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2)

***

지금쯤이면 갔으려나…….

어가가 떠난 후에 들어가려고 하다 보니까 어느새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금란 없이 다닌 건 처음이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생각이 복잡한 탓에 넋을 놓고 다닌 탓이었을 거다.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겁나지 않았다.

개화궁에서 죽나 산에서 죽나 장소가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어차피 당사자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던가.

허탈한 마음을 쓸어내리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그때였다.

“끼에에에, 끼에에엥!”

산 중턱 어딘가에서 고통에 전 비명이 들렸다. 앞만 보고 걷다가 길을 잃어버려 산속까지 들어온 이령은 몸을 돌리려다 소리를 쫓기 시작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동물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에 심장이 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어디야, 어디…….”

비명을 쫓아 이리저리 뛰던 이령의 눈에 새끼 여우가 들어왔다. 새끼 여우는 앞발이 덫에 끼어 있었다.

“끼에에에, 끼에에에…….”

이령을 발견한 새끼 여우가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다.

“내가 구해 주마!”

이령은 서둘러 새끼 여우에게 뛰어갔다. 쇠로 만든 덫은 새끼 여우의 다리에서 흐른 피와 오래된 피 얼룩으로 인해 무시무시했다.

“이를 어째…….”

덫은 생전 처음 보는 통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덫을 이리저리 보다가 새끼 여우가 숨을 꼴깍거리며 고통스러워해 덫을 억지로 벌리기 시작했다.

“아파도 참아라, 이걸 벌려야겠어.”

이령은 발이 낀 사이에 손을 넣었다. 날카로운 톱니가 손가락을 찔러 피가 났다. 탕약의 효과 덕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용감해진다. 살이 찢어진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덫은 여자 힘만으로는 벌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손에 힘을 줬다. 마지막 기력을 짜내며 덫을 벌리자 새끼 여우가 발을 뺐다.

컹!

덫을 벌렸던 손을 놓자 살벌한 소리가 귀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는 새끼 여우가 다친 발의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하자 치마를 찢었다.

“다리가 부러졌을 거야, 이걸로 묶는다고 부러진 뼈가 잘 붙을지 모르겠지만 지혈은 할 수 있을 게다.”

이령은 새끼 여우의 발을 조심스레 잡았다. 도망칠 법도 한데 새끼 여우는 자신을 구해 준 이령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령은 넓게 찢은 치마로 다친 발을 꽁꽁 싸매 주었다. 제 손도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녀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끼이…….”

새끼 여우가 이령의 손을 핥으려고 했다. 이령이 피를 흘리는 게 미안하고 제 목숨을 구해 준 게 고마워 어떡하든 해 주고 싶었나 보다.

“내 몸엔 독이 흐르니까 핥아선 안 돼.”

이령이 손을 뒤로 빼며 미안해했다. 새끼 여우가 상처 받거나 놀라지 않도록 차분하게 대답한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좇았다.

여우 여러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힘으론 어쩌지 못해 어딘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던 이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만 네 가족한테 가 봐.”

“끼…….”

“가 봐.”

이령은 빙그레 웃으며 뒷걸음을 걸었다. 산을 헤맬 땐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그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자연스럽게 생긴 길만 보고 걸었다.

누군가 등을 밀어 주듯 속도감이 붙은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이었다.

산을 내려온 그녀는 노을이 진 하늘을 바라보며 개화궁으로 향했다. 환궁하는 어가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무 뒤에 숨어 검무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가슴이 찌르르 저렸다. 심장이 으깨지는 듯한 통증에 그만 신음이 흘렀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마지막 모습을 눈과 마음에 또렷하게 새겼다.

검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시선을 아래로 내렸어도 황제의 근엄함이 빛났다. 하지만 옆얼굴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어 몹시 어두웠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지금은 괴로워도 폐하의 마음에 새 사람이 들어갈 테니까 그 시간만 견디세요.

지금까지 잘 참고 있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령은 희미하게 웃으며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그리고 제 앞을 완전히 지나친 검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검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이령은 한동안 허리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제가 서 있던 자리가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또 하고 또 하며 사랑하는 지아비를 떠나보냈다.

얼마나 됐을까, 허리를 들자 어가의 행렬이 시야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눈물도 말라 버렸다. 그녀는 끓어오르던 감정을 삼키며 개화궁에 들어왔다.

한동안 북적거렸던 곳이 텅 비어 조용했다. 익숙한 풍경인데도 낯설었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젠 내 차례야.”

이령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검무가 사용했던 궁실에 들어섰다. 그곳엔 금란이 있었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그녀는 이령의 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마마, 손이 왜 그래요?”

피범벅인 손을 발견한 금란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왔다.

“이걸 어째…… 태의도 가고 없는데…….”

“신경 쓰지 마. 곧 멈출 테니까.”

“마마!”

“폐하도 가고…… 나도 가면 뒷정리를 너 혼자 해야 할 텐데 괜찮겠니? 내가 죽으면 이치가 알아서 해 주겠다만…… 네가 받을 충격이 걱정이구나.”

“제 걱정하지 마시고 손을 주세요. 상처를 봐야겠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다 뜯겼네…….”

“새끼 여우가 덫에 걸려 있더구나. 그래서 구해 주다가 생긴 상처야. 기운을 너무 많이 썼나…… 피곤하네.”

“새끼 여우를 구해요?”

“응……. 어찌나 가엾던지. 그 아이만큼은 꼭 구해 주고 싶었어.”

이령은 너덜너덜하긴 해도 새끼 여우를 구한 손이라서 뿌듯했다. 하지만 금란은 그녀가 느끼는 성취감을 동감할 수 없었다. 코를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마마…….”

“울지 말라고 한들 울음을 그칠 네가 아니니 신경을 끄련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곳 정리를 마치렴.”

