
“그게 서로 너무 잘 맞아서 앞으로도 계속 즐기기 위해 만나는 경우는 봤어.”
다연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사귀면 되잖아?”
“사귀는 건 싫은 거지.”
“왜?”
“사귀면 서로 구속하지, 시시때때로 연락해야 하지, 밥 먹었냐? 뭐 먹었냐? 어제 만난 그놈은 누구냐? 다른 놈 만나지 마라. 그러다가 우리 결혼하자. 집은 어떻게 구할래? 혼수는 어떻게 할까? 그런 관계가 다 싫고 귀찮은 거야. 그냥 딱 섹스만 원하는 거지.”
섹스만 원한다……?
서원이 꽤 길게 설명해주었지만, 다연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 없는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지? 혹시 그 남자도 나한테 그런 관계를 원하는 걸까? 그래서 날 비서로 발탁했고, 대표실에서 그렇게……. 섹스만 원해서……?’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서원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응?”
“근데…… 저 남자는 누구야?”
서원의 시선을 따라 몸을 뒤로 돌리자, 문 앞에 서 있는 태준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