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처음 뵙겠습니다. 서태준이라고 합니다.”
아찔했다. 어젯밤 그 남자가 대표라니. 그것도 무려 의 레시피 담당 대표!
서태훈 대표가 의 경영을 맡고 있었다면, 베일에 가려져 있던 대표는 의 레시피와 맛을 책임지고 있었다.
대기업이 요식업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요즘, 이 설립될 수 있었던 건 레피시 담당 대표의 획기적인 요리가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서태훈 대표는 회의 시간에 종종 말하곤 했다. 레시피 담당 대표가 없었다면 지금의 은 없었을 거라고. 언젠가는 요리에 미친 그놈을 여러분께 소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시피 담당 대표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고,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태훈을 비롯한 의 원년 멤버들뿐이었다. 다연은 물론 유미와 박 팀장도 태준의 얼굴을 몰랐다.
요리 개발을 위해 주로 지방이나 해외를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
‘……나랑 잔 건데?’
평온했던 연다연의 일상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그것도 메가톤급 불청객이.
낯선 남자와 원나잇 한 것만으로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그 남자가 회사 대표라니! 그녀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의 레시피 개발자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의고 뭐고 간에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건 꿈일 거다. 서원이의 식당에서 술 먹고 뻗어서 악몽을 꾸는 거다. 악몽을……!
세차게 도리질 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때, 태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다연을 본 그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제 내 신원은…… 확실해진 건가?”
직원들이 무슨 말이냐며 웅성거렸지만, 다연은 그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난 신원도 모르는 남자랑 안 사귀어요.”
회사 뒷마당에서도.
“그쪽은 속도 없어요? 난 신원 불확실한 남자랑 사귈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카페 앞에서도.
[다시 말하지만 난 그쪽이랑 사귈 생각 없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랑 절대 안 사귄다고요!]
회의실에서 문자로도.
그는 지금 다연이 했던 말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난 신원 불확실한 남자 아니야. 너희 회사 대표지.’라고.
이로써 다연은 깨달았다. 적어도 그는 신원이 불확실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신원이 확실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태훈이 묻자, 태준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주어를 빼고 말하는 바람에 누굴 칭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다연은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걱정된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그만둘까?’
잠시 고민하던 다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그만두기에는 은 너무도 좋은 회사였다. 다른 회사보다 1.5배는 많은 연봉에, 연수 프로그램은 물론 휴가와 여행 그리고 보너스 등의 복리후생 또한 업계에서 1위였다.
무엇보다 다연은 을 좋아했다. 의 경영 이념도, 음식에 대한 철학도 그리고 의 맛있는 요리도.
‘에 입사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렇게 그만둘 순 없어!’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남자를 피할 방법.
회사의 훌륭한 복리후생을 이용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해외 연수에 대한 말이 나왔고, 성과 좋은 직원 순으로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한 일이 년 해외에 다녀오면 그에게도 잊힐 거고 또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으니…….
“야. 연다연.”
“어?”
그때, 옆에서 유미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다연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왜?”
다연의 물음에 유미는 대답 대신 어딘가를 향해 턱짓했다. 그녀의 턱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 직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태훈이 물었다.
“연다연 씨, 괜찮겠습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못 들었습니다.”
다연이 솔직하게 말하자, 태훈이 다시 점잖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서태준 대표가 회사를 오래 비워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연다연 씨가 당분간 서태준 대표의 비서 대행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예? 왜 그걸……?”
……제가 해야 하는 거죠?
라고 묻고 싶었지만, 다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 특히 여직원들이 그녀를 죽일 듯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서태준 대표가 레시피 개발을 담당하고 있으니, 메뉴개발팀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다연 씨는 어떤가요?”
다연은 황망한 눈으로 태훈과 태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태훈은 꽤 정중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태준은……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두 남자 모두 ‘거절은 거절한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외 연수는 개뿔!
다연은 자신이 서태준이라는 거미가 정교하게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불쌍한 나비처럼 느껴졌다.
