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요리해줘-3화 (3/74)

3화

“사귄다니요. 미쳤어요?”

“아니. 안 미쳤는데?”

“그럼 돌았어요?”

“아니. 안 돌았어.”

“근데 왜 이래요?”

다연의 상식으로는 어제 만난 남자와 오늘 사귄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뭐 물론 술에 취해 어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는 것과 사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귄다는 것은 한 사람과 관계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뜻인데, 다연은 남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나이와 직업은 물론 성격은 어떤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뭘 좋아하고 또 뭘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한 마디로 그가 잘 생겼다는 것 빼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런데 뭐? 사귄다고 생각해?

다연은 다시금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설마 어제 그 일로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맞아. 사귄다고 생각해.”

황당해서 말이 막혀버렸다.

하룻밤을 함께했다고 사귄다고 생각하다니. 순진한 건지, 미련한 건지.

다연은 마음을 좀 진정시킨 후, 확고하게 말했다.

“우린 사귀는 게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그저 하룻밤을 함께 보낸 것뿐이지.”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굳어졌다기보다는 조금 슬퍼 보인달까? 아니다. 곧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남자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저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반칙이지.

안 그래도 잘 생겨서 눈을 뗄 수가 없는데, 풍성한 속눈썹을 축 내려뜨리고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 어쩔 건데!

다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를 달래기 위해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원나잇만 하지 않고 멀쩡한 상태로 만났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연은 싫었다. 싫은 건 이 남자가 아니었다. 그저 술에 취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자신이 싫은 것이었다.

이 남자를 볼 때마다 싫은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아 피하고 도망치는 것일지도.

“난 신원도 모르는 남자랑 안 사귀어요. 그리고 난 그쪽이랑 사귈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요. 다시는 여기 찾아오지 말고요. 알았죠?”

무슨 남자 눈이 저렇게 예쁜지.

다연은 애써 남자의 눈길을 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며 냉정하게 돌아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 빨리 들어가야 한다. 빨리.

다연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었다. 남자가 청아한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마치 엄마 손을 놓치기 싫은 아이처럼.

아, 저 눈빛.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저 눈빛은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솜사탕의 맛을 처음 본 아이처럼 자꾸만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아서.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고 싶을 것만 같아서.

다연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남자는 한참 동안 사슴 같은 눈동자로 다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그랬잖아.”

그의 도톰한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눈빛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입술이었다. 그의 입술은 잘 익은 딸기처럼 붉었고, 마카롱 필링처럼 두툼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젯밤 그와 난 키스를 했을까? 내 입술과 저 입술이 서로 닿았을까? 그의 입술을 머금으면 어떤 느낌일까? 부드러울까? 거칠까? 아니면 끈적할까?

다시 한 번 머금고 싶다. 저 입술을 입안 가득 머금어보고……!

‘미쳤나 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입술 한 번 본 것뿐인데, 얼굴이 빨개질 만큼 야릇한 상상에 빠지다니.

민망해진 다연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요?”

제 발 저린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 소리로 묻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 책임진다고.”

내가?

“어제 네가 나 책임진다고 그랬잖아.”

설마!

“두 번이나 물어봤는데, 그러겠다고 대답했잖아.”

말도 안 돼……!

다연의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고, 반대로 남자는 또렷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 책임져.”

남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아이처럼 해사한 표정을 짓거나, 곧 울 것만 같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책임져’라는 말과 함께 왜 저렇게 확고한 얼굴을 하는 건지.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살구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호텔 침대 위에서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나 책임져. 약속해. 나 책임질 거지?”

그의 말처럼 그는 두 번씩이나 물었고, 다연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응. 그럴게. 그럴게요. 그러니 어서 나를 안아줘.”

그가 온몸으로 들어오자, 자신의 입에서 뜨거운 교성이 흘러나왔다.

딸기처럼 붉고 마카롱처럼 도톰한 그의 입술이 자신의 온몸에 입을 맞추었고, 남자와 자신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기억의 조각이 조금씩 떠오르자 다연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어제의 일을 정리해보면.

식당에서 저 남자와 합석한 뒤, 2차 가자며 그의 손을 이끌고 호텔로 향했고, 책임지라는 남자의 말에 알았다고 답한 후, 그와 잠자리를 가졌다……?

자신이 한 행동이지만, 뭐 하나 이해가 가는 구석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미쳤어. 내가 미쳤어.’라는 말만 되뇔 뿐.

다연은 멈춰버린 머리를 굴려보려고 애썼지만, 잘 안 되었다.

출근부터 해야겠다. 샤워는 이미 포기했고, 지각이라도 면해야지.

“저기요…….”

“서태준.”

“예?”

“내 이름은 서태준이라고.”

지금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닌데. 뭐 어쨌든.

“서태준 씨. 제가 지금 출근해야 하거든요.”

“아……. 출근.”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다연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내 명함이에요. 이따 퇴근하고 요 앞 카페에서 만나요.”

