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호텔에서 나온 다연은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 같았으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했겠지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또 꼴도 말이 아니었다.
뒷좌석에 앉은 다연은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살폈다.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들었는지 얼굴 여기저기에 마스카라가 번져 있었다.
다연은 번진 화장을 대충 정리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출근하기엔 아직 일렀고, 그렇다고 집에 들르기엔 모호한 시각이었다.
그녀는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숙직실 샤워룸에서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옷은 사물함에 넣어둔 작업복이라도 입어야겠다. 그럼 외박한 걸 들키지는 않겠지.
머릿속에 오늘을 어떻게 시작할지 대충 정리되자, 슬며시 그 남자가 떠올랐다.
자신과 어젯밤을 함께 보냈던 남자.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제의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조금 전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만 떠올랐다.
침대 위에 나른하게 엎드려있던 남자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마를 덮고 있던 곱슬머리, 풍성하고 길던 속눈썹, 배일 것 같은 콧날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도톰하고도 붉은 입술, 그리고 묘하게 색정적인 몸매까지.
어느새 다연의 머릿속에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고 엎드려 있던 그는 상체를 완전히 벗은 채 얇디얇은 하얀색 이불만 덮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등 근육과 어깨, 손등 위로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푸른색 핏줄,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 있는 엉덩이에, 이불 밑으로 살짝 나와 있는 커다란 그의 발까지 떠오르자, 다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를 떠올린 순간 그녀의 몸이 살짝 더워졌기 때문이었다.
“아아. 미쳤어, 연다연!”
그 남자는 누굴까? 어디서 어떻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하게 된 걸까? 도대체 그 남자의 뭐에 끌려서?
생각을 이어가던 다연은 피식 비소를 흘렸다. 조금 전에도 그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으면서 뭐에 끌리긴…….
다연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알코올로 소독된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제 박 팀장에게 실컷 깨지고, 강주은 대리와 크게 한 판 한 다연은 가라앉은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그녀의 친구 서원이 운영하는 진식당을 찾았다.
서원은 재료만 있으면 그녀가 원하는 음식은 뭐든 만들어 주기 때문에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그의 식당을 찾곤 했다.
“묵은지 닭볶음탕, 돼?”
“안 될 리가 없지.”
“소주도 한 병만.”
“바쁘니까 술은 갖다 먹어.”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좁은 가게는 북적거리고 있었다.
다연은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 빈속에 소주를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음식이 나왔고, 아쉬웠던 다연은 소주 한 병을 다시 땄다.
서원은 잠깐의 시간도 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얼른 먹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소주를 마시려고 할 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 긴 속눈썹, 베일 듯한 콧날, 살짝 올라간 입꼬리.
사라진 기억을 헤집자, 아까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남자를 만난 곳이 서원의 식당이었다니.
다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후, 계속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네. 그러세요.”
남자를 만났을 때도 이미 반쯤 취해 있던 다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다연은 옆에 앉은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입안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알싸한 소주가 입안에서 꽤 단맛을 내고 있었다.
“달다, 달아. 달면 안 되는데. 더 먹고 싶어지는데.”
혼잣말하며 닭다리 살을 묵은지에 싸서 입안에 넣었다. 탱글탱글한 닭다리는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었고, 묵은지가 느끼함을 잡아줘 입안에서 환상의 맛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캬! 역시 진서원 요리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서원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지만, 요리하느라 바쁜 서원은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혼자 머쓱해 하고 있을 때, 서원 대신 옆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건 뭔가요? 메뉴판에 없는 것 같은데.”
“이건 메뉴판에 없어요. 사장이 제 친구라서 특별히 해준 거거든요.”
그렇구나, 라며 혼잣말하는 남자는 묵은지 닭볶음탕에 시선을 꽂은 채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하긴 비주얼만 봐도 군침이 흐를 만한 요리였으니까.
다연은 남자를 향해 뚝배기를 슬쩍 밀며 말했다.
“같이…… 먹을래요?”
다연의 질문에 남자는 도톰한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혹시 쌀밥 있나요? 닭볶음탕에 밥이 없으면 아쉬워서.”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술잔을 부딪치는 그와 자신의 손이 보였고, 턱을 괴고 앉아 한참 동안 남자를 바라봤던 것 같기도 하고, 싫다고 고개를 젓는 그에게 2차 가자며 호텔로 이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제의 기억이 띄엄띄엄 떠오르자, 다연은 창문에 자신의 머리를 콩콩 박았다.
“미쳤구나, 미쳤어. 연다연.”
최소한 남자가 꼬셔서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니.
‘라면 먹을래요?’도 아닌 ‘닭볶음탕 먹을래요?’로 그를 꼬신 후, 그를 끌고 호텔까지 가다니!
