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2)

***

황궁에서 한나절 거리에 위치한 운광평이라는 성내의 작은 마을, 온정의 초입에 이삿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몇 대나 있었다.

“서두르자, 곧 해가 진다!”

인부들이 하늘을 보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이령과 금란도 가벼운 물건들을 옮겼다. 1년에 이사만 다섯 번, 이삿짐을 싸고 푸는 건 예삿일이 된 탓에 인부 못지않게 손끝이 야무졌다.

“아씨, 수레 하나만 더 풀면 끝납니다. 피곤하실 테니까 서둘러 끝내겠습니다.”

“고맙네, 자네의 배려에 힘이 나는구나.”

이령은 방글 웃으며 침소를 들락거렸다. 검무와 헤어진 지 3년. 이령은 금란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생활하고 있었다.

경계심이 많은 황태후가 이령에게 한 곳에서 두 달 이상 머물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탓이었다. 제 아들이 기억을 되찾을까 봐 겁이 나나 보다.

보통은 아들을 구해 줬으니까 환궁하자고 말해 줄 법도 한데 황태후에겐 티끌만한 자비심이 없었다. 그저 끊어진 인연이 다시 붙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밉상을 떨었다.

“아씨, 이곳은 정리를 마쳤어요.”

부엌살림부터 정리한 금란이 이령을 도왔다.

“이사만 하면 하루가 금방 가는 것 같아.”

“새벽부터 움직여도 그러네요. 많이 피곤하시죠?”

“아니, 이 정도는 괜찮아.”

“곧 끝난다고 하니까 여기 앉아서 쉬세요.”

금란은 마루를 닦았다. 두 달 단위로 사글세를 얻어 이사를 하다 보니 짐은 간소했다. 이제 남은 건 장롱과 같이 무거운 짐뿐이라서 이령은 금란이 시키는 대로 마루에 앉았다.

“목마르세요? 물을 가지고 올까요?”

“나는 괜찮아. 목마르면 마시고 와.”

“전 괜찮아요.”

금란도 이령의 옆에 앉아 인부들이 장롱을 옮기는 걸 지켜봤다.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했지만 이사를 자주 했더니 결국 이렇게 가까운 지역까지 오게 됐다.

황태후의 잔머리가 통하지 않는 게 바로 이런 거다. 나라가 제 아무리 크다고 해도 바다만큼 넓을까? 돌 만큼 돌았더니 갈 곳도 없다.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

짐을 다 풀지도 않았는데 이사 갈 곳을 걱정하는 이령이 안쓰러웠던 금란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수도로 가는 거죠, 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요.”

“황태후께서 가만히 계시겠니?”

“가만히 계시지 않으면 뭐…… 폐하께 다 일러 버리죠, 뭐.”

금란은 여전히 입술을 삐쭉거려 이령의 웃음을 샀다.

“아씨, 짐을 다 풀었습니다.”

인부들이 손을 털며 말했다. 이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대에서 돈 꾸러미를 꺼냈다.

“수고했네, 이건 인부들의 삯이고 이걸로는 집에 가는 길에 목을 축이게.”

이령은 돈 꾸러미를 두 개 만들어 인부들의 장(匠)에게 주었다.

“이렇게 챙겨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수고했네. 다음에도 부탁함세.”

“예, 다음에도 불러 주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부들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집을 나갔다. 대문은 닫은 금란은 허리를 짚으며 마당에 쌓아 놓은 짐들을 둘러봤다.

“나머지를 정리해…….”

팔을 걷어붙이며 기합을 넣을 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쾅, 쾅!

“누구세요?”

깜짝 놀란 금란이 문에 대고 물었다.

“나야, 노을이!”

“노, 노을?”

당황한 금란이 문을 열자 성이 난 노을이 째려봤다.

“아니, 이사를 하시면 어디로 간다고 말씀을 하셔야죠! 어쩜 그렇게 도망치듯이 가세요? 그런다고 제가 못 찾을 줄 아셨어요?”

노을이 쫑알쫑알 떠들며 들어오는 바람에 이령도 당황했다.

“이사한 후에 연락해도 되니까…… 한데 너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제 코가 개 코입니다! 마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단 말이에요! 아무튼 엄청나게 서운해요!”

“폐하께서 찾으면 어쩌려고 온 게야?”

이령은 수시로 자리를 비우는 노을이 걱정됐다.

“제겐 꼴 보기 싫다면서 면상을 아주 멀리 치우라고 하셔서 찾지 않으실 거예요.”

“여전히 그러시니?”

“요즘은 더 해요, 우리 모두에게 다정하셨던 폐하가 사라지셨어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좋아하던 이치까지도 멀리하세요.”

이치까지?

노을이나 타래보다 더 신용했던 이치에게 벽을 치다니 무슨 연유일까? 검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마음이 무거웠던 이령은 한숨을 쉬었다.

“너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니? 네가 기어올라도 웃는 얼굴로 대하셨는데…… 좀 이상하구나.”

“환궁하신 후엔 웃지도 않으시고 화도 자주 내시고 저희를 멀리하세요. 3보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들마저 잊으신 양 20보 떨어져서 걸으라고 하셨어요.”

