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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10화 (10/74)

10화

“아뇨. 여자친구 없습니다.”

“예쓰!”

태준의 대답에 강주은 대리는 작게 환호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본래 좀 큰 편이었다.

그 때문에 주위에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그녀의 속셈을 대충 알아채고 실소를 터뜨렸고, 다정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다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언제는 제게 책임을 지라는 둥, 자기를 가져달라는 둥, 요리해달라는 둥, 별소리를 다 하더니, 뭐? 손에 물을 묻히지 마? 풀코스로 대접을 해? 소매를 걷어줘?

그리고 아침에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더니, 지금은 여자친구가 없어?

다연은 태준을 노려보며 남아있던 와인을 완전히 비워 버렸다.

물론 자신이 그의 여자친구도 아니고, 그에게도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못을 박긴 했지만, 책임지라고 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저렇게 바뀌어 버리니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와 자신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까지는 아니어도 썸 타는 사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린…… 잔 사이였으니까.

하긴. 그래 봐야 원나잇이었고, 원나잇은 깃털보다 가벼운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서태준이라는 남자에게 깃털보다 가벼운 여자겠지.

“후우.”

그런 생각을 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연은 이제 더는 태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다.

“사람 마음 다 흔들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누군데? 흥.”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굽니까?”

다연이 뒤를 돌아보자, 태훈이 보였다.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태준과 닮은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을까. 다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휘청거렸다. 그러자 태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대표님.”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예. 괜찮습니다.”

그녀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태훈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 잔 해요.”

“아, 전 이미 마셔서…….”

“이거 그냥 주는 술 아닙니다.”

“예?”

“내 동생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에요.”

그쪽 동생 생각하면 있던 와인 맛도 떨어집니다만.

하지만 태훈의 호의를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다연이 와인을 받아 한 모금 마시자, 태훈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내 질문에 대답 안 해줄 겁니까?”

“예?”

무슨 질문을 했더라?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태훈이 입을 열었다.

“연다연 씨 마음을 흔들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얼빠진 인간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아.”

아마 혼잣말 한 걸 들은 모양이었다.

태훈은 몹시도 궁금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표님 사촌 동생이 그 얼빠진 인간이에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다연은 꽤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어제 봤던 영화가 떠올라서 한 말이었어요.”

대충 둘러댔지만, 태훈의 호기심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마음 흔들어 놓은 인간’이 자신의 사촌 동생일 것만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태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으며 다연과 대화할 기회를 노렸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좋았어요.”

일단 일 얘기를 하며 다연에게 다가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다연이 온몸에 두르고 있던 경계심을 살짝 풀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요.”

“입사 후에 대표님께 이런 칭찬 받은 건 처음인데요?”

“조금만 보강하면 아주 멋진 레시피로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어딜 보강하며 좋을까요?”

다연이 의자를 가깝게 끌고 오며 묻자, 태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다연은 꽤 예뻤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요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반짝거리는 눈동자도 예뻤고, 조잘대는 저 입술도 예뻤고, 마늘종 같은 콧방울도 예뻤다.

태훈은 이제 아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반대편에 있는 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어머, 대표님! 식빵 피자네요?”

고급스러운 요리만 줄줄이 나오다가 뜬금없는 메뉴가 등장하자, 강주은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온 건 화려한 요리가 아닌, 식빵과 케첩 그리고 소시지 정도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식빵 피자였다. 소시지 몇 알과 깻잎으로 플레이팅 된 식빵 피자는 추억을 소환하는 비주얼을 갖고 있었다.

“어렸을 때 종종 해주던 요리예요.”

“어렸을 때요? 아! 어머님께서 대표님께 해주신 요리인가요?”

“아뇨. 제가요.”

“대표님이 해줬다고요? 누구한테요?”

태준은 대답이 없었지만, 그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걸려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주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대표님이 큰 대표님한테 해줬다는 건가? 사이가 되게 좋았나 보네.”

주은이 중얼거리는 사이, 태준은 요리를 망쳤다며 싱크대로 가 피자를 모두 버렸다.

싱크대에 마구 엉켜버린 피자처럼 태준의 머리도 몹시 복잡해졌다.

***

회식 도중 다연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훈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서 주는 대로 덥석덥석 와인을 마셨더니 살짝 취기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버스도 끊겼을 텐데…….”