이령은 주변을 휘둘러보다가 돌아섰다. 그는 떠났으나 체취는 남아 있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검무의 잔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서둘러 궁실을 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달맞이꽃을 보며 쉬고 싶었다.

후원은 온통 붉었다. 여름의 저녁은 길다. 석양을 머금은 하늘이 검은 옷을 갈아입는데 걸리는 시간이 느린 만큼 붉은 기운을 흡수한 달맞이꽃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주황빛을 머금은 달맞이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피곤함이 몰려들어 눈이 감겼다. 억지로 눈을 뜨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손가락을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후우…….”

숨이 거칠다. 심장이 욱신거리나 싶더니 이명이 들렸다. 태의가 말한 그 순간이 온 모양이다.

“하아…….”

이령은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격렬해지는 숨소리처럼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소낙비처럼 쉬지도 않고 떨어져 얼굴과 목을 적셨다.

“정말…… 내 차례인가…… 봐.”

이렇게 가는구나.

이령은 이마를 짚었다. 두렵다. 희끄무레하고 뿌옇던 시야가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귀울림은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크게 울렸지만 감각은 둔해져 자신이 서 있는 건지 쓰러진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령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해 금란을 불렀다. 시간이 좀 더 남았다고 생각했던 탓에 유언을 남기지 못 했다.

유언이라고 해 봤자 금란에게 줄 재물에 대한 것이었지만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자신을 돌봐줘서 고맙다는 말.

이령은 금란을 불렀다.

“금란아…… 금란아…….”

힘겨운 걸음을 어렵게 떼며 둔하긴 해도 오감의 감각으로 걸음을 뗀 이령은 금란을 애타게 찾았다.

“금란아, 금란아…….”

“예, 마마. 지금 가요!”

검무가 사용했던 궁실의 뒷정리를 마친 금란이 후원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뒷정리를 마쳤으니까 이제 마마를 씻겨 드릴 수 있어요. 손도 좀 보…….”

“이대론 죽어도 못 간다!”

금란의 말허리를 자르듯 검무의 성난 목소리가 후두부를 강하게 때렸다.

“폐하, 고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옵니다.”

이치가 검무를 말리며 뒤를 쫓았다. 환궁하는 게 아니었나? 당황한 금란은 검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 폐하?”

“그이는 어디 있느냐!”

검무가 고함쳤다.

“그, 그게 후원…….”

“어, 그래. 저기 있구나!”

검무는 금란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령을 발견했다. 안광을 번쩍거린 그가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그녀를 향해 씩씩대며 걸어갔다.

“내가 이대론 억울하고 분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 잘못은 내게만 있었나!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마음을 풀 줄도 알아야지. 꼭 그렇게 야박하게 굴어야…….”

숨을 매우 가쁘게 쉬며 이령에게 다가가던 검무가 입을 다물었다. 허공을 찌르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녀가 코피를 쏟은 탓이었다.

검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령아…….”

“그, 금란아…… 거기 있니? 아무래도 한계인 듯해. 앞이 보이지 않아…… 금, 금란아…… 어디 있니? 내게 시간이 없어…… 곧 죽을 건가 봐.”

“주, 죽다니…… 이 피는 왜 이렇게 많이 쏟는 게냐. 왜 이렇게!”

검무의 소매로 이령의 코를 막았지만 출혈이 상당했다. 탁한 색을 띠는 검붉은 선혈이 옷깃을 적셨다. 피비린내도 역했다.

마치 부패한 시체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부패한 시체를 본 적은 없었지만 도저히 산 사람의 몸에서 날 냄새가 아니었다. 겁에 질린 검무는 금란에게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일이야!”

“마마!”

“금란 네 이년, 울지만 말고 똑바로 말해!”

금란에게 대답을 재촉했지만 통곡만이 돌아왔다. 그는 이령의 얼굴을 감싸며 울먹거렸다.

“이령아, 네가 대답해 봐라. 왜 이러는 게야! 왜!”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검무가 다그쳐 물었지만 이령에겐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피 비린내가 진하게 풍길 정도로 피를 쏟아 내던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그때야 그녀가 매우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차린 검무가 팔을 뻗었다.

“이령아!”

6장. 구미호의 조건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기절을 시켜서라도 황궁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악몽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꿈을 괜히 꾼 게 아닐 터다.

더욱이 꿈에서 이령을 데리고 가려던 놈은 바로 구미호였다.

이령이 노려지는 게 아닐까, 라는 불안감과 나쁜 예감 때문에 돌아와 봤더니 사달이 났다. 이령이 피 범벅이다. 손은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됐으며 눈은 또 왜 안 보인다는 겐가?

검무는 의자에 앉아 이령과 태의를 노려봤다. 상체를 숙인 그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대자 태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떤가?”

검무의 음성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많, 많이 안 좋으십니다.”

“어젠 탕약을 마시면 기력을 찾을 거라고 했었다. 자네의 말대로 기력을 찾았지. 한데 왜 또 저렇게 쓰러진 게야?”

“기력이 쇠한 탓에 보양을 해도…….”

“아니,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검무는 이령에게서 시선을 떼 태의를 노려봤다. 태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죄를 지은 자들은 입술에 침을 자주 바르는 습관이 있다.

그건 비밀이 많은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무는 태의가 자신에게 감추는 게 있다는 걸 직감한 만큼 시간을 끌지 않았다.

“사실대로 고하라.”

검무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태의가 허리를 숙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네 가족들은 살려 주마.”

“폐, 폐하…….”

“지체할수록 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 그따위 잔재주로 밥벌이도 못 하고 싶다면 뜸을 들여 봐.”

“사, 살려 주십시오!”

“짐에게 숨기는 게 무어냐.”

“그, 그것이…….”

“손모가지를 썰어 버리기 전에 말해!”

검무가 크게 분노할 때야 태의가 무릎을 꿇고 앉아 벌벌 떨었다.

