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태준을 본 순간 다연의 등골에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회사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카페에서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회사 안까지 들어오다니!
게다가 그는 벌써 여직원들 사이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남자 카페에서 초코 우유 먹던 그 남자, 맞지?”
“어. 확실해. 진짜 잘생겼다. 어쩜 서 대표님보다 더 잘생겼지?”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 서 대표님 탈덕하고, 저 남자한테 입덕할란다.”
“치. 금사빠.”
“왜? 넌 안 하려고?”
“안 하긴 왜 안 해? 할 수만 있다면 둘 다 갖고 싶다.”
범상치 않은 남자의 등장에 여직원들이 웅성거렸지만, 다연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반나절 동안 저 남자는 얼마나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 앞으로 더 놀랄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근데 저 남자, 여긴 왜 온 거지?”
“그러게. 대표님이랑 같이 오는 거 보면 아는 사이인가?”
“설마 회의 참석하는 건 아니겠지?”
태준의 얼굴이 취해 있던 여직원들이 슬슬 이성을 되찾으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의 사칙상 회의 시간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금지된 일이었다. 특히 메뉴개발팀의 회의는 아직 소비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레시피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가는 자리다.
괜히 정보라도 새어나가 라이벌 회사에 레시피가 퍼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면 자료를 모두 수거해 파쇄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다.
그런데 외부인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회의실까지 들어오려고 하다니. 아무리 대표의 지인이라고 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회의실을 향해, 아니, 다연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다연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누군가 두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아까 누굴 만난다더니, 그게 서 대표였던 걸까? 둘이 무슨 사이일까? 친구? 후배? 선배?
뭐가 됐든 다연은 반갑지 않았다. 웬만하면 회사 사람들과 사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공은 공, 사는 사로 확실히 구분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젯밤 원나잇 한 남자와 대표님이 서로 아는 사이라니.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말하지는 않았겠지?’
우리가 잔 사이라고. 너희 회사 여직원이랑 잤다고. 그게 바로 연다연이라고…… 말하지 않았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연은 어제의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술에 취해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하지만 죽도록 미운 자신은 퇴근 후에 미워하고, 일단 저 남자부터 막아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선뜻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번호 좀 찍어줘요.”
그때, 아까 그의 핸드폰 번호를 땄던 게 떠올랐다.
안절부절못하던 다연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어떡해요? 카페에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난 그쪽이랑 사귈 생각 없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랑 절대 안 사귄다고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인 후, 발송 버튼을 눌렀다. 회의실 밖에서 문자 도착 알림음이 들려왔고, 태준이 문자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다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문자를 확인했으면 제발 발길을 돌려 나가길 바라며…….
남자는 유리 너머의 다연을 바라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다연을 본 그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아들었다는 뜻인가? 회사 밖으로 나가겠다는 뜻?
하지만 다연은 곧 그게 자신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다연을 향해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게 끝! 오직 그뿐이었다.
그는 답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뒤돌아 회사를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다연의 문자를 잘근잘근 씹어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태준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모습은 왜 이리도 아름다워 보이는지. 다연은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너 정말 저 남자랑 아는 사이 아니야?”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을 때, 유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너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저렇게 웃냐?”
정말 그랬다. 태준은 수많은 직원 중 다연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그때 서 대표가 태준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했던 다연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오늘은 밝혀야지.”
“지금은 좀…….”
왜 자꾸 나를 쳐다보면서 뭘 밝힌다고 말하는 걸까? 혹시? 아니겠지? 아닐 거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서 대표가 다연을 불렀다.
“연다연 씨.”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다연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온몸에서 땀이 샘솟았고,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두 손이 벌벌 떨렸고,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회의실 안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네에?”
다연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겨우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 대표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서 대표에게 꽂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입술에.
과연 저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두려워 그의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불안함과 떨림이 가득한 눈으로 촉촉한 입술을 감쳐 물며 침까지 꼴깍 삼키며 말이다.
다연이 마음을 졸이고 있는 그때.
남자는 그녀의 시선이 서 대표에게 꽂혀있는 걸 발견하고는 눈매가 가늘어졌다. 두 손까지 꼭 모은 채로 서 대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상당히 거슬렸다. 아주 몹시도 말이다.
남자는 빼뚜름한 눈으로 서 대표를 노려봤다.
“다연 씨.”
서 대표가 정답게 다연의 이름을 부르자, 반반한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에 제출했던 레시피 자료 다시 한 번 보내주세요.”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 때문에 부른 것이었는데, 괜히 마음을 졸였다.
다연은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서 대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회의 마치고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 그녀의 미소가 한층 상큼했다.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 앉던 다연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온종일 미소만 짓던 해사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딘지 묘하게 낯빛이 어두운 것 같기도 했고.
저런 얼굴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다연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내 문자를 씹었으니, 나도 네 시선을 씹어주겠어.’라는 약간의 유치한 마음이 들어간 행동이었다.