***
회사 건물은 총 13층으로 이뤄져 있었고, 다연이 속해있는 메뉴개발팀은 바로 아래층인 12층에 있었다.
대충 짐을 꾸린 다연은 빠진 물건이 없나 책상을 둘러보았다.
이것저것 빠진 것투성이였지만, 다연은 모든 물건을 상자에 담지 않았다. 자신의 물건을 몽땅 가져가면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야, 거꾸로 해도 연다연.”
얼추 짐을 꾸리자, 유미가 그녀를 불렀다.
“네가 이렇게 13층에 올라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표실이 있는 13층은 임원급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일개 사원은 엘리베이터에서도 감히 13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13층으로 이사를 하다니.
“잘하고 와.”
“잘할 게 뭐 있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떨리는 건 바로 다연 자신이었다.
“혹시 아냐? 작은 서 대표님이 너 마음에 들어서 콕 집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유미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근데 작은 서 대표님은 또 뭐야?”
아까부터 유미는 태준을 향해 ‘작은 서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키는 태훈보다 태준이 더 큰데 말이다.
“들어보니까 둘이 사촌이래.”
“사촌?”
그러고 보니 이름이 비슷했다. 서태준, 서태훈. 아마도 돌림자를 쓰는 모양이었다.
“서태훈 대표님이 한 살 형, 서태준 대표님이 동생. 그래서 다들 작은 서 대표님이라고 불러.”
‘서태훈 대표님이 서른세 살이니까, 서태준 대표님은 서른두 살이겠구나. 그럼 나랑은 여섯 살 차이…….’
그동안 동갑만 사귀던 다연은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한참은 많게 느껴졌다.
‘연상은 사귀어 본 적 없는데……. 연다연!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다연은 얼른 고개를 젓고는 사무실을 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다연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연다연, 파이팅이다!”
“으응. 언니, 내 자리에 있는 물건 버리…….”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내 물건 버리지 말아줘. 곧 돌아갈 테니까.”
혼잣말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3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다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기에 태준의 방이 어딘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3층은 방 두 개가 서로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고, 중간에 커다란 회의실이 있었다. 임원 회의하는 곳이 바로 이곳인가 보다.
두 개의 대표실에는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고 그저 ‘대표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아마도 태준의 부재로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오직 한 사람, 서태훈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다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문 앞에 섰다.
목을 가다듬고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노크를 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들자,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 그런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연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태준이 생기발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 방은 들어갈 일 없을 거야. 이 방은 쳐다보지도 말고, 궁금해 하지도 마.”
“예?”
“내 방은 저쪽.”
“아아…….”
그의 방이 어딘지는 알겠는데,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건지. 다연이 놓으라는 듯 손을 쳐다보았지만,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 가자.”
태준은 한 손으로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빼앗아 들었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를 이끌었다. 다행히 13층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연은 자꾸만 주위를 힐끔거렸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하나가 보였고,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아마 여기가 그녀가 일할 곳인 모양이었다. 비서의 자리.
하지만 태준은 비서 대행에게 비서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을 이끌고 자신의 방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아 하면 말이다.
“제 자리는 밖에 있는 것 같은데요?”
다연이 묻자, 태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직 마치지 못한 말이 있잖아.”
또 저 눈빛이다. 입 밖으로 거절을 못 뱉게 만드는 눈빛,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빛, 온몸의 경계심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눈빛…….
다연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렵사리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손, 놓고 말씀하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각보다 쉽게 태준은 다연의 손을 놓았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다연이 딱딱하게 묻자, 태준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 책임져.”
태준은 그 말과 함께 다연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고,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책임진다고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가 또 한 발자국 다가왔고, 그녀가 또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그건 술김에…….”
“술김에 사람 마음 다 흔들어 놓고, 술 깼으니 나 몰라라 한다고?”
태준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시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걸어왔다.
그와의 거리를 두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선 다연의 등 뒤로 딱딱한 문이 느껴졌다.
“그건 안 되겠는데?”
묘하게 색정적인 표정과 함께 ‘똑딱’하고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