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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9화 (9/74)

9화

한 살 터울의 사촌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둘 다 자동차 장난감을 좋아했고, 파란색 옷을 좋아했으며, 떡볶이 귀신이었다.

태준과 태훈은 취향이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게 있으면 꼭 가져야 하는 성미도 비슷했다.

취향이 비슷하다는 건 친해질 기회가 많다는 의미지만, 원하는 게 하나뿐일 땐 서로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태훈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묻자, 태준이 매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직원 연다연이 좋은 거야, 아니면…….”

“아니면?”

태훈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동생의 말꼬리를 잘랐다.

“너 설마 연다연 씨를 여자로 좋냐고 묻는 건 아니지?”

그의 말에 매끈한 태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하하. 야, 서태준 너 형을 어떻게 보고. 나 잘 알잖아. 공사 구분 확실한 거.”

지난 몇 년간 사촌이 아닌 동업자로 본 태훈은 정말 공과 사 구분이 확실했다.

이 정도 큰 기업의 대표가 되니 주변에서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연줄을 대려고 안달이었다. 학연을 이용하든, 지연을 동원하든 말이다.

하지만 태훈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모든 건 원칙과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너무 철저한 나머지 뒤돌아 서운하다며 욕하는 이들도 많았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건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맺은 모든 관계는 회사 내에서만 유지하려고 했고, 휴일에는 직원들에게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제일 잘 알고 있는 녀석이 무슨 질문을 던지는 건지.

태훈은 말도 안 된다며 껄껄 웃었고,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에 도착했다.

“근데 태준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태훈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잖아.”

“……?”

“연다연 씨. 직원 말고 여자로는 어떨지.”

“……!”

미소 가득한 태훈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점철되었다.

***

대표실을 정리하고 나온 다연은 조리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혼자 있으니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바로 서태준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근데 왜 하필 다른 남자도 아닌, 회사 대표에게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앞으로 회사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오늘 호텔도 아닌 대표실에서 대담하게 자신을 유혹했다. 그리고 자신은 거절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 유혹에 넘어갔고.

앞으로 비서 대행을 하는 동안 그와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게 될 거다. 그것도 단둘이. 온종일 그와 붙어 지낼 텐데, 그때마다 그가 유혹해온다면…… 그럼 그를 거부할 수 있을까?

“하아…….”

다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세어 나왔다.

그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면 그의 손을 잡을 것 같고, 그가 촉촉한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면 입술을 벌릴 것 같았으며, 그의 손이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면 자신은 그의 허리띠를 풀 것만 같았다.

그와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다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의 상념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내가 어쩌다가…….”

다연은 확신했다. 그가 또다시 유혹해온다면, 자신은 백 퍼센트 그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그만큼 그의 유혹은 달콤했고,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도 유약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흔들어대는 그 남자는 정말 뭘까?

“우린 진짜 무슨 사이인 거지?”

표면적으로는 회사 대표와 일개 직원인데, 같이 잤다.

“네가 나 책임진다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나 책임져.”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고, 다연은 알겠다고 대답까지 했다.

“책임지라는 건 사귀자는 뜻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사귀자는 말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럼 우린…… 사귀는 사이인가?”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사귀자는 말이 확실히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늘부터 1일이라고 못 박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꼭 사귀자는 말을 해야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도 모른 채 혼자 오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김에 사람 마음 다 흔들어 놓고, 술 깼으니 나 몰라라 한다고?”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사귄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아니지.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사귀긴 뭘 사귀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에 도착했다.

지하는 매우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잡힌 회식인 만큼 원치 않는 사람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하지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한 모양이었다.

조리실에 들어서자마자 단번에 태준이 다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여직원들이 빼곡하게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대표님, 안 힘드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아닙니다. 모두 앉아 계세요.”

“그래도 어떻게 이 많은 걸 혼자 하세요? 제가 좀 도울게요.”

한 여직원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태준이 그녀를 막아섰다.

“괜히 손에 물 묻히지 마세요.”

“어머! 대표님…….”

“오늘은 제가 풀코스로 대접할 테니, 다들 앉아 계세요.”