“구, 구미호의 독 때문이옵니다! 마마께 독을 옮겼사옵니다. 하여…… 마마께서…….”

“네 이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구미호의 독을 옮겨? 짐이 물었을 땐 황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화, 황태후마마께서 시키신 일이옵니다. 소신이 무슨 힘이 있어서 황태후마마의 명을 거스르겠습니까. 소신은 그저…….”

“이를 누가 또 알고 있느냐, 누가 또 알아!”

“개, 개화궁에 있던 모든 자…… 폐하를 뺀 모, 모두가…… 알고 있사옵니다.”

모두가 알아?

태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검무는 뒤를 돌아봤다.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화마처럼 붉게 타올랐다. 배신감은 복부를 가격한 충격보다 더한 통증을 안겼다. 그는 이치를 노려봤다.

“이치…….”

“폐하를 살리는 방법은 그뿐이었습니다.”

“감히 짐을 속여? 너희 모두가 짐을 바보로 만들어!”

“폐하를 속인 죄의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 폐하를 구하려면 방법이 없었습니다. 황태후마마의 함구령과 마마의 부탁이 계셨기에…….”

“사실대로 말했어야지!”

검무는 이치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목을 부러트려 죽일 기세로 흥분하자 이치가 현실을 깨우쳐 주듯이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면 저기 누워 계신 건 마마가 아닌 폐하셨겠지요. 소인들은 국상을 준비해야 했을 테고 황태후마마께서는 아드님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신 황제를 정하셔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계셨을 겁니다.”

“네 이놈…….”

“폐하께서 황제만 아니었다면 모두가 함구하진 않았을 겁니다. 황제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배신감이라는 몹쓸 감정으로 짓밟지 말아 주십시오.”

“황후도 짐이 황제였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거라는 게냐!”

“그건 소인도 모릅니다. 하나…… 마마께서 폐하를 염려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셨을까요? 폐하의 환궁을 서두르라 부탁하며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이치의 대답에 참고 있던 눈물이 뺨을 적셨다. 검무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쁜 것들…… 왜 하나같이 복권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지 이상했지…… 이상하다고만 여긴 게 아둔했다. 오래 살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꺼내지 않은 게야. 너희 모두…… 짐이 모르는 사이 이별을 준비했구나.”

다리의 힘이 풀린 검무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는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리며 원통해했다.

“이만 환궁하시지요.”

“이치, 네 이놈! 이 상황에서 환궁을 하라는 소리가 나오느냐!”

“마마는 오늘 혹은 내일…… 중으로 돌아가십니다.”

이치는 냉정했다. 모두가 감정적일 때 누군가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게 바로 자신이었고 흐트러진 검무를 바로잡으려면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마마께서는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폐하께 보이고 싶지 않아하셨습니다.”

“태의가 말해 보아라. 이령이 언제 죽어!”

검무의 안색이 표독하게 변했다. 태의의 대답에 따라 피바다가 예상될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소, 소신의 소견으로는…… 새벽 즈음…… 졸(卒)하실 것 같사옵니다.”

“그런 말을 왜 지금 해!”

검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치에게 달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의 동작은 빛처럼 빠르고 힘이 넘쳤다. 이 자리에서 태의를 베어 죽일 생각인 듯했다.

“폐하!”

이치가 검무의 팔을 잡았다. 태의는 겁에 질려 자지러졌고 검무는 이치에게 잡힌 팔을 바동거리며 분노를 터트렸다.

“언질이라도 주었어야지. 황후의 상태에 대해 수시로 묻고 의심할 때마다 저놈이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그 말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너희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어땠느냐, 죽어 가는 사람에게 독약을 내리겠다며 악을 써 마음에 상흔을 입혔어!”

검무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눈언저리가 욱신거렸다.

나쁜 것…….

그래서 그렇게 몰아붙인 게냐? 함께 돌아가자고 했을 때 꺼지라는 소리를 해 대며 진저리를 친 게야?

검무는 쥐고 있던 검을 떨어트렸다. 슬픔이 끓어오르는 것만큼 눈물이 흘렀다.

“따, 따뜻한 말 한 마디 못 해 주었거늘…… 어찌…… 하면 좋으냐…… 나 때문에 죽는데…… 어찌…… 하면 좋아…….”

검무는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듯이 내디뎌 이령에게 다가갔다.

“이령아, 이령아…… 내가 잘못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들리면 눈을 떠…… 나를 봐 다오…… 진심이 아니었다. 너는 끝까지 내 복장만 터트리는구나. 부디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이 네 진심인 걸 조롱으로 여겼다. 네 어찌…… 사람을 이렇게 못난 머저리로 만드느냐.”

붕대를 감아 놓은 손을 잡은 검무는 이령의 얼굴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서 본 그 모습이었다. 구미호에게 안겨 있던…….

“구미호…….”

문득 꿈속에서 구미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비겁한 놈, 죽어야 할 목숨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나. 내겐 이깟 계집을 던져 주다니…… 죄를 지은 놈은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천지분간을 못 하는데…….”

구미호가 원하는 건 내 목숨…….

지금이라도 구미호를 찾아간다면 이령을 살릴 수 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검무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희망의 빛이었다.

“결자해지라고 했지, 황제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매듭만큼은 확실히 해야 할 터.”

검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죽일 순 없었다. 저 때문에 이령이 죽는데 살아서 행복할 수 있겠나.

잘 먹고 잘 살아?

그렇게는 못 한다.

“이치, 당장 말을 준비하라.”

“어가를 타시지요.”

“어가는 느려! 따지지 말고 말을 준비해. 지금 당장.”

검무는 쌀쌀맞게 명령한 후 이령을 안았다.

“구미호에게 간다.”

“폐하!”

“짐의 앞을 그 누구도 막지 마라! 모두 참할 것이다!”

