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2)

***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맥이 매우 불규칙합니다. 탕약으로 마지막 기력을 끌어올리고는 있사오나 약효가 떨어지면 ‘그날’을 맞이하실 듯합니다.”

마음의 준비, 마지막 기력…….

마음이야 매일매일 굳게 먹고 있고 기력이 떨어진다는 것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강한 진통제과 자양강장의 효과로 인해 버티고 있었다는 것도 늘 상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르면 오늘, 시간을 끌어 봤자 내일이 바로 ‘강이령의 생과 이별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텅텅 빈다.

“마마,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이령이 넋을 놓고 있으니까 노을이 걱정이 돼 물었다.

“뭐라고 했니? 내가 잠깐 딴 생각을 했지 뭐야.”

“오늘…… 폐하와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어요.”

“매일매일 시간을 보내는데 무슨 소리를 하니?”

“아니, 단둘이…….”

“그것도 단둘이 매일매일 합궁을 했잖아.”

“소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오라, 좀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이치나 타래, 석삼은 원래 말 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죽음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지만 노을은 달랐다.

“요 계집애 같은 놈.”

“사내에게 계집애라니요? 정말 섭섭합니다!”

“넌 꼭 금란 같아. 그런데 노을아, 금란도 오늘은 말을 아끼는데 너는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 조용히 해.”

“마마를 위해서 드린 말씀인데…….”

노을은 금방 풀이 죽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갈 사람은 주변을 정리하는 법이란다. 버리는 것에 미련을 담아 무얼 하겠느냐. 오후에 어가가 도착하면 곧바로 떠날 수 있도록 네가 할 일에만 집중해.”

“그럼 마마는요?”

노을이 울상을 지었다. 그는 툭 건들면 눈물을 왕창 뽑을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그 바람에 이령은 한숨을 쉬었다.

“추억이라도 쌓으라고? 흙으로 돌아가는 내가 그런 추억을 기억할 듯싶으냐? 그리고 폐하께도 못할 짓이야.”

“폐하가 진실을 알게 되시면…… 서운해하실 거예요.”

“새 장가를 드시면 나 같은 건 잊고 잘 사실 거야. 그러니까 질척거리지 마.”

이령은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가 가라앉아 있으니까 노을이 영향을 받아 안 되겠다. 외출해야지. 마지막 기력으로 버티는 거라고 하니까 신나게 돌아다녀야겠다.

“난 금란과 외출할 테니까 너희는 짐 정리를 하렴.”

“소인이 동행하겠습니다.”

타래가 나섰다.

“됐어. 금란에게 해 둘 말도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폐하나 잘 모시고 가.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을 테니까 개화궁을 나갈 때 대문에 끈을 달아 다오. 그 끈을 보고 들어오게.”

“마마…….”

“너희들의 표정 때문에 같이 있고 싶지 않아. 죽을 사람은 나야. 앞날이 창창한 너희가 왜 죽을상이니?”

이령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후 바닥에 시선을 묻은 금란을 불렀다.

“금란아, 외출하자.”

이령은 금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등에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잘 참고 있다고 여겼던 금란이 울기 시작하자 이령도 코끝이 찡했다.

“너희들 참…… 눈치 없어.”

이령은 금란의 손을 놓았다. 이젠 화가 난다. 적당히 좀 해!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속상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듯이 이령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할 거면 내 곁에 얼씬도 마. 자기가 죽어? 죽는 건 나인데 왜……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구나.”

이령은 금란과 노을을 노려본 후 처소를 나왔다.

“오늘은 혼자 놀아야지,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 거야.”

눈물이 맺힌 눈을 끔뻑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내일도 없으니 오늘만 사는 것처럼 재미있게 놀 거야.”

질질 짜기만 하는 건 이령답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던 그녀는 한시라도 즐길 생각으로 기분을 전환시켜야 했다.

양팔을 펄럭거리며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려는데 검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되겠구나.”

이령은 움찔 놀라 어깨를 옹송그렸다.

“불청객이라도 만난 것처럼 똥 씹은 표정이구나.”

“어, 어쩐 일이세요?”

“보고 싶어서 왔느니라.”

검무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달맞이꽃을 불쑥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라서…….”

“꺾으셨네요.”

“자네가 좋아하는 꽃이니까.”

“제가 좋아하면 꺾어도 돼요?”

이령이 눈을 크게 뚜고 흰자위를 번득번득 움직이는 바람에 검무는 긴장했다.

“왜 또 그렇게 날카롭게…… 자네를 위해서…….”

