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태훈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당황한 다연은 블라우스를 입기 위해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서 대표님이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면 작은 대표님이 막아주겠지? 당연히 막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건 순진한 판단이었다.
태준은 워낙 예측하기 힘든 남자였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다연의 생각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회사까지 찾아온 것도, 카페에서 눈에 띄게 초코 우유를 마신 것도, 그가 이 회사의 또 다른 대표인 것도, 그리고 제게 비서 대행을 맡긴 것도!
뭐 하나 상식의 범주 안에 들어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다연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내가 보호해야 하는데, 망할 놈의 블라우스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스판기 하나 없는 블라우스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연은 마치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팔 관절이 꺾인 채 블라우스 안에 겨우 팔 하나를 집어넣었다.
다른 팔 하나를 더 넣으려고 할 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말했을 텐데? 아무리 형이라도 내 방은 출입 금지라고.”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뭐 그렇게 철통 보안인데?”
태훈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지 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태준이 그의 발길을 막아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레시피 개발하는 사람이야.”
“너 설마 내가 네 레시피를 빼돌리기라도 할까 봐 이러는 거야?”
“괜한 의심 사지 않으려면 애초에 차단하는 게 나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태준의 레시피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가장 먼저 의심할 사람은 그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될 테니까.
“좋아.”
동생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훈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용건이 뭐야?”
“오늘 너 온 김에 회식이나 할까 하는데. 어때?”
회식이라는 말에 태준은 마치 다연의 허락을 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외박에, 예상치 못한 태준의 등장에,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던 다연이었다. 그런데 회식이라니? 쉬고 싶었던 다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고, 태준은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개발팀은 네가 알고 지내면 좋을 거고, 팀원들도 오늘 회의하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좋아.”
순간 다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싫다는 표시를 했는데, 좋다고 말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럼 고개는 왜 끄덕인 건데?
귀를 의심한 건 다연뿐만이 아니었다. 태훈 또한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웬일이야?”
“어디서 할까?”
레시피 개발 외에 그 어떤 회사 일에도 일절 관심 없던 태준이었다. 임원들과 밥 한 번 안 먹던 그가 회식에 참여한다니. 거절할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1층 어때? 우리 식당에서 하면…….”
“손님들 있는데,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지하에서 하자.”
건물은 지하 3층부터 13층으로 이뤄져 있었고, 1층부터 3층까지는 본사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4층부터 12층까지는 사무실로, 지하 1층과 2층은 조리개발팀에서 사용하는 조리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조리실은 말 그대로 조리를 위한 곳이지, 요리가 나오는 곳은 아니었다.
“지하? 지하에서 하려면 요리를 직접 해야 할 텐데?”
태훈이 의외라는 듯 묻자, 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하지 뭐.”
“네가 직접? 와우. 직원들이 좋아하겠는데? 네 요리를 직접 맛볼 기회를 얻다니. 안 그래도 네 요리 먹어보고 싶다고 난리였거든…….”
달칵, 문이 닫히며 두 남자의 대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휴우.”
혼자 남은 다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을 잠갔다. 문에 기대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급한 나머지 블라우스에 한쪽 팔만 겨우 끼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뭐에 홀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미쳤던가. 그렇지 않고서는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어제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술도 마셨고, 또 회사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회사에서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자신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다연은 남들이 말하는 소위 노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와의 관계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살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연은 살면서 딱 세 번의 연애를 했다.
대학생 때 사귀던 남자친구와 당일치기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배가 끊겼다는 씨도 안 먹히는 수작을 부리기에 그날로 헤어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두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두 번째 남자친구와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지만, 사랑의 행위는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다연은 아프기만 했고, 남자친구는 자신의 절정만 중요시했다. 그녀의 감정이나 신체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헤어졌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모든 게 완벽한 남자였다. 성격이나 매너는 물론 외모, 학벌, 직업까지 좋았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그 행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연은 사랑의 행위가 절정으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섹스를 하자고 할 때마다 다연은 거절하거나 핑계를 댔다. 그래서 결국 차였다.
그들이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다 똑같았다.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다연은 세 남자와 잠자리 때문에 헤어진 것이었다.