“진짜 괜찮아요. 좀 걷고 싶어서요.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다연은 태훈이 데려다준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눈에 띄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일교차가 커서 그런지 밤이 되니 꽤 쌀쌀했다. 차가운 바람이 다연의 몸을 스쳐 지나가자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다운되어 버렸다.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연은 이제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강 대리가 그에게 팔짱을 껴도, 그녀와 즐겁게 도란거려도,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어도. 다연은 이제 완전히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왜 자꾸 그가 떠오르는 건지.

“아, 몰라. 택시나 잡자.”

바람이 많이 부는 게,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버스는 이미 끊겼을 테고, 우산은 없고, 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게다가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취한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줄줄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럴 때 순간이동이 절실했다.

“아니지. 차라도 있었으면. 아냐. 술 먹고 차는 무용지물이지.”

혼자 중얼거리며 10여 분 동안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그녀 앞에 섰다.

기다림에 지쳤던 다연이 얼른 차 문을 열고 타려고 할 때였다. 웬 취객이 다가오더니 택시에 홀랑 올라타는 게 아닌가!

“이봐요! 내가 먼저…….”

“아저씨, 강남이요!”

취객은 다연의 말을 무시한 채 택시 기사에게 외쳤고, 택시는 휙-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눈앞에서 택시를 놓친 게 억울해 소리쳤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 오네?”

다연의 머리 위로 툭툭 굵은 빗방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낮에는 얼굴이 탈 정도로 햇볕이 따갑더니, 밤이 되니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찾아왔다. 꼭 다연의 기분처럼 이랬다가 왔다 갔다 난리도 아니다.

들고 있던 지갑으로 머리만 간신히 가리며 택시를 잡고 있을 때, 웬 낯선 차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차를 보자 아까 계속해서 데려다주겠다던 태훈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대표님이 나 따라 나온 건가?’

아까는 거절했지만, 택시를 놓치고 비까지 오니 이제 거절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냉큼 얻어 타고 집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자, 창문이 내려가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곱슬머리가 보였다.

‘곱슬머리?’

헤어 스타일만 봐도 차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비를 뚫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은 태훈이 아닌 태준이라는 것을.

하지만 왜?

질문 뒤에는 배배 꼬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강 대리랑 스테이크나 썰지, 여긴 왜 왔대?’

그가 여기까지 온 게 의아했고 떨떠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연은 자신의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 데려다줄게.”

아까와 달리 태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강 대리랑 있을 땐 그렇게 잘 웃더니.

“괜찮아요.”

“택시 안 잡히잖아.”

“걸어가도 돼요.”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려나?

“비 오잖아. 타.”

“제가 비 맞는 걸 좋아하거든요.”

미세먼지를 잔뜩 머금고 있을 비를 좋아할 리가. 하지만 무작정 그의 차에 올라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화가 났으니까. 그렇다고 화가 났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난 여자친구도 아니고, 썸 타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회사 대표와 직원의 관계로, 사무적으로 그를 대해야 했다.

하지만 다연은 자신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럴 것 같았다.

오늘 새벽 그녀는 그의 벗은 몸을 봤고, 회사에서 그와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둘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던 그때, 다른 여자들에게도 잘 해주는 그를 봤다.

그의 마음 정상에 서 있다가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주말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월요일 아침 아무렇지 않게 대표와 직원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절대 차에 타지 않을…….’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

우르르쾅! 쾅!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검은 하늘 저편을 반짝였다. 마치 전봇대 하나를 쓰러뜨릴 기세로 한 번 더, 우르르쾅!

그리고 쏴- 소리를 내며 비가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온 지구가 다연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서 저 차에 올라타라고. 어차피 미세먼지 머금은 비를 맞으면서 한 시간이나 걸을 순 없다고.

다연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조수석에 올라타자, 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웃음과 함께 축 처지는 눈매가 몹시도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다연은 애써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디로 가면 돼?”

“상수동이요.”

“정확한 주소는?”

“상수역 근처에서 세워주시면 알아서 갈게요.”

다연은 최대한 차갑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그녀는 되도록 아무런 대화 없이 집까지 가길 원했지만, 태준은 아닌 모양이었다.

“태훈이 형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첫 마디부터 그녀의 속을 긁는 말을 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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