“제가 언제 꺾어 놓은 꽃을 좋아하든가요? 어디서 죽은 것을 들고 오세요! 왜 멋대로 꺾어서 죽여요! 황제니까 모든 게 하찮아요!”

이령이 소리를 질렀다. 목까지 새빨갛게 붉힌 그녀는 검무가 꺾어 온 달맞이꽃이 꼭 제 신세 같아 가슴을 들썩거렸다.

“귀하고 예쁘면 꺾을 생각을 하지 마시고 지켜보세요. 가꿀 생각을 하세요!”

“그, 그렇게 화를 낼 건 없잖나…… 무안하군.”

“오늘 환궁하신다니 적당히 하겠습니다.”

“자네…….”

검무는 달맞이꽃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손을 털었다. 꽃을 주면서 감정의 골을 좁히려고 했다가 외려 얼굴을 붉히게 만든 것 같아 민망했다.

검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물기가 말라 버린 입술에 침을 축였다.

“나와 시간을 보냈으면 하네. 저자 구경을 같이 해도 좋고.”

검무는 이령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환궁하기 전에…… 매듭을 지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매듭은 이미 지어진 게 아닌지요?”

“이령아, 오늘은 황제와 황후…… 그런 거 다 떼고 사내와 여인으로 정답게 놀아 보자. 그네를 타는 게 어떻겠느냐? 어릴 때 우리는 종종 그네를 타며 놀았지.”

이령이?

이령은 검무가 제 이름을 부르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당황했다. 어제 기력을 잃고 앓았던 것 때문에 잘 대해 주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자네라고만 하셔도 돼요. 언제부터 이름으로 불렀다고…….”

“오늘부터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령이, 예쁜 이름을 아껴서 뭐 하나?”

“그동안은 왜 아끼셨나요?”

“오늘 이후로 많이 불러 주마.”

어색하고 열없었던 검무는 얼굴을 붉혔지만 이령의 태도는 여전히 정답지 않고 차가웠다.

“싫어요, 정을 떼도 모자랄 판에…… 정 붙일 일이 있어요?”

“그네가 별로면 다른 걸 해도 되는데…… 우리 이령이가 무엇을 좋아했더라?”

“싫다니까요.”

“어명이야.”

“왜 이러십니까!”

검무에게 잡힌 손을 뿌리친 이령이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녀의 반응이 까칠한 탓에 자존심을 굽혔던 그 역시도 격한 감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명이라고 했느니라. 네가 명을 거스른다면 금란에게 죄를 물을 게야! 금란이 고초를 겪어야겠느냐?”

“폐하는 악랄하십니다.”

하다하다 별 소리를 다 듣는다. 검무는 기가 막혔지만 이령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온기를 전하면 마음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하게나마 들었다.

“웬 손이 이렇게 차가워.”

검무는 이령의 손이 여전히 차갑고 뻣뻣한 게 마음에 걸렸다. 기력을 되찾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정말 귀찮아.”

이령은 울상을 지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검무 때문에 속상했다. 하나같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귀찮아도 참아, 환궁하고 나면…… 또 답답하게 갇혀 살아야 해. 오늘은 우리 둘만 생각하자.”

“언제는 죽으라더니…… 이젠 놀자고…….”

“네가 먼저 대들고 할퀸 건 기억 못 하지? 무조건 내가 한 말만 분하지?”

“놓으세요!”

이령은 잡힌 손을 털었다.

“질척대지 마시고 환궁 준비나 하세요.”

“그 준비를 왜 내가 하느냐? 준비는 아랫것들이 하는 게야. 그러니까 우리는 나가자.”

“싫습니다! 좀 떨어져요!”

“왜 자꾸 싫다고만 하냐, 좀 받아들이면 안 되겠나?”

“폐하와 정을 뗄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떼려는 그 정을 붙여야겠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검무는 이령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화해를 청하는 게야.”

“화해라니요? 저를 살려 주시겠다는 건가요? 저를 황후로 복권시킬 생각이세요?”

“맞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서 제가 소중해지셨나요?”

검무는 제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 이령에게 귀염성 있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령은 똥 씹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령아, 네 덕분에 죽을 뻔한 목숨을 구했으니 소원 한 가지는 들어줘야지.”

“제 소원이 복권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늙어 죽을 때까지 폐서인으로 살길 바라는 사람도 있더냐?”

