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던 공간이 끈적한 공기로 가득 차올랐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둘 사이를 뜨겁게 달구었고, 세상에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준이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바람에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녀의 앞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앞머리뿐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문과 태준의 두 팔 사이에 갇힌 다연은 슬며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약 다른 남자가 이런 행동을 했다면, 당장 소리를 지르거나 남자의 소중한 곳을 걷어찼을 거다.
하지만 이 남자는…… 선뜻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을 더 유혹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검은색 곱슬머리와 대조적인 새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와 콧날, 그리고 새빨간 입술까지. 그는 마치 아름다운 뱀파이어 같았고, 다연은 그 아름다움에 넘어가 목을 내어주는 여인 같았다.
하지만 여긴 회사였고, 다행히 다연에게는 조금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무, 문은 왜……?”
좁쌀만큼 남아있는 이성에 의지해 겨우 입을 열자, 태준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귓가를 속삭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할 것 같아서?”
“곤란하다니 뭐가요?”
다연이 물었지만, 태준은 대꾸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어제 했던 말, 기억나?”
어제 그와 했던 행위도 기억 속에 없는데, 그가 한 말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다연이 아무런 대답 없이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속삭였다.
“난 한 번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했어.”
태준의 손이 다연의 블라우스 단추에 닿았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지.”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가 톡 하고 풀리자, 다연의 살 내음이 살짝 밖으로 삐져나왔다.
“난 멈추지 않을 뿐더러, 놓치지도 않는다고.”
그의 손이 두 번째 단추로 내려가는 게 느껴졌고, 순식간에 단추가 풀렸다.
그의 손이 단추에 닿으면 풀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다연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 그를 막지도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그를 저지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그녀의 심장은 그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멈추지도 날 놓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톡- 세 번째 단추가 풀렸고, 곧 네 번째 단추까지 풀려버렸다.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하얀 레이스와 함께 보드라운 살결이 보였다.
어느새 다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버렸고, 눈은 몽롱하게 풀려버렸다. 촉촉하게 젖은 두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만이 간헐적으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태준은 그런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하게 색정적인 체취를 맡고 또 맡았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코에 담기라도 하려는 듯.
한참 후.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너의 이런 얼굴은 나한테만 보여줘.”
그 말과 함께 블라우스의 마지막 단추가 완전히 풀려버렸다.
풀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다연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가슴에 코를 묻고 싶을 만큼 향긋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모든 향기를 자신의 코에 가두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 그에게는 지금 그게 더 중요했다.
태준은 인내력을 발휘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약속해. 이런 얼굴은 나한테만 보여주겠다고.”
사실 태준은 아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태훈을 보는 그녀가, 태훈을 향해 미소 짓던 그녀가 몹시도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대표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알겠고, 좋은 평가를 받아 기분 좋은 것도 알겠는데, 그래도…… 그래도 그런 표정은 자신한테만 보여줬으면 했다.
네 그 예쁜 얼굴을, 관능적인 그 표정을 태훈이 봤을까, 그래서 혹시 형이 나처럼 네게 반한 건 아닐까 미친 듯이 불안했다.
“약속해. 나만 보게 해주겠다고. 나만.”
커피처럼 중독성 강한 그의 음성에 다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준은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로 다짐받고 싶었다. 붉고 작고 촉촉한 그녀의 두 입술로.
“말해줘. 네 입술로, 그러겠다고 대답해줘. 제발…….”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간절함을 담자, 다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투는 꽤 거칠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가 그저 원나잇 했던 남자가 아닌 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다연은 그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자신은 그런 남자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제발’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빌고 있었다.
제발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지 말기를, 네 예쁜 얼굴은 제발 내게만 보여달라고, 간절히 빌고, 애걸하고, 사정하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정말 당신이라는 남자는 예측이 불가능하군요.’
다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다연의 대답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따뜻한 감촉이 목에서 어깨로 가슴으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흣.”
작게 벌린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태준은 그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그녀의 소리는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 숨을 자신과 그녀가 함께 나누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던 태준은 어제 발견한 그녀의 성감대를 조심스럽게 핥았다.