검무의 포효에 살기가 등등했다. 그는 제 앞을 막으려는 이치를 재빠르게 지나쳤다. 궁실을 나오자 모두가 엎어져 흐느끼고 있었다. 성난 그는 금란과 노을, 타래를 쏘아보며 다그쳤다.

“왜 울고 자빠진 게야,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송장 취급하지 마라!”

살린다, 내가 반드시 살려!

뒤를 쫒는 환관과 병사들을 가볍게 따돌릴 만큼 빠르게 말을 몬 검무는 사냥터로 향했다. 개화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냥터가 위치해 있어 밤길이어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청색을 띠는 밤하늘에 쨍하게 빛나는 달빛과 밤보다 더 새카만 산을 뒤덮은 어둠이 음산하였으나 겁나지 않았다.

그는 음기가 가득해 밤공기가 차가운 산을 바라보다가 어귀에 세워 놓은 표지석(標識石: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그 앞에 세워 놓은 돌) 앞에서 내렸다. 그는 이령을 가뿐하게 들어 안은 채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한여름인데도 서리가 내리는 계절처럼 숨을 내쉴 때마다 김이 서렸다. 그는 이령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끌어안았다.

또 그녀에게 나쁜 기운이 스미는 것 같아 입고 있던 장옷을 덮어 몸을 꽁꽁 싸맸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반드시 살릴 테니까 견뎌야 한다.”

검무는 이령의 뺨에 입을 맞추며 구미호와 마주친 자리를 찾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했으나 이상하리만치 길을 잘 찾는 게 신기하다.

“구미호는 내 목숨을 원해, 그러니 반드시 나타날 게다.”

어금니를 깨문 검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심호흡을 했다. 들숨을 단전까지 들이마셨더니 목이 시렸지만 그는 용기를 그러모으듯이 가슴을 활짝 열었다.

“구미호님, 구미호님!”

검무가 구미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산이 낯선 자의 침입으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위에서 휴식을 취했던 새들이 날갯짓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어디선가 들개가 짖는 소리가 났다. 늑대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던 산이 요동을 쳐 나무와 풀이 흔들거렸다. 산짐승들이 포효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곧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여우의 눈이 반딧불처럼 켜져 검무를 에워쌌다. 초록빛과 은빛이 뒤엉킨 시선은 화살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맨 몸으로 수천 발을 화살을 맞는 기분이었다.

“구미호님, 계신 거 압니다!”

“천지분간을 못 하는 아둔한 놈인 줄 알았더니…… 예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놀랍구나.”

구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을 길게 늘어트린 그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대여섯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는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 판별이 쉽지 않은 외모였다.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왔는데 왜 놀라요?”

아이가 구미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확신하면서도 불안했거든.”

“형님의 예감도 틀릴 때가 있어요?”

“신령이라고 해서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예측할 순 없다.”

구미호는 자신이 산의 주인이자 신령임을 소개하듯 말한 후 검무와 이령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밉살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계집은 곧 죽는다.”

“살려 주십시오.”

“내가 왜.”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제 심장을 드십시오!”

검무가 이령을 내려놓은 후 무릎을 꿇고 앉았다. 꿈에서 말한 것처럼 손바닥의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빌어볼 생각이었다. 그는 빠르게 손을 비비며 매우 간절히 읍소했다.

“제가 받아야 할 벌을 제 처가 받았습니다. 제 처가 저를 살리기 위해 죽어 가는 걸 새카맣게 모른 채 투정을 부렸습니다. 이대로 죽게 할 순 없으니 제 심장을 꺼내 드시…….”

“네 심장을 먹으면 내게 좋은 일이 생기느냐?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형님께 부정 타는 소리하지 마!”

아이가 들어도 어이가 없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처음부터 노린 것은 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저를 벌하십시오! 다시 구미호의 독을 내리시고 제 처를 살려 주십시오!”

“나는 살생하지 않아.”

구미호는 자신을 악귀 취급하며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검무의 앞에 바싹 다가갔다.

“너는 이미 처를 잃는 것으로 죗값을 치렀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라.”

“제 처는 구미호님께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벌을 하시려면…….”

“살생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터.”

“신령이라고 하셨지요? 이 나라의 황제인 제가 감히 부탁드립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제겐 하나뿐인 지어미입니다. 제겐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 살려 주신다면 구미호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검무가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황제로서의 체면을 가볍게 벗어 버린 그가 거친 숨을 토하다 이내 울먹거렸다.

“잘못했습니다. 구미호님인 줄 몰랐습니다. 그날…… 마음이 복잡하여 활시위를 잘못 당겼습니다. 저는 아둔한 황제입니다, 모자란 사내입니다.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천치입니다. 그러니…… 제 처를 살려 주십시오.”

검무가 오열하기 시작하자 구미호의 시선이 이령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생명의 불씨가 희미한 게 얼마 남지 않아 위태로웠다.

“네 처를 잃고 싶지 않은 게 죄책감 때문인가?”

“죄책감은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습니다.”

“뻔뻔한 놈이로구나.”

“황제로서 어떠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이유 모를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연일 새로운 죄책감과 싸우며 마음은 차가워지고 동정심 또한 무뎌지기 때문에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이령인 제 조강지처입니다!”

“조강지처에게 독약을 내렸다지? 그때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느냐?”

구미호의 조롱에 코끝이 찡해진 검무는 울먹거렸다.

“자존심을 세웠습니다. 제가 황제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머리를 처박고 있느냐, 황제가 아닌 게냐.”

“이령의 지아비로 왔습니다. 이령을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소중하냐.”

“제 심장보다 더 소중합니다.”

“심장을 빼앗는 건 신령이 할 짓이 아니다. 소문처럼 인간의 심장을 먹어야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드릴까요? 심장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드려야 처를 살려 주시겠습니까?”