“잘못한 게 있긴 있어. 이유를 잘 찾아보렴.”

이령은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노을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검무의 성격이 무섭게 변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냥…… 딴 사람이 되셨어요. 우리한테만 날을 세우는 게 아니에요. 황태후마마와는 만날 싸우셔요. 예전의 폐하는 여유도 있으시고 농담도 곧잘 하셨는데 지금은 꿈도 못 꿔요. 아무래도 마마 때문에 변한 게 아닐까 싶어요.”

“내 핑계 대긴…….”

“열한 살에 마마와 혼인하셨잖아요. 스물셋까지 12년이나 부부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반을 같이 했던 반려가 기억에서 잘려 나갔으니까 성격이 변하는 것도 당연하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씨나 부인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하니?”

“입에 붙은 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네 기억에서도 지워 달라고 할 걸 그랬어.”

“마마…….”

“네 말대로 12년이나 살았어. 기억이 잘려 나갔다고 금방 익숙해지겠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러니까 폐하께 괜한 소리 하지 마.”

인상을 험악하게 굳힌 이령은 짐을 챙겨 침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뱁새눈을 뜬 금란이 노을의 팔을 꼬집었다.

“아야, 왜 꼬집어!”

“눈치가 그렇게 없으니까 만날 혼나는 거야.”

“왜 또 시비야!”

“넌 생각이 있니, 없니! 그런 소리를 해 봤자 마음만 뒤숭숭하지. 아씨께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네가 왜 자꾸 속을 긁어 대?”

“나는 마마께서 폐하를 만났으면 좋겠어. 우리 폐하는 마마를 기억해 내실 테니까.”

황태후가 도와줘도 될까 말까인 상황인데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악산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럴까 봐 황태후마마께서 이사를 다니라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건 아씨께서 선택하시는 거야. 그러니까 입 좀 닫아.”

“마마는 우리 폐하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보고 싶지, 보고 싶은데도 참는 거야.”

“폐하나 마마나…… 모두 마음은 냉궁에 있구나.”

노을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황태후마마께서 선견지명이 있었지…… 냉궁마마라고 부르라더니…… 진짜로 냉궁에 갇히고 말았잖아.”

“선견지명은 무슨, 자기 아들을 살렸으면 그 공으로 복권을 시키면 될걸. 새 황후를 뽑아야 한다면서 매일 같이 볶아 대는구먼.”

“내가 좋은 뜻으로 말한 것 같니?”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곧 국혼에 대해 물었다.

“근데 폐하 말이야, 이번에는 받아들이실 것 같지 않아?”

“슬슬…… 조정에서도 황후전을 오래 비우면 안 된다고 하니까.”

“폐하는 여전히 눈치를 못 채신 거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 모두가 황태후마마의 눈치를 보느라 함구하는 것도 있지만 폐하께서 마마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말도 못 붙여.”

노을은 울상을 지었다.

“마마는 왜 자신이 아닌 폐하의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한 걸까?”

“마마가 더 많이 사랑하니까. 폐하의 행복을 바라신 거야.”

금란은 한숨을 쉬었다. 서로 목숨을 내놓으며 구하려고 했지만 구미호는 이령을 외로운 처지로 만들었다. 이령이 기억을 잃었더라면 검무가 어떻게 해서든 사랑의 불씨를 당겼을 테다.

하지만 검무는 이령에 대한 기억 전부를 잃어버렸다. 마치 3년 전처럼 모두가 이령에 대해 함구하며 검무를 속이고 있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발각이 된다고 한들 어떤 여파가 있을까?

“정리는 이쯤 하고 나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출출한 것 같은데 너희는 어떠니?”

침소에서 나온 이령이 걷어붙였던 소매를 밑으로 내리며 물었다. 노을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온 듯 표정에는 화기(火氣)가 없었다.

“뭐 드시고 싶은데요?”

이령이 마음을 푼 것 같아 안심한 금란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방에 만두를 맛있게 만들어 파는 집이 있다는구나.”

“저도 사 주실 거죠?”

노을이 귀염을 떨었다. 이령의 눈치는 보는 모양새에 마음이 약해진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질색이었던 이령은 두 손을 모으며 익살을 떨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사 주셔야죠. 황제 폐하를 최측근에서 보좌하시는 환관이시니 만두 값 정도는 내 주세요.”

주눅이 들어 있던 노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연분홍 잇몸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예, 응당 제가 사지요. 이사를 축하하는 기념으로요.”

“호호호, 역시 어르신이 최고입니다. 만두 먹고 와서 뒷정리를 함께 해요. 호호.”

“예, 아씨. 아씨께서 그러자고 하시는데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호호.”

이령은 노을에게 팔짱을 끼었다. 양물이 없는 고자인 데다 성향이 여성에 가까워 정분이 날 일이 없는 노을은 그녀에겐 금란처럼 벗이었다.

“어르신, 운동을 좀 하셔야겠어요. 팔이 왜 이렇게 가늘어요?”

“팔다리가 가는 게 유행이에요.”