“자, 그럼 회의 시작할까요?”
서 대표가 회의 시작을 알리자, 박 팀장이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그의 질문에 자료를 살피던 직원들의 눈이 모두 남자에게 쏠렸다.
회의 때 관계자 외의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는 사칙은 두 명의 대표가 만들었다고 했으니 모를 리 없을 테고, 대체 그가 누구기에 회의실에 당당히 들어올 수 있었을까?
직원들은 물론 다연까지 궁금의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차차 설명해드리기로 하죠.”
하지만 서 대표는 아주 자연스럽게 넘겨 버렸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자 서 대표는 물론 남자도 회의에 집중했다. 그는 직원들이 발표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고개를 끄떡이기도 했다.
드디어 다연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녀는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회의 시간 내내 그를 의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은 팀원 개인의 레시피가 통과되는 경로는 아예 없었다.
보통은 메뉴개발 1, 2, 3팀의 팀원들이 머리를 모아 팀별로 레시피를 만들면, 대표가 맛을 보고 통과 여부를 결정하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레시피만 뛰어나다면 팀과 개인을 가리지 않고 뽑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제일 까다로운 대표의 입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메뉴개발 3팀에 있는 다연은 개인으로 참여했고, 이 때문에 어제 박 팀장과 의견 다툼이 있었다.
입사 후 매번 머리 한 번 쓰지 않는 박 팀장과 강 대리에게 레시피를 뺏겼던 다연에게는 불가피한 결정이었고, 박 팀장은 자신과 팀원들을 배신하는 행위라며 다연을 몰아붙였다.
어제 퇴근 직전까지 다그치는 바람에 씁쓸한 마음에 술 한잔한 것이 저 남자와의 원나잇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어쨌든 오늘 회의는 다연에게 중요했다. 여기서 자신의 레시피가 떨어지면 박 팀장은 자신을 더욱더 몰아붙일 거고, 팀원들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 낙인을 찍을 테니까.
다연의 차례가 다가왔다.
“잘해.”
유미가 같은 팀에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마워, 언니.”
유미를 향해 작게 속삭인 다연은 사람들 앞에 섰다.
***
발표를 마친 다연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서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뽀얀 얼굴은 긴장으로 상기되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고, 다물지 못한 두 입술 사이로 작은 혀가 보드라운 입술 안쪽을 적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태준은 묘하게 가슴이 들끓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저런 표정은 나만 보고 싶은데…….’
어젯밤 긴장된다며 자신의 팔뚝을 움켜잡았을 때, 다연은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새하얀 얼굴 위로 핑크빛 꽃이 피었으며, 유난히도 붉은 두 입술 사이로 연신 혀가 오고 갔다.
잡아먹고 싶을 만큼 예쁜 얼굴은, 저런 표정은 나에게만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 서 대표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사실 태준은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연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서 회의실에 왔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서 대표의 입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 대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서질 않나, 서류 심부름 하나에 방긋방긋 웃질 않나.
그녀를 본다는 기쁨에 젖었던 태준의 마음은 금세 질투의 불꽃으로 화르르 불타오르고 말았다.
“맛과 건강을 동시에 잡는다? 기획이 좋네요, 연 대리.”
서 대표의 칭찬에 다연의 얼굴에 말간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서 대표를 보는 다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벅찬 기쁨이 가득 찬 그녀의 눈에 생기가 너울거렸고, 입가에는 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기분 나쁘게.
“그럼 이쯤에서 오늘 회의 마치고, 다음 회의 때 최종 후보 레시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서 대표가 회의를 끝내려고 할 때였다.
“잠깐!”
태준이 소리쳤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는 서 대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뭐? 지금?”
“응.”
“아까는 밝히기 싫다더니.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서 대표는 피식 웃으며 태준의 어깨를 두드린 후, 직원들 앞에 섰다.
“제 옆에 서 있는 이놈이 누군지, 아까부터 많이 궁금하셨을 겁니다.”
그의 말에 웅성거리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우리 회사는 저를 비롯해 또 한 명의 대표가 공동으로 설립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서 대표의 뜬금없는 회사 설립 배경에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그를 쳐다봤다.
“원년 멤버이신 몇몇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 외에 또 다른 한 명의 대표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말에 다연은 설마 하는 눈으로 태준을 쳐다봤지만,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의 훌륭한 맛과 레시피를 담당하고 있는 서태준 대표입니다.”
다연의 머리가 멍해졌다. 어젯밤 자신과 함께 원나잇을 한 저 남자가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대표였다니!
털썩. 다리에 힘이 빠진 다연이 자리에 주저앉자, 태준이 직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태준이라고 합니다.”
직원들을 쭉 훑어본 태준의 시선이 다연에게 멈췄다.
“이제 제 신원은 확실해진 건가요?”
마치 그녀에게 말하는 것처럼, 태준은 다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