검무가 구미호의 발목을 잡고 매달려 애원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 처를 살려 주십시오!”

“네 처가 그렇게 소중하냐.”

“소중합니다, 제 전부입니다!”

“네 전부를 잃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알맹이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니 살아서 움직이는 송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산송장…….”

구미가 당기는지 구미호는 실실 웃었다. 검무는 그의 표정을 주시했다. 제게 불행이 닥치길 바라는 걸 보니 살려 놓고 평생 동안 떠안아야 할 고통을 주려나 보다.

좋다, 달게 받아들인다.

이령만 살릴 수 있다면 몸에 불을 붙이라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비장미가 흐르는 표정으로 구미호를 바라보자 다시 한번 비웃음이 터졌다.

구미호가 검무의 각오를 읽은 것 같았다. 눈동자를 뱅그르르 굴리며 교활한 표정을 짓던 구미호가 결단을 내렸다.

“좋다, 네 처를 살려 주마.”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평생 동안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 대가는 네 처에게서 받을 것이다.”

“안 됩니다. 모든 대가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게서 받으십시오!”

“흥미 없다.”

“구미호님!”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여흥을 위한 기대이니.”

여흥을 위한 기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검무가 미간을 찌푸리자 아이가 방글방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형님이 심심하시대.”

“심심?”

“웅! 그래서 지켜보고 싶다고.”

“쓸데없는 소리.”

“화나셨어요, 형님?”

“쉿.”

구미호는 아이에게 입단속을 시키고는 검무를 응시했다. 여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검무의 안색이 흙빛이었다. 구미호는 버릇처럼 코웃음을 친 후 말문을 뗐다.

“네 처의 마음씀씀이에 따라 달라질 터.”

“무슨…….”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구미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꽤 짓궂은 표정으로 이령의 이마를 손톱이 긴 손으로 감쌌다. 곧 환한 빛이 손끝을 밝혔다.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도나 싶은 것도 잠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무는 숨을 죽인 채 구미호와 이령을 번갈아 봤다.

“천 년을 넘게 살았지. 길고 긴 시간,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낀 게 무엇인지 아느냐?”

구미호는 검무에게 물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던 검무는 고개를 저었다.

“영원한 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변했지. 인간의 마음이란 지금 당장에 들불같이 끓어올라도 어떤 시기를 넘기게 되면 쉽게 꺼지더구나. 서로 원망하거나 곤혹에 빠트리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너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 처를 사랑하는 마음, 죽어서도 이어 갈 겁니다!”

“그런 처에게 여러 번 죽으라고 했지.”

“그것을 어찌…….”

검무가 소름 끼쳐 하자 어린아이가 끼어들었다.

“우리 형님은 모르시는 게 없어!”

“……맞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소중한 자에게 죽으라고 말한 넌 이미 살인자다.”

눈물이 흐른다. 이령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말했잖아요, 이령인 이미 죽었다고. 폐하가 죽으라고 한 날, 이미 송장을 친 거라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구나.”

“다시는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건 세월이 흘러 봐야 알겠지. 말뿐인 약속인지…….”

구미호가 이령의 이마에서 손을 떼는 순간 신음이 들렸다. 그녀가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이령아!”

검무가 이령을 일으켜 앉혔다. 그러자 어린아이도 그녀의 옆에 달라붙어 눈을 말똥거렸다.

“정신이 드느냐?”

“여기가 어디…… 폐하가 왜…….”

이령은 사방을 에워싼 여우와 검무를 둘러보다가 구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자는 국수집에서 노려보던 사내?

이령의 시선은 제 옆에 달라붙은 아이에게 옮겨졌다. 아이 역시 국수집에서 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볼 때 검무가 그녀를 와락 안았다.

“이젠 살았어, 이젠 괜찮아!”

“폐하…….”

“네가 날 대신해서…… 죽어 가고 있었던 걸 알아. 네 어찌 그런 선택을 했느냐!”

“그것보다 이게 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 계세요? 왜 이 산속에…….”

혼절한 건 개화궁의 후원이었다. 검무는 환궁하는 길이었고 그녀는 금란을 부르며 쓰러진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검무만큼 기뻐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어리둥절해하는 이령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구미호가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끌었다. 그때야 검무도 구미호를 응시했다. 구미호가 말한 대가를 받으려나 보다.

“자, 이제 네 소원대로 처를 살려 주었다. 하니 그 대가를 받아야겠다.”

“구미호님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이령을 끌어안은 검무가 물었다. 이령은 구미호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보니 머리카락 색이며 생김새가 여우를 닮긴 했다.

“구……미호요?”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지금은 널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걸 내려놓겠다고 말한 지아비에게 감사하라.”

구미호는 싱긋 웃으며 이령의 시선을 끌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을 쉬는 게 편하며 건강한 시력을 되찾은 걸로 보아 검무의 말대로 되살아나긴 했나 보다.

하지만 검무처럼 안도하거나 기뻐할 수 없었던 건 구미호가 풍기는 야릇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목숨과 교환할 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숨을 꺼트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대, 대가라니요? 무슨 조건을 내건 거예요?”

이령이 검무에게 물었다. 자신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아닌지 걱정됐다.

“이젠 네게 달렸다. 네 지아비를 살리고 싶으면 목숨을 뺀 것을 내놓되 목숨만큼 소중한 걸 버려야 한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

“네 소원으로 인해 지아비가 몸 상하는 일은 없으나 아주 큰 것을 잃어야 하지. 즉 그 말은 도려내도 상하지 않는 대가여야 한다.”

구미호는 수수께끼를 냈다. 이령은 검무와 구미호를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검무.

답은 바로 검무였다. 몸이 상하지 않은 한에서 도려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과 기억뿐이었다.

“거, 거절한다면…… 어찌 됩니까? 이대로 죽겠다면…….”

“네 지아비는 산송장으로 살 테지.”