“이상한 유행이네요.”

“아씨는 황궁의 유행을 모르잖아요. 흥!”

“호호호.”

이령이 노을과 말장난을 치며 집을 나서자 금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령을 웃게 하는 건 노을뿐이다.

이사를 자주 해야 하는 바람에 신경이 예민했던 이령은 최근 며칠 동안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 우울감의 원인은 검무에 대한 그리움이었지만 그녀는 제 입으로 먼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짠하고 가엾어서 가슴이 아프다.

사랑, 그게 뭔지…….

황궁을 나온 검무는 정처 없이 말을 몰았다. 말이 알아서 길을 찾길 바라듯 고삐를 쥔 손이 살짝 풀려 있었다.

어딜 가든 눈에 들어오는 건 감흥 없이 죽 늘어선 사물이 전부였다. 그는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린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정면에 운광평이라는 현판이 걸린 성이 나왔다.

“폐하, 이곳은 운광평이옵니다.”

이치가 조심히 아뢨다.

“짐도 안다.”

“……예. 소인은 그저 운광평은 해가 지면 성문이 닫히기 때문에 들어가면 날이 밝을 때까지는 나올 수 없다는 걸…….”

“그것도 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설명하지 마라.”

검무는 입매를 비틀었다.

“성주에게 겁쟁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만 짐은 마음에 든다. 온 김에 들러야겠다.”

운광평의 성주는 겁이 많은 성품이라 해가 지면 성문을 굳게 닫았다. 4년 전 도둑떼의 습격을 받은 후 경계심이 극에 달해 지금 들어가려면 성주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운광평의 성주에게 연통을 넣을까요?”

“아니, 암행을 나온 만큼 조용히 지내다가 새벽에 환궁하자.”

“황태후마마께서 걱정하실 텐데요.”

“다섯 살 먹은 어린애냐, 그런 것까지 눈치를 봐야 하다니…… 불쾌하구나.”

검무는 이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정말이지…… 성에 안 차.”

“송구합니다.”

“송구할 만한 소리를 왜 자꾸 하는지…… 쯧.”

이치에게 불만이 많은 양 입매를 비틀고 있던 검무가 운광평의 성문을 지났다.

이치의 어깨를 다독이던 타래가 뒤를 돌았다. 마차 한 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황태후가 말한 그 마차인 듯했다.

운광평까지 쫓아온 걸 보면 오늘은 반드시 검무와의 인연을 만들어 볼 계획인 듯했다.

“타래, 신경 쓰이느냐.”

검무가 물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등 뒤를 쫓는 자들이 몇인지 파악한 듯한 목소리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짐을 해할 놈들이었다면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도중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거리를 지키며 쫓아오는 걸 보면 뻔하지. 어마마마께서 보낸 자들일 더.”

타래는 고개를 숙였다. 3년 전에는 타래나 이치에게 모든 걸 맡기는 편이었지만 최근엔 모두를 경계하며 자신이 스스로 나섰다.

“틀리냐.”

“맞습니다.”

“이치와 넌 알고 있었겠지. 어마마마께 어떠한 언질을 받았을 터다. 한데도 짐에겐 일언방구가 없구나.”

“그것은…….”

“어마마마의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분명히 짐의 편이었던 너희가…… 감시자가 된 게냐. 벗이라고 생각한 건 짐의 착각이었던 겐가.”

검무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치나 타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짐을 걱정한다면 비밀이 없어야 할 텐데…… 어째서 기분은…… 너희에게 속은 것처럼 분하고 속상한 걸까? 왜 너희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숨구멍을 조이는 침묵이 흘렀다. 이치와 타래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검무를 걱정하는 마음은 황태후 못지않았다.

충심 또한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강직했다. 하지만 비밀에 대해선 털어놓을 수 없었다. 검무가 이해하겠나? 기억이 잘려 나갔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나?

진실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검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차라리 미움을 받는 쪽이 나을 것 같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할 때였다.

“너희도 짐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구나. 어리석은 것들.”

검무는 운광평의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말에서 내렸다.

“짐은 혼자 움직일 테니까 너희는 저 마차를 해결하고 와.”

“폐, 폐하…….”

“황명이니 거역하지 마라. 지금의 기분으론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면 모조리 벨 것 같으니까.”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치와 타래도 말에서 내렸다. 그들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검무가 따로 선발한 호위부였다. 예전엔 이치와 타래가 전담했던 호위를 다른 자에게 내어 준 탓에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우릴 배신자로 여기신다.”

이치가 괴로워하자 타래가 어깨를 두드렸다.

“마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주셨던 믿음도 거두어 가신 모양이다.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을 수밖에.”

“비밀에 대한 분노잖아. 기억을 못 해도…… 우리가 개화궁 때 폐하를 속인 걸 감각은 잊지 못한 모양이다.”

“폐하를 위한 선택이었으니 감내하자. 이치, 흔들리지 마라.”

타래는 실연당한 듯 우울해 하는 이치를 달랜 후 운광평의 성 안으로 들어온 마차를 응시했다.

“지금은 저 마차를 되돌려 보내는 것부터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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