그러자 블라우스를 반쯤 걸치고 있던 그녀의 작은 어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태준은 그녀의 얇은 팔뚝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보드랍다. 무척이나 보드라워.
인내력에 한계를 느낀 태준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자, 다연은 그가 얼마나 많이 참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은 H라인 스커트 위로 그의 건강함이 느껴졌고, 딱딱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자신의 이성이 툭 하고 끊기는 걸 직감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여긴 회사고 또 우린 그저 어제 하룻밤을 즐긴 사이일 뿐인데…….
그런데 왜 제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
봉긋한 가슴 위를 간질이는 그의 입술을 밀어낼 수도 있는데, 치마 속을 헤집는 그의 손길을 막을 수도 있는데, 힘을 주어 다가오는 그의 하체를 피할 수도 있는데.
다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입맞춤을, 그의 손길을, 그를 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남자한테 이렇게 끌리는 자신이 너무도 가볍고 쉽게 느껴졌다.
두 개의 마음이 강력하게 부딪혔다. 그를 거부하라는 이성과 그를 받아들이라는 욕망이 다연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했다.
그리고 결국.
“정말 예뻐…….”
그가 이기고 말았다.
어깨의 반을 감싸고 있던 블라우스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있던 속옷 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버렸다.
회사에서 이런 행동은 위험하다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런 남자와의 관계는 위태롭다고, 자꾸만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다연은 그의 손길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태준은 다연을 번쩍 안고는 책상 위에 앉히고, 책상 위에 있는 모든 물건을 쓸어버렸다.
후두두둑- 물건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태준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그녀와 한 몸이 되는 순간만을 간절히 바랄 뿐.
그는 책상 위에 누워 있는 다연을 바라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추 풀리는 소리가 이토록 관능적일 줄은 살면서 처음 알았다.
이내 다연의 시야에 태준의 넓은 가슴이 보였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그리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묘하게 색정적으로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퇴폐적이었다가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였고, 또 추억에 젖은 듯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일렁이는 그의 눈빛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지만, 결국은 단 하나를 말하고 있었다.
“널 갖고 싶어.”
그는 그 무엇보다 연다연이라는 여자, 그 자체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나.
점점 다가오는 그에게서는 좋은 체취가 풍겼다. 다연이 샀던 초코 우유 냄새 같기도 했고, 맛있는 식빵 피자 향 같기도 했고, 또 그의 살결에서 풍기는 말 그대로 체향 같기도 했다.
체취까지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인지.
다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폐부 깊숙하게 그의 향기를 들이켰다. 마치 요리하기 전에 신선한 재료들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듯, 아주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그의 몸에 매달려 향에 취해있을 때, 치마 밑으로 낯선 느낌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녀의 것이 아니었기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긴…….”
다연이 그의 손길을 막으려 하자, 그가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를 요리해줘.”
그는 다연의 작은 두 손을 자신의 벨트 위에 얹었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것처럼 해달라는 듯.
이번에는 그의 말간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그득 차올랐다. 묘한 눈동자다. 때때로 변하는 눈동자는 그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연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움직여 그의 벨트를 푼 후, 단단하게 잠겨 있는 그의 바지 버클까지 풀고 말았다.
그리고 지퍼를 열기 위해 고리를 잡는 찰나.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당황한 다연은 눈을 들어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태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으며 그녀가 풀어헤친 바지를 정리했다.
너무도 여유롭고 차분한 행동이었기에 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문으로 향하던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다연의 블라우스를 들고 와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검지를 자신의 입술 위에 얹더니 다시금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태준은 몸을 살짝 문에 걸치고 반만 밖을 향했다. 다행히 책상은 문 뒤쪽에 있었고, 다연은 밖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에 있었다.
혹시나 밖에서 자신이 있는 걸 알아챌까, 다연은 숨을 죽인 채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굴까? 누가 온 걸까?
다연은 찾아온 사람이 제발 태훈만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다른 직원들은 태준이 물릴 수 있겠지만, 태훈은 그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 회사의 대표이고, 또 태준에게는 형이라고 했으니까.
“볼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잖아.”
심드렁한 태준의 목소리의 뒤를 이은 건.
“방이 코 앞인데, 뭐하러 전파를 낭비해?”
낮고 점잖은 태훈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