이령은 갈등했다.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 하자 신경질이 난 구미호가 쏘아붙였다.

“네 지아비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줄까?”

“기억이 대가인지요?”

이령의 물음에 구미호는 씩 웃었다. 검무는 주먹을 쥐었다. 이령에게서 제 기억을 지우길 원하는 게 구미호의 바람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자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한 이령과 헤어지지 않는다. 그녀를 데리고 환궁해 지금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래, 기억을 베어야 한다.”

구미호의 대답에 이령은 두 눈을 감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눈앞이 컴컴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슬픔에 잠긴 이령의 손을 검무가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으며 듬직했다.

“나…… 나는 괜찮다……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괜찮아. 내가 기억할 것이다.”

이령은 검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당부했잖아요, 부디 행복하시라고요.”

이령은 푸근한 미소를 보내며 검무의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폐하, 여기…… 많이 아팠죠?”

이령은 자신이 낸 흉터를 어루만지며 울먹거렸다.

“그때……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잘못했어요.”

“아니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잖아. 잘못한 건 나다. 나밖에 몰랐던 네게 모질게 군 건 나였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 했어요. 폐하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만 했어요. 미안해요.”

“아니야,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던 게야. 다시는 널 불안하게 하지 않을 테다. 내 일생의 여인은 너 하나야. 다른 사람은 이 마음에 들이지 않아!”

검무는 이령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이마를 맞댔다. 극한의 상황까지 와서야 진심을 털어놓은 두 사람은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구미호와 아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해할 생각이 없는 듯 기다리는 게 진짜 이별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눈물을 닦으며 감정을 추스른 건 이령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검무의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지금을 오랫동안 기억하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며 마음을 굳혔다.

처음부터 짊어질 슬픔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확인한 사랑이나 그녀에겐 크나큰 선물이었다. 그 선물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었다.

“구미호님, 폐하의 기억과 마음에서 저를 지워 주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구미호님이 원하는 건 이별이에요. 제가 기억을 잃는 건 무의미해요. 그러니까…….”

“이령아, 그러지 마라! 내가 널 다시 찾을 게야. 그러니까 지우는 건 내가 되어선 안 돼!”

검무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한껏 키웠다.

“안 됩니다! 이령의 기억을 지워 주십시오. 제 처의 기억이 지워져야 합니다.”

“폐하가 괴로워하는 건 싫어요.”

“안 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구미호에게서 이령을 지키듯 등 뒤로 숨기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구미호는 이령의 결정대로 행할 모양이다. 검무가 펄쩍 뛰는 게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네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대가를 받겠다.”

“구미호님!”

“네 처의 지혜에 감사하라.”

구미호는 사악한 표정과 함께 검무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짚었다.

“안…….”

구미호의 손이 머리에 닿는 그 순간 검무가 뒤로 넘어갔다.

“폐하!”

이령은 검무를 껴안았다. 축 늘어진 그는 제법 무거웠다.

“폐하…….”

이령은 검무의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트렸다. 굵은 빗방울처럼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검무의 얼굴을 적실 때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렸다.

“이것이 너를 살렸다.”

이령의 앞에 피가 묻은 끈이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새끼 여우의 발을 감았던 제 치마였다. 그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구미호를 응시했다.

“이게 왜…….”

물기가 그득한 눈망울로 초월적인 존재를 바라보는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끼이이…….”

새끼 여우가 다가왔다. 새끼 여우는 이령의 뺨을 핥으며 위로했다.

“너는…….”

“얘 이름은 아모야, 태어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어. 덫에 걸려서 죽을 뻔한 걸 구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달래. 형님께서 너희에게 기회를 주신 것도 아모의 부탁 때문이야.”

기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억을 지웠으면서.

아이가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던 이령이 불안한 눈동자로 구미호를 바라볼 때 아이가 새끼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간의 피가 묻은 덫은 신령님이라고 해서 쉽게 만질 수 없거든. 수행 중인 몸은 더더욱 만질 수 없어서 구할 수 없었는데 네가 도왔어. 신령님도 못하는 일을 네가 한 거야.”

“끼이이.”

새끼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이령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저…… 살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마음이 복을 부른 게지.”

“복이라니요, 이게 복이라는 건가요?”

이령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만 가자.”

구미호는 쌀쌀맞았다. 멀리서 이치와 타래의 기척이 느껴져 예민해진 탓이었다.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벗어나는 게 좋다.”

구미호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돌아섰다. 제 볼 일을 마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아이는 구미호가 멀어져 가자 넌지시 귀띔을 해 주었다.

“형님이 그러시는데 천생연분이라면 끊어진 실도 이어질 만큼 다시 붙을 거래.”

“천생……연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면 기억을 잃어도 다시 만나게 되겠지. 네 지아비가 널 알아보는 날, 봉인이 풀릴 거라고 하셨어. 그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천생연분에 희망을 걸어 봐.”

아이는 눈웃음을 짓고는 이령에게서 새끼 여우를 떼어 냈다.

“하늘도 네 편일 거야. 그러니까 너 또한 부디 행복하렴!”

“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 나도 구미호!”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돌아섰다. 형님이라고 불리던 구미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여우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구미호.”

구미호와 여우의 모습이 어둠 속에 파묻히자 적막감이 감돌았다.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적막감을 밀어내곤 있었지만 스산했다.

이령은 검무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잠에서 깨면 이령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네와 나는 끝났어.”

“마음에서 도려낸 자네를 다시 들이지 않아.”

말이 씨가 된 것처럼 도려냈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끝…….

이령은 검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입맞춤. 검무와 입술을 겹친 그녀는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이제야 진짜 이별을 고하듯 속삭였다.

“안녕, 내 사랑…….”

7장. 몸은 기억해

“으아아악!”

“끄아악!”

“차라리 주, 죽여 주십시오, 폐하!”

