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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들려오던 새 소리에 잠이 깬 검무는 슬며시 뜬 눈으로 옆 자리를 더듬다가 흠칫 놀랐다.
옆에 있어야 할 이령은 없고 달맞이꽃을 심어 놓은 화분만이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는 발가벗은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침소의 문을 열쳤다.
“이령아, 어디 있느냐! 이령아!”
“옷부터 입으세요!”
근처에 있던 이령이 고함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면에 이치와 타래, 노을, 금란이 있었다. 금란은 등을 돌렸지만 세 사내는 검무의 알몸에 익숙해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령은 서둘러 검무를 방 안으로 밀치며 문을 닫고 들어왔다.
“발가벗고 나오시다니요!”
“자네가 없어서 놀랐잖아.”
“놀라지 말라고 화분을 놓았잖아요.”
“화분 때문에 더 놀란 거야. 그건 왜 놓은 게냐.”
“어디 가지 않았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이었어요. 달맞이꽃이었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꽃을 모를 리 없잖아요.”
이령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겉옷을 챙겨 와 검무에게 입혔다.
“금란이 봤잖아요.”
“내가 부주의했어.”
“폐하의 알몸은 저만 봐야 해요. 한 번만 더 알몸을 보였다간…… 본 여인의 눈알을 뽑아 버릴지도 몰라.”
이령이 질투심을 드러내자 검무는 피식 웃었다.
“투기하는 게야?”
“예, 투기하는 거예요.”
“조심하마.”
“……옷을 잘 여미셔요.”
“다시 벗었으면 하는데?”
검무는 이령의 허리에 양 팔을 두르며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새벽인 걸요, 환궁하셔야죠.”
“나는 이제 시작인데…….”
“돌아가서 해요.”
이령은 검무가 입술을 겹치려고 하자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언제까지 밖에서 지내게 할 거예요?”
“데리고 갈 생각이야.”
“황태후마마께서 허락하실지…….”
“내가 어린애냐. 처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도 어마마마께 허락을 받아야 할 만큼 나약한 게야?”
“그런 뜻이 아니오라…….”
“신용을 잃은 듯하니 황궁에서 증명해야겠구나!”
검무는 입술을 겹치는 대신 이령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좋다, 환궁하자. 그런데 이치와 타래는 그렇다고 치는데 노을이 와 있구나?”
“어제…… 저와 함께 있었어요. 항상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챙겨 주었답니다.”
“나보다 노을이가 낫구나.”
“노을이가 그러는데 면상을 치우라고 하셨다지요?”
“속이는 게 빤히 보여서. 한데 무엇을 속이는지 알 수가 있나.”
“용서하셔요. 폐하를 걱정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이령은 이치와 타래의 안색이 어두워 마음이 무거웠다.
“이치와 타래, 노을 모두 폐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벗이 아니옵니까? 황제가 환관과 벗이 될 순 없지만 폐하는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벗의 자리를 내주셨지요. 벗이란 무엇입니까? 이번엔 폐하께서 벗의 뜻을 되새기며 용서해 주세요.”
검무가 기억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는 죽상인 세 사람이 마음에 걸렸던 이령은 애교를 부렸다.
“폐하께서 용서하시면 오늘 밤…… 빨아 드리겠습니다.”
이령은 손을 하복부 아래로 내려 검무의 허벅지 안쪽을 간질였다.
“그렇게 간단히 용서하면…….”
“아니면 지금 빨아 드릴까요?”
“이령…….”
“이 입을 꽉 채워서 쪽쪽 소리가 나게…….”
“그만!”
이령이 내민 혀를 움직거리는 바람에 검무는 얼굴을 붉혔다.
“오늘 밤에도 재우지 않을 게야.”
“용서하시는 거예요.”
“물고 빠는 건 내 차지이니, 자지러질 걱정만 하렴.”
이령의 애교 섞인 유혹에 넘어간 검무는 서둘러 복장을 갖추어 입었다. 환궁 준비를 마친 그가 침소 밖으로 나오자 이치와 타래, 노을이 무릎을 꿇고 대기 중이었다.
검무는 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명령했다.
“이 자리에서 자결하라.”
“용서하신다고 했잖아요!”
이령이 검무의 팔을 잡고 매달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냉기 가득한 표정으로 세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치, 타래, 노을. 세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품에 지니고 다니던 단도를 꺼냈다. 번쩍거리는 칼날을 높이 쳐든 세 사람은 주저하지 않았다.
“폐하!”
“변명도 하지 않느냐!”
검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따지고 들자 이치가 대답했다.
“소인은 폐하를 지키는 게 소임입니다. 충심은 변하지 않으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저 역시 폐하의 충복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결백을 죽음으로 증명하겠습니다.”
타래도 굳은 의지를 밝혔다.
“저도 이하동문입니다! 어딜 가나 구박만 받는 소인을 폐하는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벗이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그만! 너는 자결하는 그 순간에도 말이 많구나.”
“먼저 물으셨잖아요!”
노을이 떼를 쓰듯 우는 바람에 이치와 타래는 두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노을의 어리광을 봐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큭, 큭큭…….”
어이가 없었던 건 검무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검무는 손을 휘저었다.
“죽지 마라! 저렇게 시끄러운 놈이 필요하고 우직한 네놈들도 필요하다. 오랫동안 헤맨 끝에 처를 되찾았는데 벗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폐하앙.”
“저렇게 또…… 쯧쯧. 너는 너무 시끄러워.”
검무는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치와 타래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눈가엔 눈물이 그득했다.
“짐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마음 졸이게 해서 미안하다.”
검무가 사과했다. 황제인 그가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게 된 것이다. 이령은 우정을 자랑하는 네 사내를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금란도 이제야 한시름이 놓이는지 훌쩍거렸다.
이령은 눈물 콧물을 짜내며 감동하는 금란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울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