그 후, 다연은 연애를 아예 포기했다. 연애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그게 중요하냐며 자신을 떠난 남자들을 욕하기도 했다.
그랬던 자신인데, 몸보다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인데, 왜 저 남자만 보면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정신이 혼미해지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연다연. 너 정말 최악이다.”
다연은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서태준의 무엇이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일까?
외모? 배경? 묘하게 매력적인 성격? 아니면……설마?
“정말 나랑 그게…… 잘 맞는 거야?”
속궁합이 안 맞아서 떠났던 전남친들과는 달리 그와 그게 잘 맞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어젯밤 그와 잤음에도 뻐근한 느낌은 있었지만, 행위 후 찝찝함이나 고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연은 맥이 확 풀려버렸다.
사랑에 순서가 있다면, 당연히 마음이 1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마음보다 몸이 먼저 남자를 원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그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속궁합이 맞지 않아 자신을 떠나갔던 남자들과 달리 속궁합이 맞는 그 남자는…….
“……도대체 나랑 무슨 사이인 거지?”
만난 첫날 하룻밤을 함께했고, 다음날 남자는 자신을 책임지라고 했고, 또 그의 사무실에서 애정 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그 남자와 자신의 사이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냥 회사 대표와 직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깊숙한 것을 공유했고, 그렇다고 사귀는 남녀라고 하기엔 단지 원나잇 한 사이일 뿐이었다.
태준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유미였다.
“어, 언니.”
-너 어디야?
“아…… 13층.”
-회식한대. 빨리 내려와. 작은 대표님이 직접 요리해준대.
핸드폰 너머로 직원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연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
한편 태준과 태훈은 회의실을 돌아 13층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180cm가 넘는 키에, 둘 다 수트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꽤 비슷해 보였다. 물론 피가 섞였기에 닮은 구석도 많았다.
큰 키에 작은 얼굴, 잘생긴 이목구비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사촌이 아닌 형제라고 볼 정도로 두 사람은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태훈은 태준에 비해 피부가 까무잡잡했고, 좀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태훈에게서 엄친아의 느낌이 났다면, 태준에게서는 반항아의 분위기가 풍겼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태훈은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한국 오니까 어때?”
“좋아.”
“뭐가 좋은데?”
“다.”
다 뭐가 좋다는 건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동생의 대답에 태훈은 피식 웃었다.
“연다연 씨 말이야.”
태훈의 입에서 다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알고 콕 집은 거야?”
“뭘?”
“난 아까 네가 다연 씨를 네 비서 대행으로 발탁하기에 뭘 알고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태훈의 질문에 태준은 최대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메뉴개발팀에서 날 서포트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프레젠테이션이 마음에 들었어.”
“그렇지? 내 눈에만 괜찮은 게 아니지?”
태훈의 격한 반응에 그를 바라보는 태준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연다연 씨 입사 때부터 쭉 지켜봤거든. 일 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성격도 좋고, 인성도 좋더라고. 그리고 매력도 있고.”
그의 입에서 다연에 대한 칭찬이 흘러나올수록 태준의 기분은 점점 나빠졌다.
태준은 다연을 기다리면서 훑어본 그녀의 이력서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에 입사한 지는 햇수로 4년. 그럼 4년 동안 태훈이 다연을 지켜봤다는 소리인데.
“사실 이번에 레시피 제안을 팀에서 개인으로 넓힌 것도 연다연 씨 때문이었어.”
“……?”
“한식 메뉴개발 박 팀장이 연다연 씨 레시피를 슬쩍 해서 자기 아이디어인 양 발표하는 걸 여러 번 봤거든.”
태준은 좀 헷갈렸다. 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연다연 씨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건 태준도 바라는 바다.
“네 밑에 있으면 배울 점도 많겠지?”
이 또한 태준도 동의한다.
“훌륭한 직원이야.”
하지만 거슬렸다.
“네가 옆에서 잘 가르쳐줘.”
다연에 대해 말하는 사촌 형의 눈동자가 유독 반짝이는 것과 다연을 부탁한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투가.
뭘까? 의 성장을 위해 직원으로서의 연다연이 좋은 걸까. 아니면 ‘여자’ 연다연이 좋은 걸까.
“연다연 씨 좋은 사람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태준은 가시를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직원으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