대전 앞의 너른 마당은 고통에 전 비명과 피로 얼룩져 살풍경이었다. 이레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숙청 작업을 이어간 검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고문 현장을 구경했다.

“죽이려고 하는 짓이니 부탁할 것 없다.”

검무는 술잔을 비우며 역모를 꾀한 역당들을 노려봤다. 성군을 꿈꾸었던 황제가 흉포하게 변하자 신 황제를 옹립하려는 무리들이 생겼다.

최근 2년 간 무려 여섯 번이나 역모의 현장을 급습하여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도륙하였다. 충심을 버린 자들을 색출하여 피의 숙청의 강도를 높였지만 황위를 노리는 자들의 야욕은 여전히 활발했다. 암살 시도까지 해 가며.

“짐이 폭군인가? 백성들을 핍박하며 고혈을 짜냈던가? 그렇다고 너희들의 의견을 묵살했나? 어찌하여 짐에게 반기를 드는 게지?”

검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법을 강화하고 세금을 올린 것은 국력을 위한 방편이었다. 전쟁을 통해 국토를 넓히자는 생각이 잘못된 건가? 어찌하여 너희들은 배신자가 되어 짐의 가슴을 찢어 놓느냐!”

“폐하는 변하셨습니다! 변절자는 저희가 아닌 폐하입니다!”

“닥쳐라! 짐은 처음부터 늘 한 곳에 있었다. 한데 무슨 근거로 변했다고 하느냐!”

“폐하는 마음을 잃으셨습니다!”

“마음을 잃어?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나 그딴 개소리도 이것으로 끝이다. 놈에게 독약을 내려라,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게…….”

“내일이 네 죽는 날이야! 내가 환궁하면 내일 오전에 독약을 내리라고 할 것이다! 오장육부가 타는 게 어떤 고통인지 느껴 봐! 그래, 네 말대로 잘 먹고 잘 살 테니까!”

검무는 이마를 짚었다.

“또…….”

이따금 누군가에게 퍼부었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처럼 독약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땐 불 같이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생생했다.

최근의 모습이 아닌 몇 년 전의 얼굴이었다.

대체 누구한테…….

“폐하, 괜찮으신지요?”

이치가 다가와 물었다. 하지만 검무는 독기를 품은 표정으로 그를 경계했다.

“괜찮을 리 있느냐! 저것들을 참수한 후 효수하라! 이 땅에서, 나의 나라에서 역모를 꾸민 자의 대가를 백성들에게 톡톡히 알려야 한다. 알겠느냐!”

검무는 고문을 담당한 집행인들에게 고함치고는 편전으로 향했다. 옷깃을 날리며 걷는 동안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차올랐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눈물이 맺힌다. 분해서 죽겠는데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팠다.

“대체 이 감정은…… 무어란 말이냐.”

욱신거리는 가슴을 쥐어뜯듯이 움켜쥐며 편전에 들어서던 검무는 움찔했다. 황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검무는 황태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비틀대던 몸에 힘을 줬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는 잔뜩 일그러트렸던 인상을 근엄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대전은 좀 어떻소?”

“역당들을 참수하라고 하였습니다.”

“잘했소, 현명한 판단이오.”

“……예, 어마마마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검무는 신경적인 어조로 대답하고는 어좌에 앉았다. 눈앞엔 태산처럼 쌓인 상소문이 있었다. 그는 황태후에게 보란 듯이 상소문을 집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상을 위로하고자 왔지요.”

“위로가 되지 않으니 황태후전에나 계세요.”

“이 어미에게 원수가 졌소?”

“친어머니에게 원수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한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고 왜 그런 눈초리로 보는 게요!”

3년 전 환궁한 이후 황태후를 대하는 검무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앙금이 많은 듯 친모(親母)임에도 대하는 행동이 비정했다.

“이 더위에 왜 자꾸 돌아다니십니까? 더위도 많이 타시면서.”

“딴소리하기요?”

“더위를 많이 타시니까 걱정하는 겁니다.”

더위를 타는 황태후를 위해 편전의 얼음을 잔뜩 꺼내 놓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더위를 탔다. 황태후전의 여관들이 얼음 앞에서 부채질을 해 보아도 황태후는 빗물처럼 흐르는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무는 그런 어머니를 흘끗거리며 상소문을 읽었다. 매일매일 저렇게 땀을 흘리면서도 편전까지 쫓아와 황후 간택 얘기를 하는 바람에 반갑지 않았다.

오늘도 분명히 황후전의 주인 타령을 하며 국혼 준비를 서두르라 압박할 터다. 검무는 황태후가 황후 간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입술을 뗐다.

“태의에게 열을 내리는 탕약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겠습니다.”

“이미 지어 먹었지만 소용없소.”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발가벗어도 땀을 흘릴 게요.”

“소자나 다른 이들은 견딜 만하다는데 유독 더위를 타십니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사람만 이 어미의 기분을 알 테요.”

황태후는 얼음을 가득 넣은 주머니로 홍조를 식혔다.

“황상, 이 어미의 몰골을 보고도 고집을 부릴 게요?”

“더울 땐 처소에 가만히 계시는 게 좋습니다.”

“자꾸 딴소리할 거요! 이 어미가 왜 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못 들은 척하는 게요!”

“조금 전엔 소자를 위로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소자를 기만하십니까?”

“기만이라니요! 온 김에 황후에 대해 걱정하는 게 아니오!”

황태후가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검무는 상소를 내려놓았다. 오늘 안으로 읽고 처리해야 할 상소문이 산처럼 쌓인 게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나 보다. 언제나 며느리를 볼 생각뿐이었다.

“황후 간택은 시기상조입니다.”

“황후전을 텅텅 비워 놓은 게 몇 년째인 줄 아시오! 주인을 앉혀야 이 어미도 마음을 놓을 게 아니오! 그렇다고 후궁을 들이셨소, 숨겨 놓은 자식이 있소!”