“좋아요, 복권이 되었다고 쳐요. 소인은 불임입니다. 불임의 황후로 살라는 거예요? 폐하와 제가 왜 그렇게 다투었는지 잊으셨나요?”

이령이 인상을 잔뜩 구겨도 검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태자 시절의 검무로 돌아간 듯 이령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자식은 하늘이 내려 주는 게야. 자식 복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지. 황족 중에서 나이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여 태자로 삼으마. 또 후궁을 들이지 않겠노라 약속할 테니까 서운한 게 있었다면 모두 잊고 예전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양자를 들이겠다니 정말…….”

이령은 당황했다. 황태후가 참도 가만히 있겠다. 황제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강한 믿음에 찬물을 뿌리고 싶다.

“양자의 문제는 감정적으로 행할 일이 아니에요. 누굴 불구대천의 악녀로 기록하게 만들 요량인지요?”

“불구대천이라니, 단어가 너무 과격하구나.”

“아들은커녕 딸아이 하나 얻지 못한 황후, 시어머니께 얼마나 구박을 당하라고요?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백성들은 황후가 자식을 얻지 못한 탓이라고 멸시할 겁니다. 조정에서도 폐하를 압박할 텐데 그런 수모를 당하라는 그 말씀입니까?”

“우리 둘이 같이 지내려면 견뎌야 한다.”

“저는 견디고 싶지 않습니다!”

이령이 복장이 터져 죽겠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쿵! 하는 소리에 머리가 흔들렸지만 이번에도 통증은 없었다.

“벼락이라도 맞으셨습니까? 갑자기 왜 이래요!”

“벼락을 맞은 게 아니라…… 진심에 눈을 뜬 게야. 그리고 후회했다.”

악몽에 관한 내용은 혼자만의 비밀로 삼고 싶었던 검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네에게 독약을 내리고 사냥터로 갔지.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황궁에 있을 수 없었어. 사냥을 하며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으나 자네를 죽이면 후회할 것 같았어. 하지만 이 못난이는 자존심 때문에 갈등했네. 그러다 구미호를 쏘았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좀 들어!”

검무가 소리쳤다.

“자네를 놓을 수 없는 이유를 말하려는 거야. 후사보다 강이령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게잖아!”

그러니까 왜, 갑자기 왜!

꼭 뭘 아는 사람처럼 다급해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이령은 검무의 뒤에 선 이치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치도 모르는 눈치다. 그녀보다 더 불안해하는 게 보였다.

“어가가 도착하면 같이 가자.”

“안 갑니다. 그러니까 놓으세요.”

“이령아!”

“놓으란 말이 안 들립니까!”

이성을 잃어 눈이 홱 돌아 버린 이령이 검무를 밀쳤다. 죽을힘을 다해 밀쳤더니 중심을 잃은 그가 휘청거렸다.

“제가 우스워요! 황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죽으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잃을 수 없어요? 같이 환궁해요? 같이 가자고 하면 춤이라도 추면서 감사해할 줄 알았어요? 저는 감정이 없습니까! 미안하다? 내 가슴에 대못을 쳤으면서 지나가는 투로 미안해?”

이령은 어깨와 가슴을 들썩거렸다. 흡사 성난 강아지 같았다. 제발 건들지 말라고 으르렁거리며 무서워서 죽겠다고 몸을 바들바들 떠는 그런 강아지.

“저는 폐하를 용서할 마음이 없으니까 새 장가 가세요. 가서 이 빌어먹을 나라를 천년만년 끌고 나갈 후사를 잔뜩 얻으세요!”

“적당히 좀 해!”

검무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황제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뼛속에 새긴 내가, 이 자존심에도 굽히고 들어가면 못 이기는 척 봐주는 맛이 있어야지!”

“못 이기는 척 봐주는 맛을 느끼고 싶으면 새 장가를 드세요! 폐하의 입맛에 맞는 처를 얻으시면 됩니다!”

“널 잃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검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던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이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외려 독기를 품은 것처럼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이미 잃으셨습니다!”

“되돌리고 싶다, 예전처럼 아기자기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되돌릴 수 없어요.”

“이령아!”

검무가 이령의 이름을 불러 가시 돋은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폐하가 싫어요!”

이령이 악을 쓰자 검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싫어?

이 정도로 했는데도 미움이 크다는 건가?

뜻밖의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북받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씩씩거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매서운 눈초리를 떠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싫다고…… 그러니까 꺼져.”

“마마!”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이령이 불안했던 이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마, 소인을 보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폐하를 내 눈 앞에서 치워.”

“네 어찌……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느냐! 네 어찌…….”