원래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는 아닌데, 어쩌다가 처음 만난 남자한테 호텔까지 가자고 했을까.
그렇게 남자가 고팠나? 하긴 3년 전 똥차와 헤어지고 난 뒤로 소개팅도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라고 생각할 때, 다시금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서원의 식당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미소와 보석이 박혀 있는 듯한 말간 눈동자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다.
“내가 꼬셨어. 내가.”
***
택시에서 내린 다연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속옷과 잡다한 용품 그리고 해장용 초코 우유를 고른 그녀는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보자 시간은 벌써 7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외박하고 곧장 출근했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 술도 깨지 않은 채로 출근했다고 하루종일 박 팀장의 잔소리에 시달릴지도 모르고.
둘 다 싫었던 다연은 빠른 걸음으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샤워부터 한 후에 초코 우유 한 잔 마셔야지. 일찍 출근 한 척 시치미 떼고 앉아 있어야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꼭대기 층에 머물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한데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속도는 꽤 굼떴다.
조급했던 다연이 시계와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보다가 엘리베이터 옆에 걸려 있는 거울을 발견했다. 택시에서 대충 얼굴을 정리하긴 했는데, 여전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까는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지금 보니 립스틱까지 번져 있었다.
도대체 어젯밤에 뭘 했기에 강력한 워터프루프 립스틱이 사방팔방으로 번져버렸을까.
다연은 물티슈를 꺼내기 위해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열어 안을 헤집었다. 가방에 뭐가 이렇게 많은지 물티슈 하나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겨우 찾은 물티슈를 꺼내 입술을 닦기 위해 거울을 보는 순간, 다연은 놀라고 말았다.
“헙!”
거울 속에 남자가, 그러니까 자신과 어젯밤을 함께했던 그 남자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남자는 다연이 들고 있는 봉투를 보며 말했다.
“역시 해장엔 초코 우유만 한 게 없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남자는 연신 생글생글 웃었다. 도톰한 입술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자,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이 아래로 처졌다.
어젯밤 술 취한 와중에 왜 이 남자에게 꼬리를 쳤는지 단번에 알 것만 같은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 말짱한 상태였고, 또 여긴 회사다. 이 남자가 아무리 훌륭한 비주얼로 제게 미소를 짓는다 한들, 이성이 멀쩡한 이상 어제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톡 쏘아붙이려는 순간, 남자는 다연의 손에 들려 있는 물티슈를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다연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녀의 입술 주변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주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아침에 닦아주려고 했는데.”
이 남자가 지금…….
“어제 키스가 너무 진했지? 네 입술이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놀란 다연이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에 들린 물티슈를 홱 낚아챘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응?”
“스토커예요?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새벽에 그가 자는 걸 보고 먼저 나온 다연이었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여기까지 왔고. 그런데 이렇게 간발의 차이로 그가 여기에 와 있다니!
짧은 시간 내에 그가 여기까지 올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자신이 탄 택시를 쫓아온 거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가방을 뒤져 명함에서 회사 주소를…….
“네가 어제 말해줬잖아. 메뉴개발팀에서 일한다고.”
허! 취해서 별 얘길 다 했구나, 연다연! 미쳤어! 정말 미쳤어!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냉큼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잤다 쳐. 내가 다니는 회사까지 알려줬다 쳐. 그래서 뭐? 난 그쪽 피해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왜 여기까지 쫓아오냐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연은 꾹 참으며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예요?”
다연은 최대한 침착한 척했지만, 이내 해맑게 대답하는 그를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네가 없더라고.”
사실 그의 비주얼은 혹할 정도로 멋있었다.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 그와는 말도 꽤 잘 통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연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어젯밤 술 마시다가 원나잇 한 남자와 다음 날 아침 회사 앞에서 마주치는 끔찍한 상상 말이다.
“어디 갔나 연락하고 싶은데, 네 번호를 모르더라고. 혼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남자는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었다.
당황한 다연은 혹시 듣고 있는 사람은 없나 주위를 살폈다. 그때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보안팀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엘리베이터 바로 옆 화장실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나오며 다연을 향해 눈인사했다.
‘망했다. 망했어.’
다연은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인사한 뒤, 남자의 손을 잡고 건물 뒷마당으로 이끌었다.
남자는 뭐가 좋은지, 다연의 손길에 수줍게 웃으며 순순히 그녀를 따라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연은 그의 손을 홱 놓고는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따지듯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막 하면 어떡해요?”
“무슨 얘기?”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없었다는 둥, 침대에 혼자 있어서 당황했다는 둥!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혹시나 경비 아저씨와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은 건 아닌지, 다연은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얼굴에 예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긴?”
“……?”
“둘이 사귀나 보다, 하겠지.”
“……!”
다연은 당혹을 넘어 황당해 미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