그의 말에 여직원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태준을 바라보았고, 다연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햇볕에 네 예쁜 얼굴이 그을릴까 봐. 봄볕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데.”

아까 낮에 그가 했던 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제 보니 이 여자 저 여자한테 마구 지껄이는 말에 설렜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과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물잔을 잡으려던 다연은 태준과 여직원들의 웃음소리에 와인잔을 잡았다.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을 때, 유미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와, 저거 미친 거 아니냐?”

과격한 유미의 말에 다연은 그녀가 턱짓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짧은 스커트에 등이 반쯤 파인 옷을 입은 강주은 대리가 태준을 향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주 작정을 했네, 했어.”

강 대리가 원래 화장을 짙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심했다. 야하게 느껴질 정도로 붉은 입술에 마스카라를 덕지덕지 바른 속눈썹, 거기에 비즈를 붙인 손톱까지.

“요리하는 사람이 비즈까지 붙이고, 잘하는 짓이다.”

유미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미는 전부터 강 대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경력은 유미와 같았고 실력도 비슷했지만, 항상 강 대리의 기획안이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미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또, 또 알랑방귀 뀐다. 으. 여우 같은 년.”

과한 애교로 윗사람들의 호감을 산다는 것이었다.

강 대리가 화장을 진하게 하든,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든, 그건 다연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연은 본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어머, 대표님 땀 흘리시는 것 좀 봐.”

지금은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설마 쟤 작은 대표님 땀 닦아주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기다렸다는 듯 손수건을 찾아와 태준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걸 보아하니, 유미의 추측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다연은 목이 타는 듯 와인을 홀짝 마시며 강 대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잠시만요, 땀 좀 닦아드릴게요.”

강 대리가 손을 뻗어 태준의 이마를 적신 땀을 톡톡 닦아주었다. 이마와 콧잔등 그리고 목덜미까지, 강 대리의 손길이 태준의 얼굴 구석구석을 스치자 다연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사실 요리할 때 옆에서 땀을 닦아주는 건, 그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물론 친하고 편한 사이끼리 하는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다연은 강 대리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제멋대로인 성격이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구겨진 이유는, 강 대리가 아닌 태준 때문이었다. 다연은 강 대리의 손길이 닿으면 태준이 몸을 빼거나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남들 일에 무신경한 연다연이 말이다.

“소매 좀 걷어주시겠어요?”

“당연히 걷어드려야죠.”

태준이 팔을 내밀자, 강 대리가 필요 없는 스킨십을 시도하며 그의 소매를 걷어주었다. 그와 강 대리의 간격이 점점 더 좁아질수록, 다연이 와인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우린 사귀는 게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자신이 한 말처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에서 열이 나고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건지.

“어머, 대표님. 팔이 참 단단하세요. 운동하시나 봐요.”

“요리하는 사람한테 체력은 필수니까요.”

“어머, 근육 봐. 멋있다.”

강 대리의 웃음소리가 커질 때마다, 다연의 손부채질이 점점 더 빨라졌다. 왜 이렇게 땀이 나는지.

“지랄을 한다. 작은 대표님도 완전 실망이야. 저런 거한테 홀랑 넘어가고.”

“…….”

“설마 이러다가 저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그 꼴은 보기 싫은데.”

다연은 잠시나마 그에게 흔들렸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안아달라고 애원했던 자신도, 그의 유혹에 거부 한 번 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자신도 너무 싫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던 어젯밤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 그에게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아예 서태준이라는 남자와 얽히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게 닭볶음탕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와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있을 때, 강 대리의 목소리가 조리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표님. 근데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다연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갑자기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했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태준과의 만남 자체를 후회했던 자신이 왜 그의 대답에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연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에 놓인 컵을 집었다. 그리고 그의 답변에 관심 없는 척, 물을 마셨다.

그녀는 힐끔 고개를 돌려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얼 보고 있는지, 다연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곧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다연은 계속 물을 마시는 척, 벌어지는 태준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주름진 붉은 입술 사이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뇨. 여자친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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