꺼지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검무도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좋다! 네 말대로 꺼져 주마! 네 인생에서 영영 꺼져 주마!”

“예, 감사합니다!”

“이것이!”

검무가 손을 올리자 이치가 양 팔을 벌리며 막아섰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마마, 폐하를 자극하지 마세요!”

이치가 이령을 말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나 보다. 그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힌 검무를 조롱하면서 마음을 잘근잘근 밟았다.

“폐하께서 완전히 꺼질 때까지, 제가 나가 있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부디 성군이 되세요, 부디 든든한 후사를 보세요, 부디 저를 잊어 주세요. 부디 행복하시고 천수를 누리세요. 부디, 부디, 부디! 잘 먹고 잘 사세요!”

이령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고집스레 삼키며 돌아섰다. 궁실 안에 있던 금란, 타래, 노을이 나와 있었다. 세 사람은 이령을 아픈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자신을 가엾어하는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이령은 일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그녀는 곧장 궁문으로 향했다.

“내일이 네 죽는 날이야! 내가 환궁하면 내일 오전에 독약을 내리라고 할 것이다! 오장육부가 타는 게 어떤 고통인지 느껴 봐! 그래, 네 말대로 잘 먹고 잘 살 테니까!”

바라는 대로 됐다.

구미호의 독에 의해 죽는다는 걸 영원히 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이가 없고 난데없는 고백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슬기롭게 대처한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위기를 잘 넘겼다.

미안해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게 낫다.

검무는 황제다. 황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무너져선 안 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검무로선 황제의 책임감을 견디기엔 약해 보였다.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폐인의 길을 걸을 것 같았다. 죽는 마당에 별 걱정을 다 한다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황제의 체면을 중요시 여겼던 검무가 사과했다.

그의 말대로 한 발 물러나고 자존심을 굽히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뻤다. 그녀에겐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한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그간의 서운함이 녹아내려 그녀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할 것 같다.

작은 미련도 남겨선 안 되니까.

내가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들은 게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검무는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헛웃음을 쳤다. 처소로 들어서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긴 했지만 그 모습이 처참할 만큼 흐트러져 이치도 멀찍이 떨어져 분위기만 살폈다.

“미친 게야, 미치지 않고선 꺼지라는 소리를 어떻게 해? 밉다는 말이야 숱하게 들었지만…… 꺼지라니……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은 이상 그딴 소리를 어떻게…….”

넋을 놓고 있던 검무가 실실거렸다.

“이젠 정말 끝인가?”

가슴이 아프다. 목구멍이 타오르는 것 같고 뱃속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인해 엉망진창으로 엉켰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폐, 폐하…….”

눈치를 보던 이치가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이냐.”

“화, 환궁을 하셔야 합니다.”

“왜 그렇게 재촉하는 게야!”

“개화궁에 계셔 봤자 싸움만 커집니다. 차라리 환궁하시어 시간을 가지고 화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어떨지요.”

검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치의 말이 맞다. 하룻밤을 더 지낸다고 해서 밤사이에 사이가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개화궁을 나서면 영영 이별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울고 싶었다.

“폐하, 환복하시지요.”

“그이는 돌아왔느냐.”

“아직…… 금란이 뒤쫓아 나갔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란만 보낸 게야.”

“저희가 따라붙으면 폐하께 화살이 돌아갑니다. 하여 금란만 보냈습니다.”

“이치, 너는 사리판단이 빠르구나. 환관이 되지 않았다면 현명한 지아비로 처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지 않겠지.”

검무는 자책하듯 말하곤 울 듯한 얼굴을 억지웃음으로 감추었다.

“부부로 산다는 건 참으로 어렵구나.”

“소인은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은애하는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하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겠으나…… 시간이 해결책이지 않을까요.”

“시간이 해결책이다…….”

“지나고 나면 그땐 그랬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마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태의가 말했다. 이령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이령 또한 자신의 죽음을 느낀 듯 어가가 도착하는 대로 떠나라고 했다.

또 검무에게 온갖 막말을 퍼부어 대며 정을 끊으려고 하지 않나. 이치로선 속이 새카맣게 타는 기분이었다.

검무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슬슬 힘에 부친다. 이치는 시간이라는 핑계를 댄 후 환궁을 재촉했다.

“환복하시지요, 어가가 개화궁 근처까지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알았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너라.”

이치에게 설득 당한 검무는 몸을 일으켰다.

“네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야지. 그이에 대한 건 환궁 후에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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