“황후전이 비워진 게 몇 년째입니까?”

“뭐, 뭐요?”

정곡이 찔린 황태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검무는 어머니의 반응이 우스워 이죽거렸다.

“어마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을 곱씹어 보면 꼭 누가 있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원 주인이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식으로요.”

“그런 적 없소. 말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소리면 그만둡시다!”

“예, 소자도 그만둘 생각입니다. 하니 황후의 간택은 가뭄이 해결되면 다시 논의하지요.”

“황상!”

“몇 년째 가뭄이 심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시국에 장가를 가다니요. 지금과 같은 시국에 장가가면 후세에 폭군으로 기록됩니다. 그런 걸 바라십니까?”

“황제가 총각이니 가뭄이 심한 게요!”

황태후는 이령의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진 검무에게 총각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황후를 들이라고 독촉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 이 어미가 죽고 나서 할 겁니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십니까? 그러니까 더 더운 겁니다.”

“약 올리는 게요!”

“어마마마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 부아가 치미는 건 이해하나…… 아랫것들이 지척에서 보고 듣는 걸 알면서도 윽박을 지르시면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검무는 황태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령의 기억을 지운 후 검무는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모두에게 쌀쌀맞고 곁을 내주지 않으려고 경계했으며 말수가 유독 줄었다. 전엔 이치나 타래, 노을을 불러 농담 따먹기를 곧잘 했었지만 요즘은 혼자 지내는 걸 좋아했다.

그 탓에 벗처럼 지냈던 환관들에게도 대하는 게 어려운 황제로 군림했으며 조정 대신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황태후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어머니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할 만큼 차갑고 무정했다.

“그, 그렇게 노려보면 이 어미…… 심장이 멎습니다, 황상.”

“소자는 황제입니다. 어마마마의 치맛바람에 휘둘릴 생각이 없으니 이만 물러가세요.”

“후사는 어쩌게요? 황상의 연치 스물여섯이오. 스물여섯이면 지금쯤 황태자를 보고도 남아야지요!”

“소자가 종마입니까? 왜 자꾸 새끼를 치라고 하십니까?”

“새, 새끼를 쳐요? 황위를 이를 아들을 얻어야 함은 황제의 첫 번째 소임이오!”

황태후는 어이가 없어 얼굴을 더욱 붉혔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후궁을 들이라고 해도 싫다고 하고 여인에겐 눈길을 아예 주지도 않으니…… 이 어미는 불안합니다.”

“기분이 이상해요.”

검무는 상소문 사이에 껴 놓은 사료(史料:역사를 기록한 책)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검무가 태어난 날부터 빼곡하게 적어 놓은 기록에 11살 이후의 행적 중 일부가 조작돼 있었다.

교묘하게 고쳤다고 하도 종이와 먹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기 마련인데 열한 살과 스물세 살의 기록만 종이가 달랐다. 기록에서 지워야 할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기분이 어떻게 이상하다는 게요?”

“혼인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괜히 눈물이 납니다. 마치…… 그리운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욱신거려요.”

검무는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텅 비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우연히 황후전의 앞을 지날 땐 눈가가 시큰거려요. 어쩌다 황태자궁에 들르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맙니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입니다.”

황태후는 숨을 죽였다. 이령에 관한 기억이 지워진 지 3년이 지났음에도 마음을 못 잡는 아들이 두려웠다.

저러다 이령을 기억해 내는 건 아닌지. 기억해 낸다면 그 분노를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든 게 막막했다.

“소자에게 정인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기억은 없는데 왜 자꾸 슬픈 걸까요?”

“외로워서 그런 게지. 혼인밖엔 답이 없으니까 서두릅시다.”

“외롭긴 합니다. 하나 어마마마께서 염두에 두신 여인은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게요! 내가 어디 모자라거나 부족한 사람을 황후를 앉히겠소!”

“황후로서의 자질이 갖춘 여인이겠지요.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황상!”

“보나마나 어마마마께 이로운 상대가 아니겠습니까? 소자와는 추구하는 바가 다를 겁니다.”

이상하게 화가 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황태후만 보면 고운 말이 나오지 않고 밉다. 저를 낳아 준 어머니인데도 못돼먹은 계모처럼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황태후는 점찍어 놓은 규수가 나이만 먹는 게 마음에 걸려 머리를 굴렸다.

“마음이 번잡한 듯하니 암행을 다녀오세요.”

“웬일로 암행을 나가라고 하십니까?”

“누가 압니까? 길에서 운명을 만날지.”

“운명이오? 어머니는 농담엔 소질이 없으시니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하십시오.”

검무는 황태후의 속을 후벼파는 소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뱉었다. 황태후는 얼음을 입에 넣으며 화를 삭였다.

“이치와 타래에게 차비를 놓으라고 하지요.”

“……예, 어머니께서 바라시면 다녀오겠습니다.”

“여인들에게 눈길을 주세요. 그래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마음에도 들어오는 법입니다.”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검무는 코웃음만 쳤다. 황태후는 아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서둘러 일어났다. 같이 있어 봤자 기분이 상하는 건 자신이었다.

편전을 나온 황태후는 이치와 타래를 조용히 불렀다.

“황상을 모시고 암행을 다녀오너라, 그러다 바퀴가 빠진 마차를 발견하면 도와줘.”

운명을 만들어 줄 생각인 듯 황태후가 속삭이자 이치와 타래가 대답했다.

“예, 황태후마마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마차의 주인이 곧 황후전의 주인이 될 테니까 황상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눈치껏 행동하렴.”

이치와 타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3년이나 기다렸으면 자신도 할 만큼 했다는 듯 황태후가 검은 속내를 드러냈다.

“올해는 반드시 황후전의 주인을 들여야 해, 반드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