“지금은 출근해야 하니까 이따가…….”

그는 다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너편 카페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잊지 않기라도 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릴게.”

***

지각은 면했지만, 결국 샤워는 하지 못했다. 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제대로 된 화장도 하지 못했다. 잠깐 틈을 내서 세수만 겨우 했을 뿐.

그녀를 본 사람마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갔나 봐? 옷이 똑같네?’라는 소리를 해댔다.

남의 사생활에 관심 많은 강주은 대리는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누구랑 외박한 거야?’라며 원색적인 농담을 했다.

“내가 누구랑 외박을 하든 말든, 지가 무슨 상관인데?”

다들 점심 식사하러 간 사이 다연은 숙직실에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밖에 나가서 옷이라도 한 벌 사올까 했지만, 옷 갈아입으면 또 갈아입었다고 다들 한소리 할 것 같아서 그건 포기했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니 가관이었다.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맞춤의 흔적은 목덜미와 어깨는 물론 가슴 곳곳에 울긋불긋하게 색칠되어 있었다.

“허……. 여기까지?”

허벅지 안쪽에서 붉은 자국을 발견한 다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제의 자신을 후회했다.

처음 만난 남자와 함께 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허락했다니.

남자 경험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목석이라고 불릴 만큼 남자와의 관계를 별로 즐기지 않았던 그녀였다.

사랑의 즐거움을 몰랐고, 왜 굳이 그런 행위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손만 잡고 팔짱만 껴도 좋은데, 왜 서로 민망하게 옷을 벗고 서로의 몸에 입맞춤하는 건지.

그런데 했다.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가 이렇게 깊숙한 곳에 흔적을 남길 만큼 진하게.

“도대체 난 그 남자의 뭐에 끌린 거지?”

호기심이 들끓었다.

서태준. 그는 단순히 하룻밤만 함께한 사람이 아니었다.

목석이라 불리던 그녀가 자신의 몸을 허락한 남자였지.

***

다연은 샤워를 마치고 엷게 화장한 뒤, 사물함에 넣어두었던 회사 점퍼를 꺼내어 입었다.

등에 이라고 회사명이 크게 적혀있는 점퍼는 대학생들이 입는 과 점퍼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밖에 입고 다니기엔 창피하니까 안에서만 입고 있을 생각으로 옷을 걸쳤다.

점퍼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다연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다연은 아까 사온 초코 우유를 마시기 위해 봉투를 뒤졌다. 그런데 봉투에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만 있을 뿐 초코 우유는 없었다.

대충 커피로 때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박 팀장과 함께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커피잔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특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회사는 한식부터 일식, 양식, 중식 그리고 카페까지 다양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요식업체였다. 다연은 그중 가장 잘 나가는 한식 파트의 메뉴개발팀의 팀원이었고.

은 대기업에서 만든 회사는 아니었다. 젊은 사장 두 명이 뭉쳐 끈질긴 노력으로 만들어낸 젊은 기업이었다.

가맹주들에게 갑질하지 않고, 가맹비도 최소한만 받는 곳으로 가맹주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은 요식업체답게 직원들의 식사도 꼼꼼하게 챙겼다. 직원들에게는 점심 식사뿐만 아니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커피와 간식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밖에 나가 봐야 사내 식당보다 맛있는 곳이 없다며 특별한 약속이 없는 이상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커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직원들의 손에 회사 바로 앞 카페의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날이 좋아서 산책하고 왔나?’

다연이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할 때, 강주은 대리를 비롯해 여직원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와.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어.”“진짜 잘생겼더라. 머리 뒤로 후광이 번쩍번쩍하더라니까.”

“그러니까. 산책하다가 그 남자 얼굴 보고 나도 모르게 카페로 발이 움직이더라니까.”

“연예인인가? 그런 얼굴은 연예인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 그런 얼굴은 아예 공공재 해줘야 해.”

얼마나 잘생긴 남자를 봤는지, 여직원들은 금쪽같은 점심시간 내내 그 남자 이야기를 할 참인 모양이었다.

“나오면서 봤는데, 그 남자 우리 회사 명함 들고 있더라?”

“어? 너도 봤어? 나도 봤는데. 우리 회사에 여자친구 있나?”

“누군지 몰라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그런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부럽다, 부러워. 여직원들의 입에서 부럽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에 사내 카페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직원 한 명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근데 그 남자 커피는 손도 안 대고 초코 우유만 마시더라?”

“혼잣말하는 것도 들었어. ‘역시 해장엔 초코 우유가 최고지’라고 하는 거.”

“술 마시고 초코 우유로 해장하나 봐. 귀엽다.”

여직원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꺅꺅거리며 웃었지만, 다연은 그렇지 않았다. 어쩐지 그 남자가 누군지 알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연은 창가로 다가가 맞은편 1층 카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

“망할.”

입에서 절로 욕이 새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