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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리해줘-4화 (4/74)

4화

이따 퇴근하고 그 카페에서 보자고 했지, 퇴근할 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연의 자리가 훤히 보이는 창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 여직원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니!

‘설마 저러다가 회사 사람들한테 나 아느냐고 묻는 거 아니야?’

불안함이 눈덩이처럼 커진 다연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른 곳에서 기다리라고 해야겠다. 회사에서 아주 먼 곳에서.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손가락이 주춤거렸다.

그의 번호를 몰랐다. 그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긴 했는데, 정작 그의 번호를 물어보지도 그의 명함을 받지도 않았다.

다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빨대를 꽂고 초코 우유를 마시는 그는 몹시도 천진난만해 보였다.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쳤다.

“거꾸로 해도 연다연.”

“아, 유미 언니.”

뒤를 돌아보니 유미가 서 있었다. 그녀는 같은 조리개발팀에 있는 선배이자 회사에서 가장 친한 언니였다.

“솔직히 말해.”

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뭘 솔직히 말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앙큼한 것. 시치미 떼기는.”

다연은 유미가 빨리 본론을 말해주었으면 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슨 시치미?”

“너 남자 생겼지?”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었다고 다들 넘겨짚기는.

“무슨 시답잖은 소리야? 일이나 하세요.”

대충 둘러대고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유미가 다연을 붙잡았다.

“그럼 카페에 있는 저 남자는 누구야?”

유미가 턱짓으로 정확하게 태준을 가리켰다. 놀란 다연의 눈이 커지자, 유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엄청나게 잘 생겼던데?”

“누, 누가 그래? 그 남자가 내 남자친구라고?”

설마 그 남자가 회사 사람들을 붙잡고 나불댄 건가? 나중에 말하자고 알아듣게 말했건만!

“예리한 내 촉이 그러던데? 저 남자가 네 남자친구라고.”

촉? 저 남자가 한 말이 아니라?

“네 꼴을 보아하니 외박한 게 틀림없는데, 회사 앞 카페에서 웬 남자가 네 명함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미쳐!”

다연은 유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연다연! 어디가? 곧 회의야!”

등 뒤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연은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미의 말을 듣고 나니 눈덩이처럼 커진 불안함이 산사태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저 남자가 회사 여직원들의 이목을 끌면서 괜한 오해를 사지는 않을지, 혹시나 어제 일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지, 그래서 회사 전 직원이 자신이 원나잇 한 걸 알아버리면 어쩌지!

그나마 자신의 명함을 본 게 유미라서 다행이지, 말 많은 사람 눈에 띄었으면 괜한 소문이 돌았을 게 뻔했다.

다연은 신호를 기다리며 불안한 눈으로 건너편 카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발견한 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웃는 모습이 어찌나 해맑은지, 다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흔들어 줄 뻔했다.

뭐가 그렇게 반갑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내가 가서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다연은 그에게 할 말을 정리하며 빠른 걸음으로 찻길을 건넜다.

그는 다연을 본 순간, 주인의 퇴근을 간절히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카페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반겼다.

“벌써 퇴근한 거야? 생각보다 빨리 했네?”

싱글벙글 웃는 그를 보자 쓴 소리를 내뱉으려던 다연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톡 쏘아붙이자, 햇살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퇴근하고 나중에 보자고 했지, 누가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리라고 했어요?”

남자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리고 내 명함은 왜 들고 있는 거예요? 회사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다연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댁이 회사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내가 곤란할 거라는 생각 안 했어요?”

하루아침 사이 확 변해버린 자신에게 질려 버렸으면. 웬 변덕스러운 또라이를 만났다고 욕하며 돌아섰으면, 그래서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길 바라며 쉴 틈 없이 잔소리를 퍼붓고 있을 때, 남자가 다연을 향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펼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햇볕에 네 얼굴이 그을릴까 봐. 봄볕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데.”

그의 말에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자신은 이토록 비겁하게 그를 밀어내고 있는데, 이 남자는 날 언제 봤다고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구는 건지. 어제 만난 사이에 어쩜 이토록 마음을 쓸 수 있는 건지.

자신은 그를 밀어내고 있는데, 그는 생각지도 못한 제 빈틈을 파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남자였다. 그간 그녀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선수인가? 아니면 내가 돈 좀 있어 보이나? 그것도 아니면 우리 어제…… 속궁합이 잘 맞았나?’

쓸데없는 생각이 그녀의 속을 어지럽혔다.

다연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피하기만 한다고 피해질 것 같지도 않았고, 밀어내기만 한다고 밀려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쪽은 속도 없어요? 난 신원 불확실한 남자랑 사귈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 신원 불확실한 사람 아닌데.”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도톰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널 기다린 건 맞는데, 지금은 나도 볼 일이 있어서 여기 있었던 거야.”

“볼…… 일?”

“응. 잠깐 누구 만나기로 했거든.”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착착 감겼다. 초코 우유를 마셔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세상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조금 전까지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던 다연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햇볕을 막아준 그의 손길 하나에 말이다.

“어? 벌써 왔네…….”

남자는 저 멀리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만나기로 했다는 사람이 왔다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표정을 짓는 건지.

태준은 다연과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물었다.

“퇴근 몇 시에 해?”

“6시…… 쯤?”

“그럼 6시에 카페에서 만나. 기다리고 있을게.”

남자의 말에 다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려던 다연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번호 좀 찍어줘요.”

아까처럼 혹시 모를 일을 위해 번호는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연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찻길을 건넌 다연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멀어지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손을 흔들었다.

***

다행히 회의가 조금 미뤄졌다.

메뉴개발팀은 한 달에 한 번씩 의 대표와 함께 전체 회의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대표가 늦는 바람에 직원들은 회의실에 모여앉아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다.

“오늘도 눈 호강하겠네.”

유미가 다가와 다연에게 속삭였다.

“우리 서 대표님 안 본 사이 얼마나 더 잘생겨지셨을까?”

은 서 대표의 탁월한 사업 수단으로 만들어진 회사였다. 그리고 그 젊은 사장은 몹시도 잘 생겼다.

그래서 여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회의를 손꼽아 기다리며 온갖 치장을 다 하고 오곤 했다.

“근데 너 말 안 해줄 거야?”

“뭘?”

“아까 그 남자 누군지.”

어째 그냥 넘어간다 했는데. 역시 박유미는 한 번 문 흥밋거리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뛰쳐나가? 우사인 볼트인 줄.”

자신을 놀리는 말에 다연은 슬그머니 눈을 흘긴 후,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근데 언니 얼굴 좀 탔다? 주말에 놀러 갔다 왔어?”

“놀러는. 시댁에 다녀왔다.”

“그 먼 데까지? 집안 행사 있었어?”

“우리 어머님 녹차 밭 하시잖아. 수확한다고 주말에 놀지 말고 도우라고 해서 갔다 왔어.”

“고생했네. 그래도 간만에 가족들 다 모여서 재미있었겠네.”

다연의 말에 유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재미는 개뿔.”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난 다들 내려오라고 해서 가족들 다 오는 줄 알았더니 아가씨는 쏙 빼놓고 안 불렀더라?”

“정말?”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보낸다더니, 딸내미 피부 탈까 봐 나만 쏙 부른 거 있지?”

투덜거리는 유미의 말에 피식 웃던 다연은 문득 남자가 떠올랐다.

“햇볕에 네 예쁜 얼굴 그을릴까 봐. 봄볕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데.”

그 말과 함께 커다란 손을 펼쳐 햇볕을 막아주던 남자. 그에게서 풍겼던 초코 우유 향이 아직도 다연의 코끝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묘한 남자다. 묘하게 끌리는 남자. 처음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외모에 끌린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를 끌어당기는 스킬이 보통 아니었다.

포근한 느낌도 들었고, 어딘가 낯익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또 어디선가 만나본 사람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제 나도 모르게 나를 허락……했나 보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진통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박 팀장이 들어와 외쳤다.

“자! 집중! 곧 대표님 오시니까 회의 준비하자고!”

박 팀장의 말에 팀원들은 자신이 준비해온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

오늘은 각 팀에서 만들어 온 레시피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오늘 발표한 레시피 중 괜찮은 것 몇 개를 추려서 보강한 후, 대표와 직원들을 대상으로 시식회를 연다. 최종 레시피는 각 가맹점에 뿌려지게 된다.

레시피를 개발하고 보완, 발전시켜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 바로 다연이 하는 일이었고, 의 1년 농사를 시작하는 첫 삽을 뜨는 날이기도 했다.

그동안 준비해온 자신의 레시피를 훑어보고 있을 때, 유미가 그녀를 툭 쳤다.

“왔다. 대표님!”

고개를 돌리자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회의실 밖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쳤다.

깔끔한 수트에, 잘 빗어 올린 포마드 헤어, 그리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완벽한 얼굴.

서 대표는 회의실로 들어오며 직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권위적인 상사와는 거리가 먼,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고마운 건 고맙다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여직원이 그렇듯, 다연도 턱을 괴고 서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넋 놓고 서 대표를 보고 있을 때, 여직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대박. 완전 잘 생겼어.”

“어머, 저 남자는 누구야?”

서 대표를 향한 탄성은 아니었다.

“아까 그 남자 아냐?”

“그 남자?”

“아까 낮에 카페에서 봤던.”

“맞네, 맞아!”

여직원들의 시선이 향해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다연은 들고 있던 자료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 위로 태준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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